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파일:낙중낙외도

국보 「우에스기책·낙중낙외도 병풍」

 

 무로마치 시대, 자치구민, 상공업자를 중심으로 지지를 펼친 쿄토의 니치렌종.덧붙여서, 무로마치 시대의 쿄토는 낙중으로 도성 밖으로 나누어져 있어 도라고 말하면 주로 낙중을 가리켰다.낙중의 범위는, 북쪽은 안마구 대로, 남쪽은 토우지 부근, 동쪽은 쿄고쿠 부근, 서쪽은 천개 부근에서, 대개 동서 3 km, 남북 7 km정도.또, 2조대로를 경계로 하고, 북쪽이 상경, 남쪽이 시모교로 불리고 있었다.상경은 문신이나 무가의 집이 많아, 시모교는 상공업자가 대부분 살고 있던 것 같다.

 그 시모교에 묘현사가 처음으로 건립된 것은 1334년이지만, 그 앞으로 170년간으로, 시모교만으로 17의 니치렌종 사원이 건립되었다.이것은 당시로서는 비정상인 것이다.이렇게 말하는 것도, 당시의 낙중은 쇼코쿠사나 토우지 등, 부츠쿄지원은 셀수있는 정도 밖에 없었으니까이다.도중 , 오닌의 란이 발발했지만, 니치렌종 사원은 재빨리 부흥을 이루어 오닌의 란 후는 한층 더 세력을 확대한다.16 세기 초두에는 「낙중 법화 21절」이라고 불린 것처럼, 많은 니치렌종 사원이 번영했다.

 

 이 시기의 니치렌종은, 신도가 무기를 손에 가져, 조금도 종사원을 구워 토벌해로 하는 등 기세가 대단했다.단지, 히에이잔연력사와의 대립이 격화해, 연력사의 중도와 육각씨의 군세에 의해서, 낙중의 21절은 다 태워 버린다(1536년,텐분복케의 란).특히 시모교는 전소해, 니치렌종 사원은 방대한 피해를 입었다.란 후는 15절에 감소하고 있다.

 

파일:정묘사2948.JPG

니치렌종 모토야마의 하나 「정묘사」.회합의 자료가 남아 있던 사원.

 

 법화의 란 이후, 니치렌종 사원은 그 15절에서 「회합」을 성립시킨다.이것은, 금전이나 서류의 관리·기록, 사례금·예물의 제공등을 제절에서 공동으로 실시한다고 하는 것이었다.정세 불안정한 전국시대의 쿄토를 살아 남기 위해서 결성되었을 것이다가, 그 성격은 온건하고, 무력에 의지하지 않고, 예물이나 사례금의 제공으로 제세력에 대처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법화의 란이전의 공격적인 성격과는 대조적이지만, 법화의 란의 반성도 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단결력을 높인 니치렌종 사원은, 다시 번영의 길을 걸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오다 노부나가

 

 그런데, 1568년에 오다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동반해 상경했을 때,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니치렌종 사원인 본국절과 혼노지를 숙소로 하고 있다.노부나가 자신도, 쿄토의 숙소는 역시 혼노지와 묘카즈지라고 하는 니치렌종 사원이었다.그 이유는 잘은 모르는 것 같지만, 낙중에서 일정한 넓이를 가진 장소가, 니치렌종 사원 이외에 없었기 때문에일까.본국절이나 혼노지는, 주위에 굴을 둘러싸게 하고 있었다고 하기 때문에, 방어적인 관점으로부터도 적당한 장소였던 것일 것이다.

 단지, 「언계경기」라고 하는 일기에 의하면, 오다 노부나가는 젊은 무렵, 묘카즈지에 체재하고 있던 것 같다.노부나가가 가장 길게 체재한 것은 묘카즈지이므로, 친숙한 장소였는지도 모른다.

 

 

정엄죠우루리의 책당, 1577년 이축, 중요문화재.아즈치 종론의 무대가 되었다.

