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몇년전, 쿄토의 지샤를 하고 있고, 문득 들른 큰 사원이 있었다.그 절의 이름은 「도구산·묘현사」, 니치렌종의 대본산이라고 한다.그것까지 자신은 니치렌종에 흥미가 없고, 또, 쿄토시내의 니치렌종 사원이 관광화 되어 있지 않은 것도 있고, 완전히 무연의 존재였다. 

 그러나, 여러가지 조사해 보고, 쿄토라고 하는 거리에 있어서 니치렌종의 사원만큼 흥미로운 것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어, 최근 빈번히 방문하고 있다(니치렌 개조의 종파는 니치렌종과 법화종으로 나누어지지만, 여기에서는 법화종을 포함해 니치렌종으로 해둔다).

 이번은, 이 묘현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싶다.

 

 

파일:Nichizou Syonin.jpg

일상(1269 년생, 1342년몰) 

 

 자신과 같은 니치렌종 초급자에게 있어서, 당초는 사원의 이름을 기억하는데 고생했다.모토야마는 많고, 유파도 많고 까다롭다.역사상의 승려의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지만, 우선 최초로 기억했던 것이 「일상」.니치렌의 제자·손자 제자이며, 쿄토에 니치렌종을 넓힌 제일인자이다.니치렌종은 일본의 불교 종파로 유일 동국 태생이며, 쿄토에서의 포교는 1294년, 이 일상에 의해서 개시되었다.

 

 

 

 

 

묘현사3 보살당(조사당), 1804년 재건.니치렌·일낭(니치렌의 제자로 일상의 사)·일상을 모신다.

 

 묘현사는 당초, 4조 오미야에 건립되었으므로 4조 유파를 자칭한다(현재는 카미교구에 있다).건립자는 일상이며, 후 다이고 천황으로부터 이 땅을 받았다.신참자일 상이 천황으로부터 지료를 받을 수 있던 것은, 일상의 지지자이며, 제자이기도 한 다이가쿠의 존재가 클 것이다.다이가쿠는 출신 신분이 비싸고, 니치렌종으로 처음으로 대종사(승직의 최고 지위)임등, 활약이 눈부셨다.

 

 무엇보다, 쿄토에서의 니치렌종의 포교가 순풍만범이었다 것은 아니다.법화경을 절대시 해 절복이나 종론을 펼치는 포교 스타일은, 당연히 많은 반발을 불렀다.일상은 3도나 쿄토로부터 추방되고 있고, 절이 파각되는 일도 자주.특히 연력사로부터의 탄압은 격렬했다.그러나, 거기에 굽히는 일 없이, 반대로보다 세력을 늘려 부활해 오는 곳(중)이, 니치렌종인것 같다.

 

 

묘현사의 가람

 

 쿄토의 니치렌종의 사원이 거듭되는 박해를 받아도 부활할 수 있던 것은, 자치구민·상공업자의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1413년에 묘현사(이 시대는 타헤모토지를 자칭하고 있었다)가 연력사의 중도에 의해서 파각되었을 때, 묘현사재흥의 비용이 신도에 의해서 모아졌지만, 그 금액은 1900관문에도 미쳤다.그 중에서도 무로마치 시대의 부호·버드나무 술집은 1000관문을 준비했다.버드나무 술집은 주세를 매월 60관문, 매년 720관문을 납입하는 부유인 술집이었지만, 니치렌종의 신도에게는, 이러한 부호가 대부분 존재하고 있던 것에서 만났다.

 

파일:Priest Nisshin.jpg

일친(1407 년생, 1488년몰)

 

 무로마치 시대의 니치렌종의 승려로 제외할 수 없는 것이 「일친」일까.일친의 포교 스타일은 특히 공격적이고, 막부의 니치렌종에의 개종을 시도해 실패해, 투옥되었다.그 때, 새빨갛게 탄 철냄비를 머리에 씌울 수 있는 등의 고문을 받았지만, 철냄비를 씌울 수 있고 있을 때도 설법을 멈추지 않고, 「냄비나 모습일 부모」등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이 시대가 많은 니치렌종의 승려에서는, 아무리 탄압되어도 당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고 하는 강한 의지가 느껴진다.그리고 그러한 자세가 자치구민들을 매료해, 많은 지지를 얻는 것에 연결되어 갔을 것이다.

 

 

 

묘현테라모토당, 1830년

 

 정면 7간·측면 7간의 훌륭한 본당이다.정면 2간을 Gejin로 하지만, 니치렌종에서는 여기를 취방 해로 하는 예가 많다.공포는 2 손끝.

 덧붙여서, 본당의 내부에 들어가는 것은 할 수 없다.이것은 쿄토가 많은 니치렌종 본당에 공통되고 있다.다만, 법회의 의식 등, 극히 이따금 들어갈 수 있는 날이 있다.묘현사는 유감스럽지만 갈 수 없었지만, 금년은 본륭사와 본선사의 법회의 의식에서, 그러한 본당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본당의 뒷모습.쿄토의 니치렌종 모토야마의 본당은, 후에도 향배가 있다(후배).회랑의 행선지는 영빈관.많은 건물이 회랑에서 접속되고 있는 것도 흥미롭다.

 

묘현사·11 누름돌탑

 

 묘현사는 1788년의 텐메이 대화재로 가람을 소실해, 대부분이 그 후의 재건이지만, 이 석탑은마에다 토시이에의 측실·쥬후쿠원의 기부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에도시대 초기의 건립이다.

