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일본 시코쿠 나카무라市의 근교 大方町에 높이 50cm 사방 20cm의 소형 묘비가
공사 중에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정면에는( 조선國女의 墓)라고 음각되어 있고 좌우에는 卒年不知 天正年中來 라고
음각되어 있었다고 한다
즉 조선 여인의 무덤으로 사망연대는 알 수 없고 天正年에 왔다는 것이다
이 묘비의 주인공이 한국인 여인으로 직녀였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나카무라市 거주
오카무라氏인데 高知 신문에 (조선 여성의 표석 )이라는 글을 투고했고
신문에 보도된 후
小谷家에서 朝鮮國女의 묘비를 자신의 집안에서 세웠다고 밝혀
(朝鮮國女의 墓 조사단)이 결성되었다고 한다
小谷家에서 전해오는 기록을 토대로 高知대학 關田英里 교수를 중심으로 하는 조사단이 밝힌
결론에 따르면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土佐의 번주 長曾我部元親을 수행했던 小谷十女郞이 일본으로 귀국하면서
조선의 베짜는 모습을 보고 직조 기술 도입을 위해 여성 기술자를 잡았다는 것
朝鮮國女의 墓
붙잡힌 조선 여성 중에 1명은 조선에서 도망을 갔고 1명은 배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했고
1명은 일본으로 와서 무덤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것이다
묘비는 원래 그녀를 이 곳으로 데리고 왔던 小谷의 4대손 小谷安次에 의해 세워졌는데
메이지 유신 당시 정한론으로 잊혀진 것으로 확인이 되었다
묘비 옆에 烏石에는
조선의 앞선 기직 기술을 이 지방에 퍼뜨린 그녀는 아름답고 친절하여 현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었다 라고 음각되어 있다
烏石은 1981년 시코쿠 大方町 주민들이 60만엔을 모금하여
朝鮮國女 墓를 지키는 會라는 이름으로 세운 것이다
이 조선 여인의 직조 기술은 大方町 뿐 아니라 시코쿠 일대에 널리 퍼져 中村 高岡 平田에서도
기술을 배우기 위해 찾아왔고
그녀가 짠 옷감은 上川口織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한편 묘비의 (天正年中來)와 관련해 의문은
天正年은 1571년에서 91년이므로 임진왜란 이전이다
이것은 옆에 세워진 烏石의 설명 조선女는 文祿慶長의 役 임진왜란과 기록이 맞지 않는다
(동아일보 취재 임진왜란 400년) 조사단은 小谷의 후손이 묘비를 세우며 임진왜란 당시에 여인을
잡아 왔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어 왜곡한 것으로 추측했다
1972年日本四国Nakamura市の近郊 大方町に高さ 50cm 四方 20cmの小型墓碑が
工事の中に発見された
発見当時正面には( 朝鮮国女の 墓)と陰刻されていて左右には 卒年不知 天正年中来 だと
陰刻されていたと言う
すなわち朝鮮女人の墓で死亡連帯はわからなくて 天正年に来たということだ
が墓碑の主人公が朝鮮人女人で織女だったということを見つけた人はNakamura市 居住
呉Kamura氏なのに 高知 新聞に (朝鮮女性の漂石 )という文を投稿したし
新聞に報道された後
小谷家で 朝鮮国女の墓碑を自分の家で建てたと 明らかにして
(朝鮮国女の 墓 調査団)が結成されたと言う
小谷家から伝えて来る記録を土台で 高知大学 関田英里 教授を中心にする調査団が明らかにした
結論によれば
壬辰の乱に参戦した 土佐のボンズ 長曽我部元親を遂行した 小谷十女郎が日本で帰国しながら
朝鮮の機を織る姿を見て織造技術導入のために女性技術者を取ったということ
朝鮮国女の 墓
つかまった朝鮮女性の中に 1人は朝鮮で逃げたし 1人はお腹から飛びおりて自殺をしたし
1人は日本に来て墓の主人公になったということだ
墓碑は元々彼女をこちらに連れて来た 小谷の 4代孫 小谷安次によって立てられたが
明治維新当時鼎韓論で忘れたことで確認になった
墓碑横に 烏石には
朝鮮の先に進んだ機織技術をこの地方にまき散らした彼女は美しくて親切で現地人々に
愛されていただと陰刻されている
烏石は 1981年四国 大方町 住民たちが 60万円を募金して
朝鮮国女 墓を守る 会という名前で立てたことだ
が朝鮮女人の織造技術は 大方町 のみならず四国一帯に広く広がって 中村 高岡 平田でも
技術を学ぶために尋ねて来たし
彼女の巡らした布は 上川口織という名前で有名だったと紹介している
一方墓碑の (天正年中来)と係わって疑問は
天正年は 1571年から 91年なので壬辰の乱以前だ
これは 横に立てられた 烏石の説明 朝鮮女は 文禄慶長の 役 壬辰の乱と記録が当たらない
(東亜日報取材 壬辰の乱400年) 調査団は 小谷の子孫が墓碑を建てて壬辰の乱当時に女人を
取って来たという事実を隠したくて歪曲したことで推測し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