 

 이 시대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은, 1579년에 노부나가의 거성·아즈치성의 성시에 있는 「정엄원」에 있고, 니치렌종과 정토종의 종론을 한 것일까(아즈치 종론).자세한 것은 쓰지 않지만, 니치렌종측이 패배해, 많은 피해를 입었다.아즈치 종론은 니치렌종의 신도가 정토종의 승려에 논의걸쳐서 시작되었으므로, 노부나가는 절복이라고 하는 니치렌종의 포교 스타일을 문제시해, 향후 실시하지 않게 명했다.또, 이것를 구실로, 노부나가는 회합에 금화 200매를 요구하고 있다.

 단지, 노부나가와 니치렌종의 관계는 결코 나쁘지 않고, 연력사나 혼간지에 무력을 행사한 것과는 많이 다르다.또, 노부나가는 다과회등의 문화적 행사도 혼노지나 묘카쿠지에서 실시하고 있어 쿄토의 니치렌종 사원은, 이 어려운 시대를 능숙하게 극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상가에 접하고 문을 짓는 「혼노지」.법화종 본문류의 대본산.

 

 

혼노지의 내부

 

 쿄토의 니치렌종 사원 중(안)에서, 가장 참배객이나 관광객이 대부분, 활기차 있다.무엇보다, 대부분의 사람은, 니치렌종이라고 하는 것보다 「혼노지의 변」이라고 하는 역사상의 사건에 흥미를 가지고 여기를 방문하지만.덧붙여서, 현재의 부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어, 혼노지의 변이 있던 것은 여기에서는 없다.

 지금 다이호전으로 많은 문화재를 공개중.

 

 

혼노지 본당, 1928년 재건

 

본당은 쿄토를 대표하는 근대 목조 건축의 하나이다.드물게 서면 해 세워진다.정면 7간, 측면 7간.

 

 

 

 본당의 Gejin는 불어 방 해가 아니고, 건물내부에 수중에 넣고 있다.미닫이와 통풍공간에 유리를 끼워넣는 근처는 근대풍으로, 그 영향인가, 실내가 꽤 밝다(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가는 모르지만).본당에 누구라도 오를 수 있는 것도, 쿄토의 모토야마에서는 여기 뿐이다.

 

파일:OdaNobunaga mausoleum.jpg

혼노지에 있는 「노부나가공묘」.노부나가 소지의 칼을 납입할 수 있고 있다.

 

 

계속된다

 

 

 


京都・日蓮宗寺院巡り2

ファイル:洛中洛外図右.jpg

国宝「上杉本・洛中洛外図屏風」

 

 室町時代、町衆、商工業者を中心に支持を広げた京都の日蓮宗。因みに、室町時代の京都は洛中と洛外に分かれており、都と言えば主に洛中を指した。洛中の範囲は、北は鞍馬口通り、南は東寺付近、東は京極付近、西は千本付近で、大体東西3km、南北7km程度。また、二条大路を境にして、北が上京、南が下京と呼ばれていた。上京は公家や武家の家が多く、下京は商工業者が多く住んでいたようだ。

 その下京に妙顕寺が初めて建立されたのは1334年だが、その後170年間で、下京だけで17もの日蓮宗寺院が建立された。これは当時としては異常なことである。と言うのも、当時の洛中は相国寺や東寺など、仏教寺院は数えるほどしか無かったからである。途中、応仁の乱が勃発したが、日蓮宗寺院はいち早く復興をとげ、応仁の乱後はさらに勢力を拡大する。16世紀初頭には「洛中法華21ヶ寺」と呼ばれたように、多くの日蓮宗寺院が繁栄した。

 

