通傳 : 晉時,句麗旣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
梁書 : 晉世,句驪旣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
宋書卷97百濟國 : 百濟國,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其後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晉平郡晉平縣
백제국은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천여리에 있었다.
그 후 고구려가 요동 땅을 지배하자, 백제는 요서 지역을 차지했다.
백제가 다스리는 곳은 진평군(郡) 진평현(縣)이라 이름하였다.
남제서(南齊書) 동이전 백제국(百濟國)
南齊書卷58-列傳第39-百濟國-03/01
“공(功)에 대하여 보답하고 부지런히 일한 것을 위로하는 일은 실로 명성과 위엄을 보존시키는 일이다. 가행녕삭장군(假行寧朔將軍) 신(臣) 저근 등 4인은 충성과 힘을 다해 나라의 환란을 제거하였으니, 그 듯의 굳센과 과감함이 명장의 등급에 이를만하니 가히 나라의 간성이며, 사직의 튼튼한 울타리라 할만하다. 그들의 공(功)을 논하고 노고를 헤아리면 마땅히 겉으로 드러나는 지위가 있어야 한다. 지금 전례에 따라 갑자기 임시 직책을 주었다. 부디 바라건대 은혜를 베풀어 임시로 내린 관직을 정식으로 인정해 주기 바랍니다. 녕삭장군 명중왕 저근은 정치를 두루 잘하고 무공 또한 이에 못지 않으리 이제 가행관군장군 도장군 도한한이라고 하고, 건위장군 팔중후 여고는 젊은 나리에 임금을 도와 충성과 공로가 일찍이 드러났으므로, 이제 가행녕삭장군 아착왕이라 하고, 건위장군 여력은 천성이 충성되고 정성스러워 문무과 함께 두드러졌으므로, 이제 가행용양장군 매라왕이라 하고, 광무장군 여고는 정치에 충성을 다해 효력을 나타냈고, 국정을 빛나고 드날렸으므로, 이제 가행건위장군 불사후라 하였습니다.
南齊書卷58-列傳第39-百濟國-03/02
모대(東城王)이 또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신이 파견한 행건위장군 광양태수 겸 장사 신 고달, 행건위장군 조선태수 겸 사마 신 양무, 행의위장군 겸 삼군 신 회매 등 3인은 뜻과 행동이 맑고 깨끗하며, 충성과 정성이 일찍이 드러났으며, 지난 태시연간(465-471)에는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었고, 지금은 臣의 사신의 임무를 맡아 험한 파도를 무릅쓰고 바다를 건넜으니, 그 지극한 공로로 따지면 마땅히 벼슬이 올라야 마당하므로, 선례에 따라 각자 가행직을 주었습니다. 하물며 天子(東城王)의 은혜는 신령(神靈)하고 아름다워 만리 밖까지 미치는 법인데, 하물며 몸소 천자(天子)의 들을 밟으면서 은헤를 입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부디 바라건대 특별히 살피시어 정식으로 관작을 제수해 주십시오. 고달은 변경에서의 공적이 일찍이 드러났고 공무에 부지런 하였으므로 이제 가행용양장군 대방태수라 하고, 양무는 마음과 행동이 맑고 한결 같으며 공부를 항상 놓지 않았으므로, 이제 가행건위장군 광릉태수라 하고, 회매는 뜻이 세우면 두루 치밀하여 여러번 공무에 성과를 나타내었으르모, 이제 가행광무장군 청하태수라 하였습니다.”
라고 하니 이를 허락한다는 조서를 내림과 더불어 장군의 호를 주고, 태수의 관직을 제수하였다. (또 백제왕을) 시사절 도독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으로 삼고, 겸알자복사 손무를 사신으로 보내어 모대를 책명으로 망조부 모대를 계승한 백제왕으로 삼았다.
