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

李奉昌(1901년~1932년)

서울 출생 .孝寧大君 후손이라고 한다 

서울 용산 文昌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3년 일본인이 경영하는 제과점 종업원으로 취직했으나  주인에게 

한국인 이라는 이유로  가혹한 학대를 받았다 

1917년 일본인이 경영하는 和田상점 점원으로 일하다가 해고당했고 


1920년  만주의 남만 철도회사의 용산 정거장 滿鮮철도에 취직하여 

 운전 견습소의 역부를 지냈고 이어 轉轍手와 連結手가 되었다  


1921년 한국인 일본인의 월급 격차 문제로 항일의식에 눈을 떴다고 한다  

1924년  4월   철도회사의  직책에서 해고당했다 


1924년 9월 항일단체 錦町청년회를 조직하고 총무가 되었다 


1925년 형과 조카와 함께 일본으로 떠났다 

나고야 오사카 요코하마 등에서 상점점원 . 철공소 직원. 잡역부 등 생활을 하면서 일본어를 배웠고 

오사카에서 철공소 직원으로 근무하다가 일본인의 양자가 되어 이름을 기노시타 소죠(木下昌裝)으로

스스로 창씨개명을 하였다 그는 일본인으로 살고자 노력하였다 


1928년 11월 천황 즉위식을 보기 위해 교토로 갔을 때 

한글의 편지를 소지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되어  11일간 투옥되었다 

이때 李奉昌은  한국 독립 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李奉昌은 

자신이나  한국인들이 부당한 차별을 받는 것은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독립운동을 할 것을 맹세하고 중국 상하이로 떠난다 


상하이에서 金九가 비밀리에  만든 항일단체 (한인 애국단 )에 가입하고 

그는 자신이 천황을 암살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두 손에 수류탄을 들고 태극기 앞에서 웃으며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옆에는 한인 애국단 가입 선서문이다 

선서문에는 




나는 赤誠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 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를 맹세합니다 

대한민국 12년 12월 13일  한인 애국단  앞 李奉昌 이라고 써있다 


李奉昌은 1931년 12월말 도쿄에 도착한다 

그리고 히로히토 천황이 1932년 1월 8일 도쿄 代代木 연병장에서 신년 관병식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 날에 거사 즉 히로히토 천황에게 수류탄을 던지는 일을 계획한다 



드디어 李奉昌은 1932년 일본  도쿄 경시청에서  일왕 행렬을 기다렸다가 수류탄을 던졌다 

그런데 수류탄은 일본 궁내 대신이 타고 있던 마차 옆에 폭발하여 일장기 기수와 근의병이 타고 있던 

馬2필이 죽었다 

거사는 실패했다  



이 신문은 李奉昌의 의거를 보도한  1932년 1월 9일자 중국의 신문이다 

중국 국민당  기관지 민국일보 (民國日報)이다 


이신문은 


한인이    日皇을  저격했는데도    적중하지 못했다  日皇이 열병식을  마치고      도쿄로  돌아올 때에    갑자기 저격을 받았으나 


불행하게 겨우  副車에  맞았고   범인은  곧 체포되었다   


(韓人刺日皇未重不幸副車兇手卽被逮)라는 표제로 보도했고



靑島의 申報의 民國日報는



 한국의 죽지 않은  義士  李奉昌이 日皇을 저격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韓國不亡李奉昌炸一皇未遂)라고 보도하였다 



이런 중국의 보도에 일본인들은 격분하였다  


상하이에서 발행되는 申報는 李奉昌을  “한국志士”라고  지칭하고 있었다 



증국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들은 중국의 이러한 보도에 격분했다 -


靑島의 일본인들은 이 民國日報에 항의하여 폭동을 일으켰고


중국에서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대와 경찰은 民國日報를 습격하여   중국 국민당 시당부가 파괴되고 


民國日報는 큰 피해를 입고 폐간되었다

————————————————————-



현장에서 체포되는 李奉昌


李奉昌은 도쿄 경시청 앞에서 일왕  히로히토 행렬에 폭탄을 던졌다 


첫번째 마차에 일왕이 타고 있었는데  그 마차에는 한사람이 타고 있어 일왕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두번째 마차를 겨낭해 폭탄을 던졌는데 그 마차에는 궁내부 대신이 타고 있던 마차였다 

폭탄은 마차 뒤쪽 마부가 서있는 받침대 아래에 떨어져 터졌다 


그런데 수류탄은 성능이 약해서  마차 밑 바닥과  바퀴의 타이어가 파손되었을 뿐이었다 


사방으로 사람들이 흩어지고 제복을 입은 순사가 李奉昌 뒤에 있던 남자를  체포하고 연행하려고 하자 


李奉昌은 “아니다 폭탄을 던진 사람은 바로 나다 “라고 외치고 스스로 체포되었다고 한다 



1932년 1월  도쿄 경시청 앞에서 사건 검증을 하고 있다  





매일신보 1932년 1월 10일 


 聖上還 어노부 향하여 폭탄을  수척탄 (수류탄)을 돌연 투척  


  범인은 현장에서 즉각 포박 . 폐하는 御無事還幸 



  내무성 8일 오후 5시30분 발표= 천황폐하께서  육군  관병식에  행하였다가  還御하옵시던    도중에

로부가 앵전문(櫻田門) 밖에  지나려고  하던 순간에  경위 사고가 발생하였는데  그 대요(大要)는 다음과 같다.


