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朝鮮時代-邸宅

조선시대의 저택을 소개해 달라는 부탁이 있었으므로 간단하게 소개한다.
朝鮮時代の邸宅を紹介してくれという頼みがあったので簡単に紹介する.

 

 

전형적인 양반 상류주택인 선교장은 규모가 전국에서 가장 크다. 현재 남아 있는 본채의 규모는 건물 9동에 총 102칸이며, 건평은 318평에 이른다. 근방에 있던 부속건물과 별채 초가까지 포함하면 대략 300칸에 이르는 대장원(大莊園)을 형성하였다. 동쪽의 안채 및 동별당과 서별당이 가족을 위한 공간이라면, 열화당, 활래정(活來亭), 방해정(放海亭) 등은 손님과 식객을 접대하기 위한 공간이었다. 특히 열화당은 주인이 머무는 사랑채인 동시에 최고위층 손님을 접대하던 공관(空館)이었고, 활래정은 주인과 친분이 두터운 손님들만의 접객장소였다. 한편 경포호수 옆에 마련된 방해정은 장기체류하는 귀한 손님들과 가족들을 위한 일종의 별장이었다.
선교장에는 그들만의 경영철학이 있었다. 안동권씨와 그의 아들 이내번은 강릉의 토호(土豪)들이 명분 때문에 멀리한 염전업을 과감히 경영함으로써 시기적으로 꼭 필요한 소금을 공급하는 실리경영을 해 나갔다. 이를 통해 쌓은 경제력을 농업경영으로 가져가 새로운 농업기술을 받아들이면서 농지를 늘려 갔다. 하지만 과욕을 경계하며 철저하게 인정(人情)을 바탕으로 소작인(小作人), 이웃과의 공생(共生)을 추구하는 상생경영을 했다. 또한 공공의 이익이 곧 선교장의 이익이라는 인식에서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자금을 은밀히 지원했으며, 자연 재해가 있을 때는 창고에 있는 수천 석의 쌀을 내어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한편, 선교장에는 독특하고 아름다운 정원문화가 있었다. 활래정, 녹야원, 방해정과 같은 누정(樓亭)은 멋과 풍류의 상징이었다. 또한 관동팔경의 중심에 위치해 있는 만큼, 자연히 전국의 풍류객들이 모이는 풍류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바로 옆에 경포호수와 동해바다, 경포대가 있을 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 금강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서 대관령을 넘어와 이곳에서 잠시 쉬며 금강산으로 가는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하기도 했다. 선교장에 머물렀던 시인 묵객들의 풍류는 시와 글씨 그림의 형태로 남아 있다.

典型的な両班上流住宅である船橋莊は規模が全国で一番大きい. 現在残っている本棟の規模は建物 9棟に総 102間であり, 建坪は 318坪にのぼる. あたりにあった部属建物と離れ座敷草家まで含めばおおよそ 300間に至る大荘園を形成した. 東の奥及び東別堂と西別堂が家族のための空間なら,悅話堂, 活来亭, 放海亭 などはお客さんと食客を応待するための空間だった. 特に悅話堂は主人がとどまるサラングチェ(主人の居間[出居·広間·座敷]に使つかう棟)である同時に最高上の階お客さんを応待した空館だったし, 活來亭は主人と親しみが厚いお客さんたちば.かりの接客場所だった. 一方鏡浦湖の隣に用意された放海亭は長期滞在する大事なお客さんたちと家族たちのための一種の別荘だった.
船橋莊には彼らば.かりの経営哲学があった. 安東権氏と彼の息子李乃蕃 は江陵の土豪らが名分のため遠ざけた塩田業を敢然と経営することで時期的に必ず必要な塩を供給する実利経営をして行った. これを通じて積んだ経済力を農業経営で持って行って新しい農業技術を受け入れながら農地を増やした. しかし欲深を警戒して徹底的に人情を土台で小作人, 隣りとの共生を追い求める共存経営をした. また公共の利益がすなわち船橋莊の利益という認識で日帝強点期には独立運動資金を隠密に支援したし, 自然災害がある時は倉庫にある数千石米を出して民たちを救恤こんにちはだった.
一方, 船橋莊には独特で美しい庭園文化があった. 活來亭, 鹿野苑, 放海亭のような樓亭は趣と風流の象徴だった. また関東八景の中心に位している位, 自ずから全国の風流客たちが集まる風流文化の中心地になった. すぐ側に鏡浦湖と東海, 鏡浦台があるだけではなく, 地理的に金鋼山に行く町角において大関嶺を越えて来てこちらでしばらく休んで金鋼山に行く人々にさまざまな便宜を提供したりした. 船橋莊に泊まった詩人墨画家たちの風流は詩と字絵の形態で残っている.  