(또 조서를 내려서) 말하기를
“아아 그대들은 충성심과 부지런함을 대대로 이어 받아서, 그 정성이 먼 곳까지 드너라니, 바닷길이 고요하고 맑아져 공물이 조금도 바뀌지 않는구나. 떳떳한 전거에 따라 관직을 계승케 할 것이니 어찌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행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 모대에서 제소를 내리노니, 이제 모대로서 그의 조부 모두의 작위를 계승하게 하여 백제왕으로 삼겠소. 왕위에 오름에 도장과 끈을 등 다섯과 동으로 만든 호랑이 부적, 대나무 부적 넷을 주니 왕은 이를 공경하여 받으니 그 또한 경사롭지 아니한가.”
南齊書卷58-列傳第39-百濟國-03/03
이해에 북위(北魏) 오랑캐가 또 기병 수십만을 동원해 백제를 공격하여 그 영토에 들어가니, 모대가 장군 사법명(沙法名), 찬수류(解禮昆) , 해례곤(解禮昆), 목간나(木干那)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북위군(魏軍)을 기습 공격하여 크게 격파했다.
건무2년(495년)에 모대가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신(臣)은 봉작을 받은 이래 대대로 조정의 영예를 입었고, 더욱이 신부와 부월을 받아 모든 변방을 평정하였습니다. 앞서 저근 등이 모두 영광스러운 관작을 제수 받아 신(臣)과 무리들이 모두 기뻐했습니다. 지난 경오년(490년)에는 혐윤(祗敬)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숙이 쳐들어 왔습니다. 신(臣)이 사법명(沙法名) 등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역습케 하여 밤에 번개처럼 기습 공격하니, 匈犁(魏)가 당황하여 마치 바닷물이 들끓듯 붕괴되었습니다. 이 기회를 타서 쫓아가 베니 시체가 들을 붉게 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 예기가 꺾이어 고래처럼 사납던 것이 그 흉포함을 감추었습니다.
지금 천하가 조용해진 것은 실상 사법병 등의 꾀이니 그 공훈을 찾아 마땅히 표창해 주어야 합니다. 이제 사법명을 가행정로장군 매라왕(邁羅王)으로, 찬수류를 가행안국장군 벽중왕으로, 해례곤을 가행무위장군 불중후로 삼고, 목간나는 과거에 군공이 있는데다 또 성문과 선박을 때려 부수었으므로 행광위장군 면중후로 삼았습니다. 부디 바라옵건대 천은을 베푸시어 특별히 관작을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또 표문을 올리기를
“신(臣)이 사신으로 보낸 행용양잔군 낙랑태수 겸 장사 신 모견과 행건무장군 성양태수 겸 사마 신 왕무와 겸 삼군 행진위장군 조선태수 신 장새와 행양무장군 진명은 관직에 있어 사사로운 것을 잊어버리고 오로지 공무에만 힘써, 나라가 위태로운 것을 보면 목숨을 내던지고 어려운 일을 당해서는 자기 몸을 살피지 않았습니다. 지금 신의 사신의 임무를 맡아 험한 파도를 무릅쓰고 바다를 건너 그의 지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실로 관직을 올려 주어야 마땅하므로 각각 가행직에 임명하였습니다. 부디 바라옵건대 성조에서는 특별히 정식으로 관직을 제수하여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이에 조서를 내려 허락함과 아울러 장군의 호를 내려 주었다.
이후 15줄의 기록의 누락은 의도적인 누락으로 것으로 보인다.
세계 각국의 사람과 동물이 나오는 백제 금동대향로
열등토인 왜인들은 모르는 백제와의 관계
우에다 마사키 (교토대 명예교수)
한국의 “큰 나라(大國)”가 쿠다라(kudara)가 되었다는게 이미 정설이다.
즉 일본은 백제를 쿠다라(kudara) 즉 ”큰 나라(大國)”라고 우러러보고 있었다.
당시 토인이 거주하던 열도(倭國)는 백제의 속국중 하나였다
요약
<남제서> 南齊書
이 해에 위(魏) 오랑캐가 또 수십 만 기병을 일으켜 백제 땅 안으로 쳐들어갔다. 모대(牟大)가 장군 사법명(沙法名), 찬수류(贊首流), 해례곤(解禮昆), 목간나(木干那)에게 군대를 이끌고 오랑캐(魏) 군대를 치게 하여 크게 무찔렀다.