 

 

지난 주에 묘현사를 방문했을 때, 아름다운 단풍을 보이고 있었다.

 

 

 영빈관은 담으로 둘러싸이고 안에 들어오는 것은 할 수 없고, 그 전의 뜰을 보는 것도 할 수 없다.밖으로부터 훌륭한 단풍을 1매.

 

 

본당과 단풍

 

 

계속된다

 

 

 

 

 

 


京都・日蓮宗寺院巡り

 数年前、京都の寺社めぐりをしていて、ふと立ち寄った大きな寺院があった。その寺の名前は「具足山・妙顕寺」、日蓮宗の大本山だという。それまで自分は日蓮宗に興味が無く、また、京都市内の日蓮宗寺院が観光化されていないこともあって、全く無縁の存在だった。 

 しかし、色々調べてみて、京都という街にとって日蓮宗の寺院ほど興味深いものがないと思うようになり、最近頻繁に訪問している(日蓮開祖の宗派は日蓮宗と法華宗に分かれるが、ここでは法華宗を含めて日蓮宗としておく)。

 今回は、この妙顕寺を中心に話を進めたい。

 

 

ファイル:Nichizou Syonin.jpg

日像(1269年生まれ、1342年没) 

 

 自分のような日蓮宗初級者にとって、当初は寺院の名前を覚えるのに苦労した。本山は多いし、門流も多くてややこしい。歴史上の僧侶の名前も知らない人が多かったが、まず最初に覚えたのが「日像」。日蓮の弟子・孫弟子であり、京都に日蓮宗を広めた第一人者である。日蓮宗は日本の仏教宗派で唯一東国生まれであり、京都での布教は1294年、この日像によって開始された。

 

 

妙顕寺三菩薩堂(祖師堂)、1804年再建。日蓮・日郎(日蓮の弟子で日像の師)・日像を祀る。

 

 妙顕寺は当初、四条大宮に建立されたので四条門流を名乗る(現在は上京区にある)。建立者は日像であり、後醍醐天皇からこの地を賜った。新参者の日像が天皇から寺領を賜ることが出来たのは、日像の支持者であり、弟子でもあった大覚の存在が大きいだろう。大覚は出身身分が高く、日蓮宗で初めて大僧正に任じられるなど、活躍が目覚しかった。

 

 もっとも、京都での日蓮宗の布教が順風満帆だったわけではない。法華経を絶対視して折伏や宗論を繰り広げる布教スタイルは、当然ながら多くの反発を招いた。日像は3度も京都から追放されているし、寺を破却されることもしばしば。特に延暦寺からの弾圧は激しかった。しかし、それに屈することなく、逆により勢力を増して復活してくるところが、日蓮宗らしい。

 

 

妙顕寺の伽藍

 

 京都の日蓮宗の寺院が度重なる迫害を受けても復活できたのは、町衆・商工業者の支援を受けていたからだろう。1413年に妙顕寺(この時代は妙本寺を名乗っていた)が延暦寺の衆徒によって破却された時、妙顕寺再興の費用が信徒によって集められたが、その金額は1900貫文にも及んだ。なかでも室町時代の富豪・柳酒屋は1000貫文を用意した。柳酒屋は酒税を毎月60貫文、毎年720貫文を納める富裕な酒屋だったが、日蓮宗の信徒には、このような富豪が多く存在していたのであった。

 

ファイル:Priest Nisshin.jpg

日親(1407年生まれ、1488年没)

 

 室町時代の日蓮宗の僧侶で外せないのが「日親」だろうか。日親の布教スタイルは特に攻撃的で、将軍家の日蓮宗への改宗を試みて失敗し、投獄された。その時、真っ赤に焼けた鉄鍋を頭に被せられるなどの拷問を受けたが、鉄鍋を被せられている時も説法を止めず、「鍋かぶり日親」などと呼ばれるようになったという。

 このように、この時代の多くの日蓮宗の僧侶からは、どんなに弾圧されても己の信念を曲げないという強い意志が感じられる。そしてそういう姿勢が町衆達を魅了し、多くの支持を得ることに繋がっていったのだろう。

 

 

 

妙顕寺本堂、1830年

 

 正面7間・側面7間の立派な本堂である。正面2間をGejinとするが、日蓮宗ではここを吹放しとする例が多い。組物は2手先。

 因みに、本堂の内部に入ることは出来ない。これは京都の多くの日蓮宗本堂に共通している。ただし、御会式など、極たまに入れる日がある。妙顕寺は残念ながら行けなかったが、今年は本隆寺と本禅寺の御会式で、それらの本堂に入る事ができた。

 

 

 本堂の後姿。京都の日蓮宗本山の本堂は、後にも向拝がある(後拝)。回廊の行き先は客殿。多くの建物が回廊で接続されているのも興味深い。

 

妙顕寺・十一重石塔

 

 妙顕寺は1788年の天明大火で伽藍を焼失し、多くがその後の再建だが、この石塔は前田利家の側室・寿福院の寄進により建立されたもので、江戸時代初期の建立である。

 

 

先週に妙顕寺を訪れた時、美しい紅葉を見せていた。

 

 

 客殿は塀で囲まれ、中に入ることは出来ないし、その前の庭を見ることも出来ない。外から見事な紅葉を1枚。

 

 

本堂と紅葉

 

 

つづ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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