이내번(李乃蕃 1703-1832)
선교장의 역사는 전주이씨 효령대군 십세손 이주화(李胄華,1647-1718)에게 시집간 안동권씨(?-1751) 부인이 남편의 삼년상을 마치고 친정인 강릉으로 돌아오면서부터 시작된다.
강인한 여인이었던 권씨 부인은 경포대가 있는 강릉의 북촌에 터전을 잡았다. 그의 아들 이내번(1703-1781)은 어머니와 함께 염전을 경영해 경제력을 쌓았고, 지금의 선교장 집터를 잡아 1760년대 무렵에 선교장을 건축했다.
그 후 후손들에 의해 사랑채 열화당(悅話堂)이 들어서고, 집 앞에 연못을 파고 활래정(活來亭)을 지어 선교장을 명실상부한 대장원으로 만들었다.
李乃蕃 (1703-1832) 

船橋莊 歴史は全州李氏 孝寧大君 十世孫 李冑華(1647-1718)お嫁になった安東権氏(?-1751) 奥さんがご主人の三年喪を終えて実家である江陵に帰って来てから始まる.
強靭な女人だった権さん奥さんは鏡浦台ある江陵の北村に基盤を取った. 彼の息子李乃蕃 (1703-1781)お母さんと一緒に塩田を経営して経済力を積んだし, 今の船橋莊 家の跡地を取って 1760年代頃に船橋莊を建築した.
その子孫たちによってサラングチェ 悦話堂立ち入って, の前に池をほって活来亭建てて船橋莊 名実共に大莊園作った.

 

 열화당(悅話堂)

선교장秋收記
대택과 소택에서 관리하는 농지가 나뉘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택과 소택에는 관리인이 정해지고 그 관리 하에 있는 농지에 관하여 소작인의 성명과 전답의 지번, 지목, 지대(支待) 등을 기입하였다.
선 교장의 관리농지 총면적은 41결(結) 56부(負) 8속(束)인데, 이 가운데 논이 36결 39부 2속이고, 밭이 5결 17부 6속이었다. 대택에서 관리하는 농지는 21결 38부 6속으로 그 중 논이 19결 11부 2속이며 밭이 2결 27부 4속이다. 소택에서 관리하는 농지는 20결 18부 2속으로 논이 17결 28부이며 밭이 2결 90부 4속이다. 염전은 대택이 2부락(釜落)이고 소택이 3부락이다. 논과 밭의 비율은 81:19로 논의 비중이 높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씨 가문의 소작인은 그 총수가 424명에 이르고 있는데, 소작인의 신분은 대부분 평민과 천민이었다.  

船橋莊 秋収記  

大宅と小宅で管理する農地が分けられていたことと見える. 大宅と小宅には管理人が決まってその管理の下にある農地に関して小作人の名前と田畑の地番, 地目, 支待などを記入した.
船橋莊の管理農地総面積は 41 56 8なのに, このなかに田が 36 39 2, 畑が 5 17 6だった. 大宅管理する農地は 21 38 6その田が 19 11 2畑が 2 27 4. 小宅管理する農地は 2018 2田が 17 28畑が 2904. 塩田は大宅 2釜落小宅 3釜落. 畑の割合は 8119比重が高かったことを見せてくれている. 李氏家門の小作人はその総數が 424人に至るのに, 小作人の身分は大部分平民と賎民だった.    

 

활래정(活來亭)

 

이내번은 자신의 가문을 높이기 위해서 당시 경국대전의 증보판인 속대전에서 규정하던 공명첩을 사서, 비록 실직은 아니지만, 나라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벼슬을 받았다.

李乃蕃は自分の家門を高めるために当時経国大典の増補版である 續大典で規定した空名帖を, たとえ實職は, 国が公式的に認める官職を受けた.

 

공명첩(空名帖)은 납속을 통한 실권 없는 벼슬의 허락이었다. 실권은 없지만 나라의 공식적인 벼슬이기 때문에 가문이 크게 향상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내번은 왕족의 한미한 후손으로 전락한 자신의 가문을 크게 높이고 싶었던 것이다. 이내번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의 직첩을 받았고, 아비 이주화는 가선대부 이조참판의 직첩을 받았으며, 어미 안동권씨는 정부인의  직첩을 받았다.
空名帖は納粟を通じる実権ない官職の許諾だった. 実権はないが国の公式的な官職だから家門が大きく向上する結果を生んだ. 李乃蕃 は王族の寒微した子孫で転落した自分の家門を大きく高めたかったのだ. 李乃蕃は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の職牒を受けたし, 父李胄華は嘉善大夫 吏曹参判の職牒を受けたし, 母安東権氏は貞夫人の職牒を受け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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