그러나 그 이후 일어난 다음장의 기록은 지워진채 공개되지 않고 있다.
通伝 : 晉時,句麗既略有遼東,百済亦拠有遼西晋平二郡
梁書 : 晉世,句驪既略有遼東,百済亦拠有遼西晉平二郡地
宋書巻97百済国 : 百済国,本与高驪倶在遼東之東千余里,其後高驪略有遼東, 百済略有遼西.
百済所治, 謂之晉平郡晉平県
百済国は本来高句麗と一緒に搖れの東千余里にあった.
その後高句麗が搖れ地を支配すると, 百済は夭逝地域を占めた.
百済の治める所はジンピョンググン(郡) ジンピョングヒョン(県)と呼んだ.
濫製で(南斉書) 東夷伝百済国(百済国)
南斉書巻58-列伝第39-百済国-03/01
“球(功)に対して報いて手まめに働いたことを慰める事は実に名声と威厳を保存させる仕事だ. がヘングニョングサックザンググン(仮行寧朔将軍) 神さま(臣) ゾグンなど 4人は忠誠と力をつくして国の為替危機をとり除いたから, そのようのグッセンと果敢さが名将の等級に至るに値したら優に国の干城であり, 辞職の丈夫な垣根だと言うに値する. 彼らの功(功)を論じて苦労を推し量れば適切に表で現われる地位がなければならない. 今前例によって急に臨時職責を与えた. なにとも願わくば恩恵を施して臨時に下った官職を正式と認めてください. ニョングサックザンググン命中王ゾグンは政治があまねくお上手で武功もここに劣らなかろうもう稼行官軍将軍道場君ドハンハンだと言って, 健胃将軍腕重厚女子高は若いゆりに賃金を手伝って忠誠と功労がかつて現われたので, もうがヘングニョングサックザンググンアチァックワングと言って, 健胃将軍余力は天性が忠誠されて念入りで文武科共に著しかったので, もう稼行用洋装君メラワングと言って, 光武将軍女子高は政治に忠誠をつくして效力を現わしたし, 国政を輝いて取り上げて飛ばしたので, もう稼行健胃将軍仏事の後だと言いました.
南斉書巻58-列伝第39-百済国-03/02
帽帯(東城王)がまた表文をあげて言うのを
“神さまが派遣した行巾偽装君光陽太守兼商売神さまゴダル, 行巾偽装君朝鮮太守かたがた司馬 神さま洋務, 行義偽装君かたがた三軍 神さまフェメなど 3人は意味と行動が清くてきれいであり, 忠誠と真心がかつて現われたし, 去る太始年間(465-471)には宋の国に使臣に行ったし, 今は 臣の使臣の任務を引き受けて険しい波を冒して海を渡ったから, その至極な功労で計算すれば適切に官職が上がると庭先するので, 先例によって各各稼行職を与えました. 荷物であり 天子(東城王)の恩恵は神霊(神霊)と美しくて万里の外まで及ぶ法なのに, まして自ら天子(天子)の聞く踏みながらウンヘを着ないこともありますか. なにとも願わくば特別に察して正式で官爵を除数してください. ゴダルは変更での功績がかつて現われたし公務に真面目したのでもう稼行用洋装君大房太守だと言って, 洋務は心と行動が清くて一様で勉強をいつもおかなかったので, もう稼行健胃将軍光陵太守だと言って, フェメは意味が立てればあまねく緻密で何回公務に成果をナタネオッウルモ, もう稼行光武将軍庁下太守だと言いました.
と言ったらこれを承諾するという調書を下げることといっしょに将軍の号を酒庫, 太守の官職を第荷受だった. (また百済王を) 時謝絶渡独百済諸君社震動大将軍で三考, ギョムアルザボックサソンムを使臣に送って帽帯を冊名で亡兆部帽帯を受け継いだ百済王にした.
