38선 이북의 일본인들
● 무지막지한 소련군의 실체
1945년 8월 말 평안북도 강계 : 일본인촌
일본인 촌의 젊은 처자들은 소련군이 오고있다는 소식에
황급히 수수밭으로 달려가 몸을 숨겼다.
미처 집을 빠져나가지 못한 사람들은
다락과 지하실로 들어가 문을 굳게 걸어 잠궜다.
또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여자들은 모두 머리를 잘랐다.
머리를 빡빡 깎은 여성은 건드리지 않는다라는 소문에
모두 까까머리를 한 것이었다.
소련군은 백주 대낮부터 한국인을 앞잡이로 세워
마을의 일본인 집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그들은 무언가 돈이 될 만한 물건이 없나
여기저기를 뒤졌고..
그중에서도 소련군은 유독 시계와 만년필을 좋아했다.
술을 달라는 병사도 있었다.
하지만 술을 내주면 순순히 돌아가기는 했지만
문제는 이들이 술에 잔뜩 취해 다른 집으로 들어가 행패를 부렸다는 것이다.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소련군에게
절대 술을 내주지 않기로
사전 약속까지 하게된다.
하지만 소련군 한 무리가 지나가고 나면
곧 또 다른 패거리가 나타나 이번에는 이불과 담요를 가져갔고
더 이상 찾아오지 않겠거니 생각할 무렵에는 여군들이 와서 취사도구를 챙겨갔다.
이것이 바로, 말로만 듣던 소련군의 현지 조달 방식이었다.
1945년 8월 말 평안북도 곽산 : 충격적인 소련군의 모습들
소련군의 첫인상은 강렬했다.
당시 한 일본인의 목격담은 다음과 같았다.
”윙~윙~” 소련군이 곽산에 온다는 사이렌 신호가 떴다.
조선 사람들은 겉으로는 환영하는듯 했지만 사실 그들도 안심할 수 없었고
부녀자들은 재빨리 집으로 돌아가 시계나 금붙이 등을 숨기고 있었다.
실제로 소련군은 전투태세로 침공해왔기 때문에
일본인과 한국인을 가리지 않고 약탈과 폭행을 자행하고 있었다.
그런 소련군의 행렬을 보면 모두들 적잖이 놀라게 된다.
마차를 앞세운 긴 행렬이 이어지고 긴 장총을 어깨에 걸쳐 걷는 소련군들은
마치 유목민의 모습과도 같았다.
군대의 행렬 후미에는 양과 닭까지 매달고 있었다.
심지어 마차 위에는 부뚜막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소련군들은 개고기를 얻기위해
주인이 있든 없든 길에 나다니는 개가 보이기만 하면
어김없이 총을 쏘아 잡으며 행군을 계속하였다.
이들은 무기와 탄약을 제외하고는 모두 현지에서 조달하고 있었다.
● 소련군의 현지조달
소련군은 왜 북한에 주둔했나?
원자폭탄 투하로 일본에 대한 각종
이권이 미국으로 대거 넘어갈 듯
하자
소련은 서둘러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동아시아 전선으로 뛰어들게
된다.
사실 소련군은
한반도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저 바람이
있다면, 폴란드와
마찬가지로
소련에 우호적인
정부를 하나
그쪽
동네에 만들면 그것으로 만족할 정도였다.
당시 소련의 주된 관심
지역은 동유럽이었지 동아시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에서도
한반도보다 전통적으로 소련의 목을 조여온
만주지역,
그리고 일본과 이권을
다투던 홋카이도, 사할린 지역을 소련은
더욱 중시했다.
애초에 한반도는 별 관심이
없었고
북한을 먹은
것도 만주, 사할린
지역과
연동되는
형태로 이뤄진
것이었다.
소련군의
현지조달의 배경
소련은
2차대전에서 비록
승전국 반열에는 올랐지만,
까놓고 말하자면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2차 대전 중으로 2,500만명이
사망했는데
이것은 대전으로
죽은
전세계 사망자의 40%에 해당하는
엄청난 수치였다.
또 전쟁으로 GDP가 17%나 감소했기
때문에 종전
후 소련의 최우선 과제는
무엇보다 노동력
확보와 경제복구였다.
이런 상황과 맞물렸으니..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의 주둔 비용은
철저히 현지 조달 방식을 취하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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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소련군 병사들의
월급도
북한 재정으로 충당하고 있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소련군은 배상
명목으로
수풍발전소를
비롯해
한반도의
주요 공장시설,
광물자원,
생산품 등을 마구 반출하고
있었다.
1946년 1월 초 평양 : 일본인은 소중한 노동력
미소 공동위원회를
앞두고
북한에 있는
일본인들의 남하 문제를 논의하게
위해 미군 장교들이 평양을
방문했다.
