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江戸時代 - 農奴制下での農家 1

에도시대의 쌀생산량을 보면
http://blog.naver.com/marich77/40200001447

1700 년의 농지 면적은 282만 헥타아르 60%가 논이라고 한다면 논의 면적은 169.2만ha 인구는 28,287,200명, 인구 1인당 경지면적은 0.598反, 에도시대 단위 면적당 쌀생산량 190kg/反을 고려하면 0.758石/人
세금 50%를 공제하면 0.379石/人

江戸時代の米生産量を見れば
1700年の農地面積は 282万ha 60%が田だと言ったら水田の面積は 169.2万ha 人口は 28,287,200人, 人口 1人当り農地面積は 0.598反, 江戸時代単位面積当たり米生産量 190kg/反を考慮すれば 0.758石/人
税金 50%を控除すれば 0.379石/人

에도시대의 농가에 대하여 어떤 일본인은 메이지시대에 지어진 농가, 지금은 方文化博物館으로 사용되는 건평 1200평에 이르는 대규모 저택을 소개하고 있었다.

/jp/exchange/photo/read.php?uid=8623&fid=8623&thread=1000000&idx=1&page=3&tname=exc_board_14&number=5239

 

에도시대의 농민의 경제력은 0.379石/人
이것으로 어떤 주택을 지어 살 수 있었을까?

江戸時代の農家に対して日本人は明治時代に建てられた農家,今は 方文化博物館で使われる建坪 1200坪にのぼる大規模邸宅を紹介していた.
江戸時代の農民の経済力は 0.379石/人 これでどんな住宅を建てて暮すことができただろうか? 

 



우선 옛 사진을 살펴 보자.
まず昔の写真をよく見よう.

 

 

메이지시대 말경에서 쇼와30년 경의 사진이나 산간 벽지의 궁핍한 농가의 모습이라 생각할 수 있겠다.

에도시대의 농경을 검색어로 조사해 보았다.
明治時代末頃で昭和30年写真だが山間僻地の貧しい農家の姿と思うことができる.
江戸時代の農耕を検索語で調査して見た.

 

 

 

 

 

단순히 보면 평범한 시골 풍경입니다만 조금 주의 깊게 살펴 봅시다.
작은 초가에 농사일을 집안에서 하는 것이 보인다.

지표면과  동일한 초가의 내부 ,  문지방이라든지 마루라든지 지표면과 가옥의 경계를 나타내는 아무런 시설도 없다. 단순히 편평한 땅 위에 기둥을 세우고 벽을 만들어 초가 지붕을 얹었을 뿐이다.침실은 어디에 있을까? 잠은 어디에서 잤을까?
単純に見れば平凡な田舍風景ですが少し注意深くよく見ましょう.
絵を詳らかによく見れば小さな草家に農業仕事を家ですることが見える.
地表面と等しい草家の内部 , 敷居とか床とか地表面と家屋の境界を現わす何らの施設もない. 単純に偏平な地の上に柱を建てて壁を作って草家屋根を上げただけだ.寝室はどこにあるか? 眠りはどこで寝ただろうか?

 

江戸時代の食卓
 煮炊き用のカマドがつくられた作業空間の「土間」と、食事や寝起きをする生活空間の「板の間」でできた江戸時代後期(約200 年前)の農家を復元しています。
 このような「土間」と「板の間」を主な生活空間とする家は江戸時代の農家によく見られたもので、このような生活は昭和30 年代まで残っていたことがわかります。
에도시대의 식탁
 취사용의 카마드가 만들어진 작업 공간의 「토방」이라고, 식사나 자고 일어나기를 하는 생활 공간의 「마루방」에서 가능한 에도시대 후기( 약 200년전)의 농가를 복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토방」과「마루방」을 주된 생활 공간으로 하는 집은 에도시대의 농가에 잘 볼 수 있던 것으로, 이러한 생활은 쇼와 30년대까지 남아 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土間のある暮らし  
農家の土間は農作業や農耕用道具、また、かまどまで配置された食事を造り生活の空間でありました。特に夜なべ仕事とか雨の時の仕事は、昔の農家にはなくてはなりませんでした。そして、馬小屋なども土間についていました。
民家(農業を行わない町屋)の土間は台所としての利用が主で、農家の土間の広さとは比較にならない大きさでした。

