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옥주(文玉珠)는 생존 당시 자신이 생활한 미얀마의 지명이나 부대 이름 등 구체적으로
증언한 바 있는데 문옥주의 증언은 책을 통해 공개되었다
일본인 프리랜서 작가 모리카와 마치코 (森川万智子)의 버마 전선 일본군 위안부
정규교육을 받지 못해 읽고 쓰기가 서툰 대부분 위안부들과 다르게 문옥주는 야간 학교에서
일본어를 배운 덕에 자신이 머물렀던 미얀마의 지명이나 부대 이름을 구체적으로 기억했다
이 때문에 문옥주의 증언은 軍의 자료나 병사들의 진술과 비교할 수 있는 사례로 평가받는다
문옥주는 미얀마에서 다테 8400부대의 군속이었다 라고 증언하였는데 이와 관련해 아사히 신문은
다테라는 별칭이 붙은 육군 제55사단의 사령부가 8400부대였고 이 부대가 미얀마에 있었다고
전하였다
문옥주의 증언은 미얀마에서 미군이 포로로 잡은 한국인 위안부 심문 보고서나 일본군 규정 등
내용이 거의 일치한다
평일에는 하루에 수십명을 상대하였는데
오전 9시부터 병사 오후4시 부터 하사관 오후9시 이후 자고가는 장교를 상대하였다고 한다
병사의 신분에 따라 1엔50전에서 3엔까지 받았다고 증언하였다
문옥주의 군사 우편 저금
文原玉珠는 문옥주 (文玉珠)의 일본식 이름입니다
위에 부대 이름 부대 번호가 있고 오른쪽 빨간 선은 일본 우정성 구마모토 지부 직인입니다
군사 우편 저금은 일제가 당시 군인과 군속만 가입시켰던 강제 적립제도이다
이 군사 우편 저금에 가입되었다는 것은 軍에 소속된 軍이 관리하는 대상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문옥주는 16세때 친구집에 놀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일본 헌병에 끌려가 만주 북부에서
위안부 생활을 하다가 극적으로 고향 대구로 돌아오게 된다
고향 대구에서 지내다가 1942년 돈을 벌 수 있다는 친구의 권유로 부산에서 배를 타고
대만 싱가포르를 거쳐 미얀마에 도착했다고 한다
미얀마에서 한국인 병사로 부터 너희들 속아서 왔구나 불쌍하다 라는 말을 듣고 자신이
위안소에 오게 된 것을 알았다고 한다
프리랜스 작가 모리카와 마치코 (森川万智子)는 1997년에서 1998년에 걸쳐 미얀마에서
위안소로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 건물 22개를 주민의 증언이나 軍의 자료로 확인하였고
문옥주가 머물렀던 오토메 라는 위안소의 이름이 일치하는 등 문옥주의 기억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일본어가 가능했고 일본 노래를 부를 수 있었던 문옥주(文玉珠)는 장교들의 술 자리에서 춤이나
노래를 불러 받은 팁을 군사 우편 저금 계좌에 저축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인 역사 학자 이쿠히코는
1943년 칙령인 대동아 전쟁 육군 급여령에 따르면 중장의 연봉이 5만 800엔이라는 이유로
위안부들이 당시 미얀마의 일본군 최고 지휘관 보다 돈을 더 많이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이 문옥주의 군사우편 저축은 당시 위안부의 처지에 대한 논쟁이 되기도 하는데
이것에 대해 中央대학 요시미 요시아키 (吉見義明) 교수는
위안부 피해자 대부분 돈을 받지 않았고 문옥주(文玉珠) 처럼 팁을 받아 저축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사례라고 반론하였다
문옥주가 저축한 돈은 2만 6천 145엔이고 전쟁 후 쌓인 이자까지 계산하면 한일협정이 체결된
1965년 기준 잔액이 5만 108엔이다
요시미 교수는 문옥주 할머니의 저축 원금의 80%인 2만 560엔이 1945년 4월 ~5월에 예치된
것을 근거로 예금의 대부분은 일본이 미얀마에서 철수를 결정해 군표의 가치가 없어졌을 때