(また調書を下げて) 言うのを
“ああ君たちは忠誠心と手まめさを代代に受け継いで, その真心が遠い所までドノだなんて, 海岸道路が静かで清らかになって供え物が少しも変わらアンヌングや. 正当な典拠によって官職を受け継ぐようにするはずだからどうして愼重にしないこともあるか? ヘングドドック百済諸君社震動大将軍百済王帽帯で提訴をネリノ−だから, もう帽帯として彼の祖父皆の作為を受け継ぐようにして百済王にしなさい. 王位に上がるに道場と紐をなど五つと東で作った虎符籍, 竹符籍四つを与えたら王はこれを敬って受けたらそのまたギョングサロブジないか.”
南斉書巻58-列伝第39-百済国-03/03
理解に 北魏(北魏) 蛮夷がまた騎兵数十万を動員して百済を攻撃してその領土に入ったら, 帽帯が将軍司法人(沙法名), 纂修類(解礼昆) , ヘリェゴン(解礼昆), モックガンナ(木干那)に軍隊を従えて北緯だね(魏軍)を不意打ち攻撃して大きく撃破した.
ゴンム2年(495年)に帽帯が使臣を送って表文をあげて言うのを
“神さま(臣)は封爵を受けた以来代代に調整の栄誉を着たし, なおかつ花嫁と斧域を受けて すべての辺方を平定しました. 先立ってゾグンなどが皆栄え栄えしい官爵を除数受けて神さま(臣)と輩らが皆喜びました. 去る庚午年(490年)にはヒョムユン(祇敬)が過ちを悔やまないで軍事を起こして深深と 攻め寄せました. 神さま(臣)が司法人(沙法名) などを派遣して軍事を従えて逆襲するようにして夜に稲妻のように不意打ち攻撃したら, 匈犁(魏)が荒ててまるで海水が沸き立つように崩壊されました. が機会に乗って追い掛けて麻布だから死骸が聞く赤くしました. これによってその予期が折れて鯨のように荒しかったことが彼凶暴さを隠しました.
今天下が 静かになったことは実際司法病などの謀だからその手柄を捜して当然に賞してくれなければなりません. もう司法人を稼行正路将軍メラワング(邁羅王)で, 纂修類を稼行安国将軍ビョックズングワングで, ヘリェゴンを稼行無為将軍不重厚で三考, モックガンナは過去に軍功があるうえまた成文と船舶を叩き壊したのでヘンググァンウィザンググンミョンズングフにしました. なにとも望むが天恩を施して特別に官爵をください. と言った.
また表文をあげるのを
“神さま(臣)が使臣に送ったヘングヨングヤングザングンナクラン太守兼商売神さまモギョンと行巾武将君成様太守かたがた司馬神さまワングムとかたがた三軍行進偽装君朝鮮太守神さま張の間とヘングヤングムザンググン所命は官職において私的なことを忘れてひたすら公務にだけ力をつくして, 国が危なげなことを見れば命をほうり出して難しい事にあっては自分の身を 察しなかったです. 今神さまの使臣の任務を引き受けて険しい波を冒して海を渡って彼の知性をつくしています. 実に官職をあげてくれるべきなのでそれぞれ稼行職に任命しました. なにとも望むが声調では特別に正式で官職を除数してください”
と言った.
ここに調書を下げて承諾することと同時に将軍の号を下げてくれた.
以後 15列の 記録の 抜け落ちは 意図的な抜け落ちで ことと見える.
世界各国の人と動物が出る 百済金銅対向路
劣等土人 倭人たちは分からない百済との関係
UedaMasaki (京都台名誉教授)
韓国の ¥"大きい国(大国)¥"がクダだと(kudara)になったと言うのがもう定説だ.
すなわち 日本は 百済をクダだと(kudara) すなわち ¥"大きい国(大国)¥"と仰いで見ていた.
当時土人が居住した列島(倭国)は百済の属国中一つだった
要約
<濫製で> 南斉書
が日に 上(魏) 蛮夷がまた数十万騎兵を起こして百済地の中に攻めこんだ. 帽帯(牟大)が将軍司法人(沙法名), 纂修類(賛首流), ヘリェゴン(解礼昆), モックガンナ(木干那)に軍隊を導いて蛮夷(魏) 軍隊を打つようにして大きく打ち破った.
しかし その後起きた 次場の記録は 消されたまま公開されていな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