  8일  오전 11시 44분경에 로부가 국정  舊櫻田庭 경시청 앞에 닿으려 하는 찰나에  봉배자선내로부터 돌연 로부에 대하여


두번째  되는  일목궁상이  승용한 마차에 수류탄 비슷한 것을 어떤 者가 던졌는데 궁상이 승용한 마차의 왼쪽 차량 부근에


떨어지며 동 차체 아래의 뒤에 크기 엄지 손가락만한  부상을 입게 하였으나 



황송한  중에도 봉연과 기타에는 아무 어이상(御異狀)도 없었고 동 11시 50분경에

御무사히 궁성에  還御하옵시었다.


그리고 범인은 경시청 형사 석삼훈부와 순사 본전항의 산하종평 하합 헌병 상등병 내전 헌병군조 등에게

체포되어  경시청에서  방금 취조를  받는 중인데 그 씨명과 년령은 다음과 같다.

조선 경성출생 토공  李奉昌(32) 

.............



李奉昌은 1932년  9월 30일  도쿄 대심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1932년 10월 10일 오전 9시 2분에


이키가야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李奉昌이 사형 선고를 받았다는 소식을 전하는 신문 

1932년 10월 1일 

櫻田門外 大逆犯人  李奉昌에게 사형 선고  


  피고는 각오한 듯이 點頭


  今朝, 대심원에서 판결 


  동경 30일발  전보 연합  櫻田門 외 대역 사건의  범인 조선 경성 출생  李奉昌에 관한 사건 판결

언도 공판이 30일 오전 동경 대심원 형사 제1호 대법정에서 개정되었다.


대심원장 화인 재판장은 나직한 목소리로 판결의 이유를 낭독한 후

피고에 대하여 엄숙히 “피고 李奉昌을 사형에 처한다”라고 선언하였다. 때는 오전 9시 15분 피고는

각오한 듯이 별로 안색도 변하지 않고  창백한 얼굴을 들어 고개를 끄덕이었다.


아침부터  내리는 가을 비는 무거운 법정의 공기를 더욱 무겁게 하였다. 



李奉昌 유해는 


1946년에 金九에 의해 국내로 봉환되어 효창공원 묘역에 안장되었다 


李奉昌이 체포되는 과정에 대해 신문 기사에서는 곧 체포되었다 라고 쓰고 있을 뿐이다  


체포되는 과정에서  반항을  했다는  이야기는  없다 사진에서의 표정을 봐도 

별로 반항을 하지 않고 체포되는 모습이다  


당시 日帝는   언론을  통제하고 있었고  신문  기사 내용을  심하게 검열하고 있었다  

 

일본 형사들은 

李奉昌이 폭탄을 던지는 것을 목격하고 곧 바로  체포한 것은 아니다 

폭탄 터지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중에 형사들은  다른 사람을 지목하고 체포하려고 하자 

李奉昌이 “저 사람이 아니다  내가  폭탄을 던진 사람이다 라고   외치고 스스로 체포된 것이다 


한국 내에 신문은  일본에서 발행된 신문 기사를 전하는데  그치고 있다 

다만 李奉昌이  사형 선고를 받은 날에 가을 비가 내리고 있었다고 쓴 것은   당시의   슬픈  감정을  누르고 쓴  것으로 

이것은  日帝의 검열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경악했다 

일본이 조선의 근대화를 도와 한국인들은 일본을 고마워 한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을 때에 

이 李奉昌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李奉昌은  천황 암살  실행 전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이제 부터 영원한 쾌락을 위해  떠나는 것이니  부디 슬퍼하지 마세요 “




한국독립당은 의거 후 1월 10일 李奉昌이 日皇을 저격한 것에 대해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저들은 혈족끼리 서로 결혼한 괴수를 내세워 스스로 만세一系라고 부르며 자랑으로 삼고 있다 