 この時期の日蓮宗は、信徒が武器を手に持ち、一向宗寺院を焼き討ちにするなど鼻息が荒かった。ただ、比叡山延暦寺との対立が激化し、延暦寺の衆徒と六角氏の軍勢によって、洛中の21ヶ寺は焼き払われてしまう(1536年、天文法華の乱)。特に下京は全焼し、日蓮宗寺院は膨大な被害を被った。乱後は15ヶ寺に減少している。

 

ファイル:頂妙寺2948.JPG

日蓮宗本山の1つ「頂妙寺」。会合の資料が残されていた寺院。

 

 法華の乱以降、日蓮宗寺院はその15ヶ寺で「会合」を成立させる。これは、金銭や書類の管理・記録、礼金・礼物の提供などを諸寺で共同で行うというものであった。情勢不安定な戦国時代の京都を生き抜くために結成されたのだろうが、その性格は穏健で、武力に頼らず、礼物や礼金の提供で諸勢力に対処するものだったようだ。法華の乱以前の攻撃的な性格とは対照的だが、法華の乱の反省もあったのだろう。

 このように、団結力を高めた日蓮宗寺院は、再び繁栄の道を歩む事が出来たのである。

 

 

織田信長

 

 さて、1568年に織田信長が足利義昭を伴って上洛したとき、足利義昭は日蓮宗寺院である本国寺と本能寺を宿所としている。信長自身も、京都の宿所はやはり本能寺と妙覚寺という日蓮宗寺院だった。その理由はよくは分からないらしいが、洛中で一定の広さを持った場所が、日蓮宗寺院以外に無かったためだろうか。本国寺や本能寺は、周囲に堀を巡らせていたというから、防御的な観点からも都合のいい場所だったのだろう。

 ただ、「言継卿記」という日記によると、織田信長は若い頃、妙覚寺に滞在していたらしい。信長が最も長く滞在したのは妙覚寺なので、馴染み深い場所だったのかもしれない。

 

 

浄厳院本堂、1577年移築、重要文化財。安土宗論の舞台になった。

 

 この時代に起きた重要な出来事は、1579年に信長の居城・安土城の城下町にある「浄厳院」において、日蓮宗と浄土宗の宗論が行われたことだろうか(安土宗論)。詳しくは書かないが、日蓮宗側が敗北し、多くの被害を被った。安土宗論は日蓮宗の信徒が浄土宗の僧侶に議論をふっかけて始まったので、信長は折伏という日蓮宗の布教スタイルを問題視し、今後行わないように命じた。また、これにかこつけて、信長は会合に金貨200枚を要求している。

 ただ、信長と日蓮宗の関係は決して悪くなく、延暦寺や本願寺に武力を行使したのとは大いに異なる。また、信長は茶会などの文化的行事も本能寺や妙覚寺で行っており、京都の日蓮宗寺院は、この難しい時代を上手く乗り切れたと考えていいだろう。

 

 

 

商店街に接して門を構える「本能寺」。法華宗本門流の大本山。

 

 

本能寺の内部

 

 京都の日蓮宗寺院の中で、最も参拝客や観光客が多く、賑わっている。もっとも、大半の人は、日蓮宗というより「本能寺の変」という歴史上の出来事に興味を持ってここを訪れるのだが。因みに、現在の敷地は豊臣秀吉によって与えられたものであり、本能寺の変があったのはここではない。

 只今大宝殿で多くの文化財を公開中。

 

 

本能寺本堂、1928年再建

 

本堂は京都を代表する近代木造建築の1つである。珍しく西面して建つ。正面7間、側面7間。

 

 

 

 本堂のGejinは吹き放しではなく、建物内部に取り込んでいる。引き戸と欄間にガラスを嵌め込む辺りは近代風で、その影響か、室内がかなり明るい(いつからこうなったかは分からないが)。本堂に誰でも上がれるのも、京都の本山ではここだけである。

 

ファイル:OdaNobunaga mausoleum.jpg

本能寺にある「信長公廟」。信長所持の太刀が納められている。

 

 

つづ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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