당시 소련군
관계자는
상부로부터 일본인 송환에
관한 지시를
따로
받은 것이 없었지만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일본인들을 그대로 돌려보내기에는
현지조달과
노동력의 확충
북한을 상대하는 소련의
인식은 철저히 뜯어먹고 보자는
식이었다.그들은 단순히 생산
설비만
반출해간 것이
아니라 북한에서 생산시설을
가동하여
완제품을
만들어 반출하고
나중에 생산 설비를 뜯어가는
형식이었으니
그야말로 꿩먹고 알 먹는
방식이었다.
그런가하면 소련군이
보기에 일본군
포로는 더
없이 훌륭한 인적자원이었다.
일본인들 중에서는 고등교육을
배우고
엔지니어가 많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애초에
소련군은
일본인들을 본토로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다.
따라서 1946년
3월까지
남한의
일본인들은 모두
일본으로 돌아갔으나
북한의
일본인들은
여전히 발이 묶인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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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線 以北の日本人たち
● 無智で暴悪なソ連軍の実体
1945年 8月末平安北道江界 : 日本隣村
日本人寸意若い 妻子たちは ソ連軍が来ているという 消息に
慌てて授受畑で 駆け付けて 身を 隠した.
まだ家を抜け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人々は
屋根裏と地下室で 入って行って 門を 固くかけてザムグォッダ.
また誰が先にだとすることも なく
女達は皆頭を 切った.
頭をくりくりに削った 女性は 触れるの ないという うわさに
皆 丸坊主をしたのだった.
ソ連軍は白昼 日中から 朝鮮人を岡っ引きで 立てて
村の 日本人家を隅隅まで探していた.
彼らは何かお金になるに値する品物が ないが
あちこちを 立ち後れたし..
その中でも ソ連軍は 有毒 時計と万年筆が好きだった.
お酒を甘いという兵士も あった.
しかしお酒を 渡せば 素直に帰ることは したが
問題はこれらがお酒にいっぱい 酔って 他の家に入って行って行悖を 使ったという のだ.
のため村 人々は ソ連軍に
絶対 お酒を渡さないことに
辞書 約束まで するようになる.
しかしソ連軍一無理が過ぎ去って 出れば
すなわちまた他の連中が 現われて 今度は布団と毛布を 持って行ったし
これ以上尋ねて来るの アンゲッゴだから 思う 頃には 女性軍たちが来て炊事道具を 持って行った.
これがちょうど, 口先だけ 聞いた ソ連軍の 現地調逹方式だった.
1945年 8月末平安北道グァックサン : 衝撃的なソ連軍の姿
ソ連軍の第一印象は 強烈だった.
当時ある日本人の目撃談は次と ようだった.
ウイング‾ウイング‾ ソ連軍がグァックサンに 来るという サイレン信号が 浮かんだ.
朝鮮人々は 表では 歓迎するようにしたが 実は彼らも 安心する 数なかったし
婦女子たちは素早く家で 帰って 時計や金具などを隠して あった.
実際にソ連軍は 戦闘態勢に侵攻して来た だから
日本人と朝鮮人を選り分けるの なくて 掠奪と暴行をほしいままにして あった.
そんなソ連軍の行列を 見れば 皆多く驚くように なる.
馬車を先に立たせた長い行列が つながって だと長銃を肩にかけて集める ソ連軍たちは
まるで 遊牧民の姿とも同じだった.
軍隊の行列 後尾には 羊とニワトリまでぶら下げて あった.
甚だしくは馬車 上には かまどまで 設置されていた.
ソ連軍たちは拘肉を得るために
主人があってもなくても 道に 出歩く犬が見えるだけで
間違いなく鉄砲をうって 取って 行軍を 続いた.
これらは武器と弾薬を 除き 皆現地で調逹して あった.
● ソ連軍の現地調逹
ソ連軍は どうして北朝鮮に駐屯したか?
ソ連は急いで日本に宣戦布告を して 東アジア電線で跳びこむように なる.
実はソ連軍は 韓半島には 何の関心が なかった.
当時ソ連の主な関心 地域は 東欧だった東アジアではなかった だからだ.
そして日本と利権を 争った 北海道, サハリン地域をソ連は もっと 重視した.
2次大戦中に 2,500万名が 死亡したが
こんな状況と かみ合ったから..
北朝鮮に進駐したソ連軍の駐屯 費用は
徹底的に現地調逹方式を取るようになった のだ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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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年 1月初平壌 : 日本人は大事な労動力
のため最初に ソ連軍は
北朝鮮の 日本人たち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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