온갖 나쁜 짓을 하는 우두머리로 앉아 인민들의 고혈을 먹고 있으면서  스스로  천황이라고 일컬고 

제일 높은 자리에 앉아 있다 


저 일본 황제는 죽일 가치가 없다  그의 능력은 시세를 가능하기에 모자라고 그의  권력은 군벌을 통제하기에 모자라고 

그의 위엄은 원로와 정당 당수를 거느리기에 모자란다 

물론 명치 다이쇼 쇼와 모두 같은  소굴의  한패거리이며 괴뢰일 뿐이다 


그러면서 선언문은 

일본 천황을 죽일 수 밖에 없는 이유를 9가지로 설명했다 


1.그가 元首의 자리에 있으며 온갖 죄악이 모이는 자리에 있는 것

,2. 그 賊徒를 사로 잡으려면 먼저 그의 왕을 사로 잡아야 하는 것

3.우리 조국을 위해 원수를 갚는 것

4., 천벌을 내리고 인권을 신장하는 것을 위해

5.우방을 위해 치욕을 풀어 주기 위해

6., 백성들이 참을 길이 없으면 無道한 임금을 주살하는 것

7., 그들의 國體를 고쳐 우리 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것 

8. 못된 오랑캐에게는  응당한 벌을 내리고  온세상  사람에게는  뉘우침을  주기 위한 것 

9. 하늘에 順하고 사람에 應하며 천하를 고동케 하여 인류를 해방시키려고  하는 것 


한국 독립당의 

천황을 죽일 수 밖에 없는 이유 9가지는   다소 자극적이지만   당시  한국인들의  분노가 느껴진다  



李奉昌 의거에 대해 

당시 한국에서 발행되는  신문사들은 

도쿄發   내무성 발표나  기사를 그대로 전하고 있는 것에 그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의 신문은 달랐다 

중국의 신문은 李奉昌 의거를 대서특필하고 있었다 

중국의 기관지 민국일보 등은  한국인 李奉昌이 日皇을 저격하였으나 불행하게 적중하지 못했다 

라고 보도하여 당시 중국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군대의 습격을 받았다 


福州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군대는 경찰과 합동으로  民國日報社 윤전기에 모래를 뿌려 파괴하고 

간부들을 구타하는 등 신문사에 테러를 자행하고 있었다 


日皇不幸不中이라고 쓴 담당 기자는  고문을 당하고 시말서를 쓴 후에  풀려났다고 한다  


그리고  日皇不幸不中이라고 쓴 신문사들은 모두  일본 당국에 의해  모두  폐쇄당하였다 




교전하고 있는  중국 국민당 헌병대 


상하이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수뇌는  중국인을 매수하여 자객으로 위장하게 하고 

일련종의 승려를 암살하게 한다 일본은 이것을 구실로  1932년 1월 28일  제1차   상하이 사변을 일으키고 

상하이를  불법으로 점령한다


李奉昌  의거에  대해  중국 신문사들의 보도에 대해 일본 당국은 매우 당혹해 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일관계는 매우 나빠졌다 


상하이 사변은  李奉昌 의거의 결과였다 



 


李奉昌. 義挙

李奉昌(1901年‾1932年)

