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yajima Hirosi (宮嶋博史), 나의 한국사 공부
Miyajima Hirosi (宮嶋博史) 著述 / 너머북스 2만3000원
“일본 封建制論은 일본이 러시아-일본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이른바 세계적 列强의 一員으로 등장했던 時期에 일본과 유럽의 歷史的 同質性을 主張하기 위해 발견된 것으로서, 처음부터 이데올로기的인 성격이 강한 歷史認識이었고 日本史 연구의 脫亞的인 경향을 보여주는 主張이었다. …일본 封建制論은 根本的으로 再檢討되어야 한다.”
이것은 2002年부터 成均館大學 동아시아 學術院에서 연구와 강의를 해온 일본 역사학자 Miyajima Hirosi (宮嶋博史)(65·사진) 敎授의 主張이다. 宮嶋博史 敎授는 京都大學에서 日帝時代 朝鮮 勞動運動, 朝鮮 農村經濟 變動, 土地調査事業 연구로 學位를 받고 東海大學과 東京道立大學, 東京大學 東洋文化硏究所 敎授를 거쳐 成均館大學로 온 韓國史 및 동아시아史 연구(經濟史)의 獨步的인 權威者다. 그의 主張을 따르면, 일본에는 유럽式 封建制가 존재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일본 主流 역사학자들이 그렇게 主張한 것은 결국 帝國主義 植民史觀 論理를 뒷받침하기 위해서였다.
한국*동아시아 經濟史 연구 權威者
유럽 중심 歷史觀을 기준으로 삼아
동아시아 역사 규정하는 것은 잘못
宮嶋博史 敎授는 近代 이전의 일본이 身分制 社會였다는 점에서는 조선*중국과 확실히 달랐다고 본다. 大名나 旗本 같은 上層 武士階級은 長子 家門 중심으로 統治 地位를 세습했고, 농업,상업,수공업을 家業으로 삼는 家門들도 존재했다. 하지만 조선,중국은 身分制 社會가 아니었다. 중국은 宋*明代 이후 中央集權的 官僚體制가 확립된 뒤로 오히려 身分制는 쇠퇴했다. 支配 그룹은 科擧에 합격한 個人들을 중심으로 形成됐으며, 그들의 地位는 세습되지 않았다. 이 制度를 받아들인 조선도 중국보다는 다소 폐쇄적인 支配 그룹이 形成되긴 했지만 身分制는 쇠퇴했다. 兩班은 世襲的*固定的 身分이 아니었다. “支配 身分에 속하는 者가 地域住民의 70~80%나 되는 현상은 身分制 국가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사실들을 立證하기 위해 土地所有와 國家體制, 身分制, 支配階層, 가족과 친족 등을 이웃 나라들의 그것과 비교하며 多角的으로 살피는 이 일본인 硏究者의 평생을 기울인 노력은 치밀하고 신선하다.
일본에선 왜 身分制가 존재했을까? 가장 큰 원인은 市場經濟가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身分制는 社會的 分業이 자동적으로 이뤄지는 시장이 없을 경우 支配層이 이것를 强制하기 위한 裝置다.
전근대 유럽이 身分制 사회였던 이유도 시장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0세기부터 시장이 등장한 중국은 18세기까지, 적어도 16세기까지는 세계에서 가장 先進的인 사회였다. 송나라의 新儒學(宋學)과 그것을 집대성한 朱子學, 朱子學이 採點 基準이 된 科擧制度와 실력 위주의 官僚登用制 확립, 身分制의 해체, 농업과 상공업의 비약적인 발전과 商品*貨幣 경제의 進展이 그것을 대표한다. 그런 상황과 照應하는 社會構造를 宮嶋博史 敎授는 [小農社會]라고 부른다. 小農社會는 자신의 토지를 소유하거나 다른 사람의 땅을 빌리거나 간에 기본적으로 자신과 그 가족의 노동력만으로 독립적인 農業經營을 하는, 小農의 존재가 지배적인 農業社會를 가리킨다. 이것은 大土地所有制를 토대로 하는 유럽 領主階層의 直營地 經營 방식이나 광범위한 농업 노동자들이 존재한 東南*西南 아시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이런 독특한 小農社會가 중국에서는 宋*明代 이후, 한국*일본에선 각기 樣相이 좀 다르긴 하지만 17세기 이후 성립됐다.
