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가을 : 점차 안정을 찾는 사회
8월말부터 푸줏간에는
오랫동안 구경하기 힘들었던 고기가 내걸렸고
술집에는 각종 술이 넘쳐났다.
다시 문을 연 카페에서는
전쟁의 선전가요가 아닌 대중가요가 흘러나왔다.
사람들의 차림새도
칙칙한 국민복을 벗어던지고 여성들도 볼썽사나운 몸빼바지 대신
치마를 걸치기 시작하여 거리의 풍경도 한층 밝아졌다.
거리 뒤편의 상점들에서는
”배척하자 일본인”이라고 적힌 전단을 떡 하니 붙여놓고
한국인들은 돈벌이를 위해
일본인에게 물건을 팔기는 했지만 가는 곳마다 왜노(倭奴)추방이라고 써 붙인
자극적인 전단지가 계속해서 눈에 거슬렸다.
-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교수 다나카 마사시
1945년 겨울 : 사라진 일본어
11월에 들어서는 어느새 일본식 동네 이름들이 모두 조선식으로 바뀌어
길 찾기도 어려워졌다.
관청에서는 각종 서류에 ”쇼와”, “메이지” 같은 연호를 기재하면
아예 접수조차 받아주지 않았다.
그저 이름만 바뀌었을 뿐인데 경성은 어느새 낯선 공간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라디오 방송도 10월 말부터 과도적으로 한일 양국어를 사용하다가
얼마 후 뉴스를 제외하고 모두 조선어로 단일화했다.
12월에 들어서는 그런 뉴스마저
하루에 단 1회로 줄어들었다.
경성에서는 이제 제국의 언어(일본어)가 발붙일 곳은 전혀 없었다.
-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교수 다나카 마사시
하지만 북한과 비교하면 그래도 양호했다.
북한에서는 8월 29일부터
라디오에서도 전면 일본어가 배제되었다.
때문에 갑작스런 정보의 차단으로
당시 일본들은 몹시도 불안해 했었다.
1945년 9월 5일 : 조선에 남고싶은 일본인들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인들의 만세 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했고
일본인들도 점점 무뎌져갔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귀환열차가 출발한다는 헛소문이 돌아
멀쩡한 가구를 헐값에 내다 팔며 부산을 떨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불편해서 못 살겠다며 다시 세간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또 어느 정도 치안이 확보되는 낌새가 보이자 어떻게든 조선에 눌러 앉아보려는 사람도 생겼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지금 일본의 주요 도시들은
대공습으로 초토화되었고, 그나마 멀쩡한 도시도
피난민들이 몰려들면서 몸살을 앓고 있기 때문에
돌아간다고 한들, 비전이 없을 곳이라고 말했다.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은
조선에 어떻게든 남아있으려고 했다.
-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교수 다나카 마사시
1945년 9월 12일 경성 : 때 아닌 조선어 강습 열기
경성 YMCA 청년회관 로비에는
어린 학생에서 백발이 성한 노인들까지 삼삼오오 모여들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들은 조선어를 배우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다.
당시 강단에 선 일본인 강사는 이런 말로 강의를 시작했다.
”조국의 패전과 조선의 독립으로 발생한 현 상황은 비록 마음이 아프지만..
그렇다고 명연자실하여 넋놓고 있기보다는
차라리 조선어를 배워 새로운 조선에 우리도 협력합시다.”
이렇게 수강생들을 격려했다.
당시 조선어 강좌는
1945년 9월 12일부터 3개월 과정으로 일주에 3회, 90분씩 진행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수강생을 모집하자마자 희망자가 정원을 넘어서는 바람에
1주일도 채 되지 않아 학급을 증설해야 할 정도였다.
미군에 대한 불안 : 일본인 위안부를 모집하자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처음 2~3일 동안 매일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한국인들이 독립만세를 외쳐대는 통에
일본인들은 두려워서 집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다.
게다가 북한에는 이미 소련군이 진주해 있었고
인천에도 곧 미군이 상륙한다는 소문이 돌자
일본인들은 점령군이 자신들을 어떻게 대할지 몰라 몹시도 불안해 했다.
심지어 일본인들은 자체 회의를 열어
일본인 여자들 중에서 미군을 상대하는 전문 위안부를 모집하여
따로 유곽을 열면 어떻겠냐는 주장도 있었다.
차라리 성매매를 공개적으로 하는 것이
만일에 있을지도 모를 부녀자에 대한 성폭력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되지 않겠냐는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걱정하던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1945年 秋 : 徐徐に安定を捜す社会
8月末から 肉屋には
長い間見物しにくかった肉が 掲げられたし
居酒屋には各種お酒が あふれた.