本来、土間は出入り口としての役目があり、客人、隣人、住人でも皆土間からの出入りでした。江戸時代は玄関が許されているのは武家屋敷だけで、真南側に玄関がある事も特長でありました。玄関の出入口は、通常主人、客人以外は使わず、その他の者の出入り口は別に設けられていました。農家、民家には玄関はありませんでした。
明治以降階級制度が廃止され、西洋の文化などが持ち込まれ、徐々に生活様式が変わっていくと、農家も民家も住宅として位置づけされてきて、住宅に玄関を付けて、玄関から出入りしてもよくなりました。玄関は住宅の出入り口となり、かまどや台所に水を運び込む入り口として勝手口がついたあたりから、土間の風習が消えていきました。
現代では玄関、勝手口と別れ、昭和40年代の農家造りでも玄関、土間、勝手口を付けていました。土間の役目は隣人、客人の出入り口から応接の間に変わっていましたが、別棟に農作業用車の保管場所が作られるようになり土間は消えていきました。

昭和40年代建売住宅や、集合住宅がさかんとなってきて都市開発されてからは現在の狭い玄関となりました。
しかし、玄関の機能は家族の出入りであるので、履物を脱ぐ場で履物を保管するため、昔からの下駄箱が置いてあります。
出入り口からは外気が入ります。特に冬の外気が入るので暖房をとる空間ではありません。廊下と接続しているので寒いまたは暑い空間が続くのですが、エアコンが効かない為、快適空間にはなりません。そのため、どんどん玄関ホールが小さくなっていきました。結果、玄関は履物や、靴の収納ボックスがあふれ、ゴルフバックなどが置いてあり、手狭な空間となっているのです。
토방이 있는 생활
농가의 토방은 농사일이나 농경용 도구, 또, 부뚜막까지 배치된 식사를 만들어 생활의 공간이었습니다.특히 밤일 일이라든지 비올 때의 일은, 옛 농가에는 없으면 안되었습니다.그리고, 마굿간 등도 토방으로 있었습니다.
민가(농업을 실시하지 않는 町屋)의 토방은 부엌으로서의 이용이 주로, 농가의 토방의 넓이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크기였습니다.
본 래, 토방은 출입구로서의 역할이 있어, 손님, 이웃, 거주자라도 모두 토방으로부터의 출입이었습니다.에도시대는 현관이 용서되고 있는 것은 무사 주택에서만, 남쪽 측에 현관이 있는 일도 특징이었습니다.현관의 출입구는, 통상 주인, 손님 이외는 사용하지 않고, 그 외의 사람의 출입구는 따로 설치되고 있었습니다.농가, 민가에는 현관은 없었습니다.
메이지 이후 계급제도가 폐지되어 서양의 문화등이 반입되어 서서히 생활 양식이 변해가면, 농가나 민가도 주택으로서 평가해 되어 오고, 주택에 현관을 붙이고, 현관으로부터 출입해도 괜찮아졌습니다.현관은 주택의 출입구가 되어, 부뚜막이나 부엌에 물을 옮겨 들이는 입구로서 부엌문이 도착한 근처로부터, 토방의 풍습이 사라져서 갔습니다.
현대로는 현관, 부엌문과 헤어져 쇼와 40년대의 농가 구조에서도 현관, 토방, 부엌문을 붙이고 있었습니다.토방의 역할은 이웃, 손님의 출입구로부터 응접동안으로 변해있었습니다만, 별동에 농사일용차의 보관 장소가 만들어지게 되어 토방은 사라져서 갔습니다.