이것과 비교하면 같은 시기의 유럽은 훨씬 後進的인 사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封建社會를 기준으로 中國史, 동아시아 역사를 규정하는 것은 큰 잘못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古代古典*中世封建*近代 부르주아라는 單線的인 유럽的 發展史觀을 표준으로 삼는 기존 歷史認識이나 時代區分은 잘못됐다는 것이다.
宮嶋博史 敎授는 1991年에 자신이 <조선 土地調査事業史의 연구>라는 첫 單行本을 냈을 때 한국 歷史學界 일부가 日帝를 미화했다며 비판한 것도 유럽 중심 史觀과 聯關이 있다고 본다. 조선도 일본처럼 자본주의를 향한 自生的*內在的 發展過程을 거쳐왔는데, 日帝가 오히려 이것를 망가뜨렸다고 보는 [자본주의 萌芽論]이 그 중의 하나다. 식민지 近代化論을 主張하는 뉴라이트 계열 硏究者들이 자본주의 萌芽論을 비판했고, 宮嶋博史 敎授가 그들의 연구에 관심을 보인 것도 그에 대한 오해를 부추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東아시아 小農社會가 오히려 유럽보다 앞섰다고 보는 宮嶋博史 敎授에게 자본주의 萌芽論 등은 유럽 중심 史觀에의 지나친 함몰이요 牽强附會일 수 있다. 그는 그런 관점에서 한국 역사 교과서들도 조목조목 비판한다.
내년 2월 정년 퇴임을 앞둔 宮嶋博史 敎授는 이 西歐 중심적인 歷史認識 패러다임을 뛰어넘어 한국*동아시아에 맞는 새로운 學問 方法論을 樹立하는 걸 餘生의 주요 課題로 삼고 있는 듯하다.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
출처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8&aid=0002172919
Miyajima Hirosi (宮嶋博史), 私の韓国史勉強
Miyajima Hirosi (宮嶋博史) 著述 / 向こうブックス 2万3000ウォン
“日本 封建制論は日本がロシア-日本戦争で勝利しながらいわゆる世界的 列強の 一員で登場した 時期に日本とヨーロッパの 歴史的 同質性を 主張するために発見されたこととして, はじめからイデオロギー的である性格が強い 歴史認識だったし 日本史 研究の 脱亜的である傾向を見せてくれる 主張だった. …日本 封建制論は 根本的に 再検討に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
これは 2002年から 成均館大学 東アジア 学術院で研究と講義をして来た日本歴史学者 Miyajima Hirosi (宮嶋博史)(65・写真) 教授の 主張だ. 宮嶋博史 教授は 京都大学で 日帝時代 朝鮮 労動運動, 朝鮮 農村経済 変動, 土地調査事業 研究で 学位を受けて 東海大学と 東京道立大学, 東京大学 東洋文化研究所 教授を経って 成均館大学ローン 韓国史 及び東アジア史 研究(経済史)の 独歩的である 権威者だ. 彼の 主張に付けば, 日本にはヨーロッパ式 封建制が存在したことがない. それでも日本 主流 歴史学者たちがそのように 主張たいてい のは結局 帝国主義 植民史観 論理を裏付けるためだ.