받은 것이라고 하였다
문옥주(文玉珠)는 1991년 일본에서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하고 저축한 돈의 반환을
요구했으나 1996년 사망할 때 까지 돈을 반환받지 못했다
그녀가 받았다는 군사 우편 저축은 아직 일본 우정성에 남아있다
ムンオックズ(文玉珠)は生存当時自分が生活したミャンマーの地名や部隊至りなど具体的に
証言した事があるのにムンオックズの証言は本を通じて公開された
日本人フリーランサー作家森川まるでして (森川万智子)のミャンマー戦線日本軍慰安婦
正規教育を受けることができなくて読んで書くのが下手な大部分慰安婦たちと違うようにムンオックズは夜間学校で
日本語を学んだお陰に自分がとどまったミャンマーの地名や部隊至ることを具体的に憶えた
このためにムンオックズの証言は 軍の資料や兵士らの陳述と比べることができる事例で評価を受ける
ムンオックズはミャンマーでダテ 8400袋の軍属だったと証言したがこれと関して朝日新聞は
ダテという別称が付いた陸軍第55社団の司令部が 8400袋だったしこの部隊がミャンマーにあったと
伝えた
ムンオックズの証言はミャンマーで米軍が虜に取った朝鮮人慰安婦審問報告書や日本軍規定など
内容がほとんど一致する
平日には一日に数十人を相対したが
午前 9時から兵士午後4時から下士官午後9時以後ザゴがは将校を相対したと言う
兵士の身分によって 1円50前で 3円までもらったと証言こんにちはだった
ムンオックズの軍事郵便貯金
文原玉珠はムンオックズ (文玉珠)の日本式名前です
上に部隊至り部隊番号があって右側赤い線は日本郵政省熊本支部役印です
軍事郵便貯金は日製が当時軍人と軍属だけ加入させた強制積立制度だ
が軍事郵便貯金に加入されたということは 軍に属した 軍が管理する対象者というのを意味する
ムンオックズは 16才時友人の家に遊びに行ってから帰って来る道に日本憲兵に引かれて行って満洲北部で
慰安婦生活を している途中劇的に故郷大邱に帰って来るようになる
故郷大邱で過ごしている途中 1942年お金を儲けることができるという友達の勧誘で釜山で船に乗って
台湾シンガポールを経ってミャンマーに到着したと言う
ミャンマーから朝鮮人兵士から君たちだまされて来たなあかわいそうだ という言葉を聞いて自分が
慰安所へ来るようになったことが分かったと言う
フリーランス作家森川まるでして (森川万智子)は 1997年から 1998年にわたってミャンマーで
慰安所で使われたことと知られた建物 22個を住民の証言や 軍の資料で確認したし
ムンオックズがとどまったオトメという慰安所の名前が一致するなどムンオックズの記憶を確信するように
になったと言った
日本語が可能だったし日本歌を歌うことができたムンオックズ(文玉珠)は将校たちのお酒席で踊りや
歌を歌って受けたチップを軍事郵便貯金口座に貯蓄したことと知られた
日本人 歴史 学者イクヒコは
1943年勅令である大東亜戦争陸軍給与領によれば中将の年俸が 5万 800円だという理由で
慰安婦たちが当時ミャンマーの日本軍最高指揮官よりお金をもっとたくさん受けたと主張した
がムンオックズの軍事郵便貯金は当時慰安婦の境遇に対する論争になったりするのに
これに対して 中央大学YoshimiYoshiaki (吉見義明) 教授は
慰安婦被害者大部分お金をもらわなかったしムンオックズ(文玉珠) のようにチップを受けて 貯蓄したことは極めて
異例的な事例と反論こんにちはだった
ムンオックズの貯蓄したお金は 2万 6千 145円で戦争後積もった利子まで計算すれば韓日協定が締結された
1965年基準残額が 5万 108円だ
Yoshimi教授はムンオックズお婆さんの貯金元金の 80%である 2万 560円が 1945年 4月 ‾5月に預置された
のを根拠で預金の大部分は日本がミャンマーで撤収を決めて軍票の価値が消えた時
受けたことだと言った
ムンオックズ(文玉珠)は 1991年日本で損害賠償請求訴訟を申し立てて貯蓄したお金の返還を
要求したが 1996年死亡するまでお金を返還受け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彼女がいただいたという軍事郵便貯金はまだ日本郵政省に残ってい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