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공포 : 한국인들이 이렇게도 많았나?
당시 일본인들이 느꼈던 공포심은
평소 조선과 한국인들에대한
총체적인 무관심에서 비롯됐다.
사실 조선에 살던 일본인들은
한국인의 존재를 거의 의식하지 않고 살았다.
이런 경향은 식민 지배 초기에
한국인의 저항을 경험한 1세대와 달리
문화통치 시기(1920년대)에 이주해 왔거나
조선에서 태어난 2세의 경우에 더욱 강하게 나타났다.
이들은 조선을 타지로 인식하기보다는
일본 본토의 일부로 생각하고 있었다.
-호즈미 신로쿠로
일본인 촌 : 그들만의 분리된 공간
대부분의 일본인이 패전 직후에 나타난
한국인의 집단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일본인들은 집단을 이루며 한국인과는 다른 그들만의 공간에서 따로 살고
한국인들을 도시의 변두리에 살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일본인촌이 전역에 산재해 있었다.
당시 한 일본 초등학생(소학교 학생)은 말한다
”한번도 한국인 친구와
놀아본 기억이 없다.”
”내가 기억하는 한국인은
가끔씩 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다니며
물건을 팔던 아줌마가 전부였다.”
”원산에 그렇게 많은 한국인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은
패전이 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원산부립소학교 2학년 마쓰나가 아쿠오
경찰서에 근무하던 청년은 이렇게 물었다.
”패전했다고 꼭 내지(일본)로 돌아가야 합니까?”하고 물었더니,
그의 부모님들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저 돌아가야 한다고만 대답했다.
그는 왜 자기가 자신의 고향인
충청도 강경 땅을 떠나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패전 직후 한국인들이 왜 거리를 쏟아져 나와
만세를 외치는지도 이해 못했다.
-나카무라 기미(당시 23세) 충남 강경 경찰서 근무
돈을 인출하려는 일본인들
요즘은 밤이 깊어서야 겨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우편예금을 인출하려고 사람들이 몰려든 바람에 출금 업무가 갑자기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노우에 스미코 충무로 경성우편국 근무
은행에는 돈을 인출하려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8월 15일에만 은행이 보유한 지급준비금의 20%가 빠져나갔는데
이런 속도로 돈이 빠져나간다면 곧 은행은 파산이 나고 말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예금한 돈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게 되어
수많은 예금자들은 화가 나서 은행을 때려부수려 할 것이다.
때문에 8월 17일부터 총독부에서는
라디오방송을 통해 일본 사람들을 안심시키려 했다.
”예금은 언제든지 인출할 수 있으니 안심들 하세요.
지금 큰 돈을 인출했다가 공연히 도난 사선에 휘말리지 마시고..”
하지만 하루 빨리 재산을 찾아서 일본으로 귀환하고자 하는 일본인들에게는 효과가 없었다.
강탈을 당해도 신고할 수 없었다
은행에서 인출을 하고 돌아오다가 돈을 강탈당했다는 소식이 자주 들려왔다.
하지만 그런 일본인들은 어차피 경찰에 신고해봐야 소용없다며 분을 삭일 따름이었다.
-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교수 다나카 마사시
思いがけない 恐怖 : 朝鮮人たちがかくも多かったか?
当時日本人たちが感じた 恐怖心は
普段朝鮮と ゾソンインドルエデした
総体的な無関心で 始まった.
実は朝鮮に住んだ 日本人たちは
朝鮮人の存在をほとんど意識しないで 暮した.
こんな傾向は殖民支配 初期に
朝鮮人の抵抗を 経験した 1世代と ダリ
文化統治時期(1920年代)に移住して来たとか
朝鮮で生まれた 2才の 場合に もっと 強く現われた.
これらは朝鮮を他地で 認識するよりは
日本本土の一部だと思って あった.
-ホズミ 新路区で
日本人 村 : 彼らばかりの分離した空間
大部分の日本人が敗戦直後に 現われた
朝鮮人の集団行動を理解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ところには 彼ほどの理由が あった.
日本人たちは集団を成して朝鮮人とは 違う 彼らばかりの空間で別に 暮して
朝鮮人たちを都市の 外れに 暮した だからだ.
そうにさせられた 日本隣村が 全域に散在して あった.
当時一日本 小学生(小学校 学生)は言う
一度も朝鮮人 友達と
遊んで見た記憶が ない.
私が憶える 朝鮮人は
時たま頭にたけ篭をで 通って
品物を売ったおばさんが 全部だった.
原産にそのように多い朝鮮人が住んで あったという事実は
敗戦になった後こそ分かるように なった.
-原産府立小学校 2年生マスナが アクオ
警察署に勤めた青年は こんなに問った.
敗戦したと 必ずないし(日本)に帰ると しますか?と問ったら,
彼のご両親たちは何らの説明も なく
ただ帰らなければならないとばかり 答えた.
彼はどうして自分が自分の 故郷である
忠清道強硬地を発つと するのか 理解するの できなかった.
彼は敗戦直後 朝鮮人たちが なぜ 通りを溢れ始まり
万歳を 叫ぶかも理解できなかった.
-Nakamura気味(当時 23歳) 忠南 強硬警察署勤務
お金を 引き出そうとする日本人たち
このごろは 夜が 深くては やっと 家に帰って来ることができた.
郵便預金を引き出そうと人々が寄り集まった 望むに 出金業務が急に増えた だからだ.
-Inoueスミコ忠武路京城郵便局 勤務
銀行にはお金を引き出そうとする人々で あふれた.
8月 15日にだけ銀行が 保有した 支給引き当て金の 20%が 抜けたが
こんな速度でお金が 抜けたら すなわち銀行は破産が出て言葉 のだ.
もしそうに なれば,
預金したお金が一瞬に消えるように なって
幾多の預金者たちは 頭に来て銀行を叩き壊そうと割 のだ.
のため 8月 17日から 総督府では
ラジオ放送を通じて日本の人々を 安心させようと思った.
預金はいつでも 引き出すことができるから安心たち してください.
今大きいお金を 引き出してから 無性に盗難斜線に巻き込まれるの 飲んで..
しかし一日早く財産を 捜して 日本で 帰還しようとする日本人たちには效果がなかった.
強奪を あっても届け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銀行で引き出しをして 帰って来てから お金を強奪されたという消息が自主 聞こえた.
しかしそんな 日本人たちは どっちみち 警察に届けて見ると要らないと 分を 朔日だけだった.
- 京城帝国大学医学部教授田中 Masash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