韓国*東アジア 経済史 研究 権威者
ヨーロッパ中心 歴史観を基準にして
東アジア歴史規定することは過ち
宮嶋博史 教授は 近代 以前の日本が 身分制 社会だったという点では朝鮮*中国と確かに違ったと思う. 大名や 旗本 のような 上層 武士階級は 長子 家門 中心に 統治 地位を世襲したし, 農業,商業,手工業を 家業にする 家門らも存在した. しかし朝鮮,中国は 身分制 社会ではなかった. 中国は 宋*明代 以後 中央集権的 官僚体制が確立された後にむしろ 身分制は衰退した. 支配 グループは 科挙に合格した 個人らを中心に 形成になったし, 彼らの 地位は世襲されなかった. この 制度を受け入れた朝鮮も中国よりはちょっと閉鎖的な 支配 グループが 形成になったりしたが 身分制は衰退した. 両班は 世襲的*固定的 身分ではなかった. 支配 身分に属する 者が 地域住民の 70‾80%もなる現象は 身分制 国家では 不可能な事だ.
こんな事実たちを 立証するために 土地所有と 国家体制, 身分制, 支配階層, 家族と親族などを隣り国々のそれと比べて 多角的に察するこの日本人 研究者の一生を傾けた努力は緻密で新鮮だ.
日本ではどうして 身分制が存在しただろうか? 最大の原因は 市場経済が発達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からだと彼は説明する. 身分制は 社会的 分業が自動的に成り立つ市場がない場合 支配層がこれを 強制するための 装置だ.
前近代ヨーロッパが 身分制 社会だった理由も市場が発達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からだ. 10世紀から市場の登場した中国は 18世紀まで, 少なくとも 16世紀までは世界で一番 先進的である社会だった. 宋の国の 新儒学(宋学)とそれを集大成した 朱子学, 朱子学が 採点 基準になった 科挙制度と実力主の 官僚登用制 確立, 身分制の解体, 農業と商工業の飛躍的な発展と 商品*貨幤 経済の 進展がそれを代表する. そんな状況と 照応する 社会構造を 宮嶋博史 教授は [小農社会]と呼ぶ. 小農社会は自分の土地を所有するとか他人の地を借りるとか間に基本的に自分とその家族の労動力だけで独立的な 農業経営をする, 小農の存在が支配的な 農業社会を示す. これは 大土地所有制を土台で するヨーロッパ 領主階層の 直営地 経営 方式や広範囲な農業労動者たちが存在した 東南*西南 アジアとは根本的に他の点だ. こんな独特の 小農社会が中国では 宋*明代 以後, 韓国*日本ではそれぞれ 様相がちょっと違ったりするが 17世紀以後成立された.
これと比べると同じ時期のヨーロッパはずっと 後進的である社会だった. それにもかかわらずヨーロッパ 封建社会を基準で 中国史, 東アジア歴史を規定することは大きい過ちに違いない. よって 古代古典*中世封建*近代 ブルジョアという 単線的であるヨーロッパ的 発展史観を標準にする既存 歴史認識や 時代区分は間違ったというのだ.
宮嶋博史 教授は 1991年に自分が <朝鮮 土地調査事業史の研究>という初 単行本を出した時韓国 歴史学界 一部が 日帝を美化したと批判したこともヨーロッパ中心 史観と 連関があると思う. 朝鮮も日本のように資本主義に向けた 自生的*内在的 発展過程を経って来たが, 日帝がむしろこれをぶっ壊したと思う [資本主義 萌芽論]がその中の一つだ. 植民地 近代化論を 主張するニューライト系列 研究者らが資本主義 萌芽論を批判したし, 宮嶋博史 教授が彼らの研究に関心を見せたこともそれに対する誤解をけしかけたように見える.
しかし 東アジア 小農社会がむしろヨーロッパより先に進んだと思う 宮嶋博史 教授に資本主義 萌芽論 などはヨーロッパ中心 史観への度が外れた陷沒であり 牽強附会であることがある. 彼はそんな観点で韓国歴史教科書たちも条目別に批判する.
来年 2月停年退任を控えて 宮嶋博史 教授はこの 西欧 中心的な 歴史認識 パラダイムを飛び越えて韓国*東アジアに迎える新しい 学問 方法論を 樹立することを 余生の主要 課題にしているようだ.
ハンスン洞記者 sdhan@hani.co.kr
出処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8&aid=0002172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