また門を開いた カフェーでは
戦争の宣伝歌謡が ない 大衆歌謡が 流れ出た.
人々の風体も
悪どい国民服を 脱ぎ捨てて 女性たちも格好社ナウンモムペバだ 代わり
スカートを着ける 始めて 距離(通り)の 風景もいっそう明るくなった.
距離(通り)裏手の 商店たちでは
排斥すると日本人だと書かれた 全段を 餠 したら付けておいて
朝鮮人たちはお金儲けを のために
日本人に品物を売ることは したが 行く所ごとにウェノ−(倭奴)追放だと書いて 付けた
刺激的な 散らしが 続いて 目障りだった.
- 京城帝国大学医学部教授田中 Masashi
1945年 冬 : 消えた日本語
11月に立ち入る いつのまにか 日本式町内名前たちが皆朝鮮式で 変わって
道捜したり 難しくなった.
官庁では各種 書類に ¥"昭和¥", ¥"明治¥" 同じ年号を 記載すれば
初めから受付さえ受けてくれるの なかった.
ただ名前だけ変わった だけなのに 京城はいつのまにか見知らぬ 空間で 弁解 捨てたのだ.
ラジオ放送も 10月 言葉から 過渡的に韓日両国語を 使ってから
数日後ニュースを 除いて 皆朝鮮語で 単一化した.
12月に立ち入るそんな ニュースさえ
一日にただ 1回路 減った.
京城ではもう帝国の 言語(日本語)が 取り付く所は全然 なかった.
- 京城帝国大学医学部教授田中 Masashi
しかし北朝鮮と比べるとそれでも 良好だった.
北朝鮮では 8月 29日から
ラジオでも全面日本語が 排除された.
のため急な 情報の 遮断で
当時 日本たちは大変不安に思った.
1945年 9月 5日 : 朝鮮に残りたい日本人たち
時間が経ちながら 朝鮮人たちの 万歳音がだんだん無くなり始めたし
日本人たちもますます 鈍くなって行った.
わずか数日前だけ しても 帰還列車が出発するというデマが 回って
無欠な家具を捨値に出す 売って 仰々しく振舞った 人々が
これからは不便でくぎ 暮すと また世間を仕こむ 始めた.
またどの位治安が確保される気配が 見えよう どうしても朝鮮に押して座って見ようとする人も 生じた.
気付き早い 人々は 今 日本の主要都市たちは
大空襲で 焦土化されたし, それさえも 無欠な都市も
避難民たちが 寄り集まりながら つかれ病いを 病んでいるから
帰ると しても, ビジョンが ない所だと言った.
のため時間がたつほど 人々は
朝鮮にどうしても残っていようと した.
- 京城帝国大学医学部教授田中 Masashi
1945年 9月 12日 京城 : 時 ない朝鮮語講習熱気
京城 YMCA 青年会館 ロビーには
幼い学生で白髪がソンハン 年寄りたちまで 三三五五 集まって来て 踏み所がなかった.
これらは朝鮮語を学ぶ のために 集まった人々だった.
当時講壇に立った日本人 講師は こんな言葉で講義を 始めた.
祖国の敗戦と朝鮮の独立で 発生した 現状況はたとえ 心が 痛いが..
そうだと 名演自失して ぼうっとして あるよりは
かえって朝鮮語を 学んで 新しい朝鮮に私たちも 協力しましょう.
こんなに受講生を 励ました.
当時朝鮮語 講座は
1945年 9月 12日から 3ヶ月 過程で 一周に 3回, 90分ずつ進行される 予定だった.
ところで受講生を 募集するやいなや 希望者が庭園を超える 望むに
1週間もまだできるの なくて クラスを増設しなければ割 位だった.
米軍に 大韓不安 : 日本人慰安婦を募集しよう
敗戦消息が 伝わると,初め 2‾3日間 毎日 昼と夜を選り分けないで
朝鮮人たちが独立万歳を叫びたてる 筒に
日本人たちは恐ろしくて 家 外に出ることもできなかった.
それに北朝鮮には もうソ連軍が進駐して あったし
仁川にも すなわち 米軍が 上陸するといううわさが流れよう
日本人たちは 占領軍が 自分たちを どんなに対するかも知れなくて大変不安に思った.
甚だしくは日本人たちは自体会議を 開いて
日本人女達 中で 米軍を 相対する専門慰安呼ぶ 募集して
別に 遊郭を開けば どうかと言う 主張も あった.
かえって性売買を公開的にする のが
万が一にあるかも 分からない 婦女子に 大韓性暴行を
未然に 防止することができる 良い 方法が になるの アンゲッニャヌンゲ彼らの考えだった.
しかし幸いにも 心配した事態は起きるの なかっ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