쇼와 40년대 집장수 주택이나, 집합주택이 미장이가 되어 와 도시 개발되고 나서는 현재의 좁은 현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관의 기능은 가족의 출입이므로, 신발을 벗는 장소에서 신발을 보관하기 위해(때문에), 옛부터의 나막신상자가 놓여져 있습니다.
출 입구에서는 바깥 공기가 들어갑니다.특히 겨울의 바깥 공기가 들어가므로 난방을 잡는 공간이 아닙니다.복도와 접속하고 있으므로 추운 또는 더운 공간이 계속 됩니다만, 에어콘이 효과가 없기 때문에, 쾌적 공간으로는 되지 않습니다.그 때문에, 자꾸자꾸 현관 홀이 작게 되어 갔습니다.결과, 현관은 신발이나, 구두의 수납 박스가 넘쳐 골프가방등이 놓여져 있어, 비좁은 공간이 되고 있습니다. 

 

横浜市戸塚区にある「舞岡ふるさと村」は農業育成と田園景観保全を目的にしたもので里山の散策が楽しめる。尾根と尾根の間には谷戸田が広がり、その一角に古民家が移築されている。江戸時代末期から明治初期の様式を伝える明治後期の建築だという。
 1950年代の中頃の神武景気をきっかけに経済の高度経済成長が始まり茅葺き屋根の家屋は田舎でも姿を消していった。横浜の郊外の茅葺き屋根の田舎家で育った私にはそれほどの古民家とは思えなかった。が懐かしいやら、よくもまあ、こんな所で生活していたものだ感心するやらで当時を思い出した。
 古民家の農家の特徴は玄関口を入ると広い土間がある事だ。土間には囲炉裏が切ってあり冬などは一日中火を絶やす事がなく、鉄瓶や鍋が掛かっていて湯が沸いていた。
 土間には、流し・竈(へっつい=カマド)・茶箪笥・食卓があるダイニングキッチンである。土間を抜けると井戸と風呂場があるのが普通だ。土間の機能はこれだけではない。 土間は屋内作業場でもあった。出荷野菜の箱詰め、筵や俵を編むワラ仕事、精米や粉挽きの作業、餅つき・味噌づくりなど季節作業もあった。記憶のひとつに日本茶を作ったり、菜種油を絞ったりの今では想像もつかない仕事もあった。土間は自給自足的な田舎の日常生活の中枢機能を果たしていたのだ。
 ふるさと村の古民家の土間はそんなありし日の暮らしを彷彿とさせた。カマドには薪が放り込まれ火炎が吹き上げていた。サツマイモを蒸かしているのだという。薪の弾けるたびに煙が上がり太古の匂いが漂う。煙は家中を流れて柱、天井、板の間を黒々と染めあげていく。
 農作業から上がって囲炉裏(炉:ろ)を囲んで食事をする風景は弥生時代からの風景である。2千年近くも続いたこの基本的な暮らしの有り様は僅か50年ですっかり消えてしまった。生活は豊かになり便利になり、その進歩度合いはますます速まり、留まることはない。それは、また多くの事柄を失う事でもあった。
요 코하마시 토츠카구에 있는 「무강고향마을」은 농업 육성과 전원 경관 보전을 목적으로 한 것으로 사토야마의 산책을 즐길 수 있다.능선과 능선의 사이에는 야토논이 퍼져, 그 일각에 고민가가 이축되고 있다.에도시대 말기부터 메이지 초기의 양식을 전하는 메이지 후기의 건축이라고 한다.
 1950년대의 중순의 진무천황이래 최대의 호경기를 계기로 경제의 고도 경제성장이 시작되어 모즙 나무 지붕의 가옥은 시골에서도 자취을 감추어 갔다.요코하마의 교외의 모즙 나무 지붕의 시골집에서 자란 나에게는 그만큼의 고민가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하지만 그리울지, 잘도 뭐, 이런 곳에서 생활하고 있던 것이다 감탄하는지로 당시를 생각해 냈다.
 고민가의 농가의 특징은 현관문을 들어가면 넓은 토방이 있는 일이다.토방에는 난로가 잘라 있어 겨울 등은 하루종일 화를 없애는 것이 없고, 쇠주전자나 냄비가 걸려 있고 뜨거운 물이 끓고 있었다.
  토방에는, 개수대・부뚜막(에 무심코=카마드)・찻장상・식탁이 있는 다이닝 키친이다.토방을 빠지면 우물과 목욕탕이 있는 것이 보통이다.토방의 기능은 이만큼은 아니다. 토방은 옥내 작업장이기도 했다.출하 야채의 상자포장, 연이나 섬을 짜는 짚 일, 정미나 분만 나무의 작업, 떡 다해・된장 만들기 등 계절 작업도 있었다.기억의 하나에 녹차를 만들거나 유채유를 짜거나의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도 있었다.토방은 자급 자족적인 시골의 일상생활의 중추 기능을 이루어 있었던 것이다.
 고향마을의 고민가의 토방은 그렇게 있어 날의 생활을 방불과 시켰다.카마드에는 신이 던져서 화염이 뿜어 올리고 있었다.고구마를 찌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신이 튈 때마다 연기가 올라 태고의 냄새가 감돈다.연기는 집안을 흘러 기둥, 천정, 마루방을 흑들과 물들여 간다.
 농사일로부터 올라 난로를 둘러싸고 식사를 하는 풍경은 야요이 시대로부터의 풍경이다.2 천년 가깝게도 계속 된 이 기본적인 생활의 상태는 불과 50년에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생활은 풍부해져 편리하게 되어, 그 진보 정도는 더욱 더 빨라져, 머물 것은 없다.그것은, 또 많은 일을 잃는 일이기도 했다.

