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일본인들
밀항선, 도둑배
패전 당시 해외에 있던 일본인들은
어림잡아 총 700 만명에 달했다.
동쪽의 태평양 열도에서
서쪽의 인도차이나 반도까지
북쪽의 만주에서
남쪽의 인도네시아까지
그들이 일본으로 돌아가려면
모두 송환선이라는 배를 타고 가야 했다.
다만 한국은는 여타 식민지에 비해
지리적으로 가까운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공식 송환선 외에 밀항선을 이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들 밀항선은 도망치듯 떠난다하여
속칭 “도둑배”라고도 불렀다.
민간인은 약 70여만명,
군인은 20여만명으로 추계하고 있는데..
이들 중 20만명 정도는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러한 도둑배들은 위험을 무릅써가며
단기 특수를 노렸기 때문에
돌아갈 때는 빈 배로 떠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승객을 태우지 못하면 하다못해 밀수품이라도 싣고 갔다.
하지만 그런 덕분에 나중에는 그걸 노리는 해적들까지 등장하게 된다.
송환선 vs 밀항선 무얼 타고 갈것인가?
일본으로 돌아갈 때 밀항선과 공식 송환선 중에서 무엇을 탈 것인가는
단순히 교통편을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은 향후 그들의 인생이 걸린 도박과도 같은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밀항선의 경우 검역을 거치지 않았으므로 전염병에 감염될 우려도 있었고,
악덕 업자를 만나면 어렵게 가져온 재산마저 모두 빼앗기고
엉뚱한 곳에 내려놓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이 밀항선을 타고자 했던 이유는 분명했다.
공식 송환선을 타고가면 심사과정에서 반출 상태를 면밀히 수색당해야만 했다.
당시 민간인은 1000엔, 군인은 200~500엔 사이로
소지 금액이 제한됐고, 수하물도 휴대 가능한
보따리 정도로만 제한했었기 때문이다.
두고가는 공동묘지의 처리
일본인 공동묘지 처리는 큰 고민거리였다.
인천에 사는 일본인들은 그대로 놔두면 안되냐며 조르고 졸랐지만
이에 인천시장은 이렇게 말했다.
”만일 동경 한복판에 한국인 공동 묘지가 있다면 그거 그대로 놔두겠습니까?”
결국 인천시는 공동 묘지를 모두 없애고 일본인 유골들은 구덩이를 파서
모두 한곳에 매립시켜 버렸다.
떠나기 전에는 미처 생각치도 못했는데 막상 떠나려고하니, 일본인들은
조상의 무덤까지도 신경 써야 했던 것이다.
去る日本人たち
密航では, 泥棒盃
敗戦 当時海外にあった日本人たちは
見当をつけて 総 700 万名に達した.
東の太平洋 列島で
西の方のインドシナ 半島まで
北の満洲で
南側の インドネシアまで
彼らが日本で 帰ろうとすれば
皆送還船という船に乗って伽揶 した.
ただハングックウンヌンそのほか植民地に 比べて
地理的に近くの位置にあった だから
公式送還では外に 密航船を利用する場合も 多かった.
これら密航船は逃げるように トナンダして
俗称 ¥"泥棒盃¥"とも 呼んだ.
民間人は薬 70余万人,
軍人は 20余万人に秋季して あるが..
これらの中で 20万名位は密航船を 乗って
日本に行ったことに推測されて ある.
そういう 泥棒盃たちは 危険を ムルブソがであり
短期 特殊を狙ったから
帰る時はヴィン船に発つ場合は ほとんどなかった.
乗客を乗せるの できなければ せめて抜け荷でも積んで 行った.
しかしそんなおかげさまで 後にはそれを 狙う 海賊たちまで 登場するようになる.
送還では vs 密航では何を乗って行こうか?
日本に帰る 時 密航船と公式送還では中で何を仮面 のなのかは
単純に交通を選択する問題が なかった.
これは今後の彼らの人生が かかった 賭博とも同じ選択だった だからだ.
密航船の場合検疫を経るの なかったので 伝染病に感染される恐れも あったし,
悪徳業者を 会えば 難しく 持って来た財産さえ皆奪われて
無茶な 所に下ろす場合も あまたあった.
そうさにも かかわらず 日本人たちが 密航船を 乗ろうとした理由は明らかだった.
公式送還船を 他高価なら 審査過程で 搬出状態を綿密に捜索されればこそ した.
当時民間人は 1000円, 軍人は 200‾500円間で
所持金額が 制限されたし, 手荷物も携帯 可能な
包み位にだけ 制限した だからだ.
二高価は 共同墓地の処理
日本人共同墓地処理は大きくなった 悩みだった.
仁川に住む 日本人たちは そのまま差し置けばアンドエニャであり締めて 締めたが
ここに仁川市長はこんなに言った.
もし東京 真ん中に 朝鮮人共同墓地があったらそれ そのまま差し置きますか?
結局仁川市は共同墓地を皆 無くして 日本人遺骨たちは窪みを 売って
皆1ヶ所に 埋め立てさせて 捨てた.
去る前にはまだ思うのも できなかったが さて 去ろうと思ったら, 日本人たちは
先祖の墓までも気を使わ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の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