여기까지 주의 깊게 읽어 보셨겠지만 무엇을 설명하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토방이라는 것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초가 내부의 공간으로 작업장으로 쓰였다는 것
다음 편에서 토방에 대해 보다 근접해서 살펴 봅시다.
ここまで注意深く読んで見たが何を説明することか明確ではないです.
土間というのに対して重点的に説明しているのに草家内部の空間で作業場で使われたということの編で


TOTAL: 8943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추천
4923
No Image
re:일본인 교육 - 산수 Marich 2013-12-05 2845 0
4922
No Image
에도시대 - 농노제하에서의 농가 2 Marich 2013-12-05 4099 0
4921
No Image
에도시대 - 농노제하에서의 농가 1 Marich 2013-12-04 4115 0
4920
No Image
조선시대 - 이불 Marich 2013-12-03 3256 0
4919
No Image
쿄토·니치렌종 사원 둘러싸고 2 栄養市民 2013-12-02 3765 0
4918
No Image
조선시대-의복 2 Marich 2013-12-02 4632 0
4917
No Image
광의의 조선을 통일한 왕조 sumatera 2013-12-01 2612 0
4916
No Image
조선 통신사 진실 kokoden9 2013-12-01 2875 0
4915
No Image
조선시대 직조 기술을 알 수 있는 ... namgaya33 2013-11-30 4757 0
4914
No Image
"원폭투하는 神의 선물" WildBoy6 2013-11-29 3215 0
4913
No Image
조선시대-의복 1 Marich 2013-11-29 4651 0
4912
No Image
쿄토·니치렌종 사원 둘러싸고 栄養市民 2013-11-29 3071 0
4911
No Image
조선시대-세금과 요네오 생산량 Marich 2013-11-27 4909 0
4910
No Image
조선시대-경기감영도 Marich 2013-11-26 3569 0
4909
No Image
조선시대 경직도 (耕織圖) (-1) namgaya33 2013-11-26 12342 0
4908
No Image
백제가 몰살한 20만 北魏軍 WildBoy6 2013-11-25 3226 0
4907
No Image
조선시대-저택 Marich 2013-11-25 3151 0
4906
No Image
조선은 유럽보다 先進社會다 roffkfk1 2013-11-25 3060 0
4905
No Image
오에산에 다녀 온 黒猫 2013-11-25 2994 0
4904
No Image
타케다 성터 성의 중심 건물 출입 금....... 黒猫 2013-11-21 381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