ソウル生まれ .孝寧大君 子孫だと言う

ソウル竜山 文昌初等学校の旧称を卒業して

1913年日本人が経営するベーカリー従業員で就職したが主人に

韓国人でありなさいという理由で苛酷な虐待を受けた

1917年日本人が経営する 和田商店店員で働いている途中解雇されたし


1920年満洲の南だけ鉄道会社の竜山停車場 満鮮鉄道に就職して

運転見習い所の役夫を執り行なったし引き続き 転轍手と 連結手になった


1921年韓国人日本人の月給格差問題で抗日意識に目覚めたと言う

1924年 4月鉄道会社の職責で解雇された


1924年 9月抗日団体 錦町青年会を組織して総務になった


1925年兄さんと甥と一緒に日本に発った

名古屋大阪横浜などで商店店員 . 鉄工所職員. 下回りなど生活をしながら日本語を学んだし

大阪から鉄工所職員で勤めている途中日本人の養子になって名前を木下牛ですよ(木下昌装)で

自ら創氏改名をした彼は日本人で住もうと努力した


1928年 11月天皇即位式を見るために京都に行った時

ハングルの手紙をお持ちしていたという理由で警察に逮捕して 11日間投獄された

この時 李奉昌は韓国独立運動に関心を持つようになる


李奉昌は

自分や韓国人たちが不当な差別を受けることは国を日本に奪われたからだと思って

独立運動をすることを誓って中国上海に発つ


上海で 金九が秘密裡に作った抗日団体 (韓人愛国団 )に加入して

彼は自分が天皇を暗殺するという計画を明らかにした







両手に手榴弾を持って太極旗の前で笑って記念撮影をしている

横には韓人愛国団加入宣誓文だ

宣誓文には




私は 赤誠として祖国の独立と自由を回復するために

韓人愛国団の一員になって敵国の首魁を屠戮するのを誓います

大韓民国 12年 12月 13日韓人愛国団前 李奉昌 と書いている


李奉昌は 1931年 12月末東京に到着する

そしてヒロヒト天皇が 1932年 1月 8日東京 代代木 練兵場で新年観兵式に参加するという消息を聞いて

が日に巨事すなわちヒロヒト天皇に手榴弾を投げる事を計画する



いよいよ 李奉昌は 1932年日本東京警視庁で日王行列を待ってから手榴弾を投げた

ところで手榴弾は日本宮内代わりが乗っていた馬車横に爆発して日の丸騎手とグンウィビョングが乗っていた

馬2匹が死んだ

巨事は失敗した



が新聞は 李奉昌の義挙を報道した 1932年 1月 9日付け中国の新聞だ

中国国民党機関紙民国日報 (民国日報)だ


李新聞は


韓人が 日皇を狙い撃ちしたのに 的中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日皇が熱病式を終えて 東京に帰って来る時に 急に狙い撃ちを受けたが


不幸にやっと 副車に当たったし犯人はすぐ逮捕した


(韓人刺日皇未重不幸副車兇手即被逮)という見出しで報道したし



青島の 申報の 民国日報は



韓国の死なない 義士 李奉昌が 日皇を狙い撃ちしたが成すことができなかった


(韓国不亡李奉昌炸一皇未遂)と報道した



こんな中国の報道に日本人たちは激怒した


上海で発行される 申報は 李奉昌を "韓国志士"と指称していた



ズンググックに居住していた日本人たちは中国のこのような報道に激怒した -


青島の日本人たちはこの 民国日報に抗議して暴動を起こしたし


中国で駐屯していた日本軍隊と警察は 民国日報を襲って中国国民党時当付が破壊されて


民国日報は大きい被害を被って廃刊された

-----------------------------------------



現場で逮捕する 李奉昌


李奉昌は東京警視庁の前で日王ヒロヒト行列に爆弾を投げた


一番目馬車に日王が乗っていたがその馬車にはひとりが乗っていて日王ではないと思って

二番目馬車を狙って爆弾を投げたがその馬車には宮内部大臣が乗っていた馬車だった

爆弾は馬車裏側馬子が立っている支柱の下に落ちて裂けた


ところで手榴弾は性能が弱くて馬車下底とタイヤのタイヤが破損されただけだった


四方で人々が散らばって制服を着た巡使が 李奉昌 後にいた男を逮捕して連行しようとすると


李奉昌は "ない爆弾を投げた人はまさに私だ "と叫んで自ら逮捕したと言う



1932年 1月東京警視庁の前で事件検証をしている





毎日新報 1932年 1月 10日


聖上還 オノ−ブ向かって爆弾をスチォックタン (手榴弾)を突然投擲


犯人は現場で直ちに捕縛 . 廃する 御無事還幸



内務省 8日午後 5時30分発表= 天皇陛下が陸軍観兵式に行ってから 還御した途中に

ロブがエングゾンムン(桜田門) 外に経とうと思った瞬間に経緯事故が発生したがその大要(大要)は次のようだ.


8日午前 11時 44分頃にロブが国政 旧桜田庭 警視庁の前に着こうと思う刹那にボングベザソンネから突然ロブに対して


二番目になる一目弓状が乗用した馬車に手榴弾似ていることをどんな 者が投げたが弓状が乗用した馬車の左側車近所に


落ちて東車体の下の後に大きさ親指ほどの負傷を負うようにしたが



恐縮な中にもボングヨンとその他にはどんなオイサング(御異状)もなかったし同 11時 50分頃に

御無事に宮城に 還御した.


そして犯人は警視庁刑事ソックサムフンブと巡使元手港のサンハゾングピョング下合憲兵上等兵内戦憲兵郡鳥などに

逮捕して警視庁でただいま取調を受けるところなのにその氏名とニョンリョングは次のようだ.

朝鮮京城生まれ土工 李奉昌(32)

.............



李奉昌は 1932年 9月 30日東京大審院で死刑宣告を受けて 1932年 10月 10日午前 9時 2分に


イキがは刑務所で殉国した



李奉昌が死刑宣告を受けたという消息を伝える新聞

1932年 10月 1日

桜田門外 大逆犯人 李奉昌に死刑宣告


被告は覚悟したように 点頭


今朝, 大審院で判決


東京 30一発電報連合 桜田門 外身代わり事件の犯人朝鮮京城生まれ 李奉昌に関する事件判決

言い渡し公判が 30日午前東京大審院刑事第1号大法廷で改定された.


対審院長火印裁判長はやや低い声で判決の理由を朗読した後

被告に対して厳晨に “被告 李奉昌を死刑に処する”と宣言した. 時は午前 9時 15分被告は

覚悟したようにあまり顔色も変わらないで青白い顔をあげて首をうなずいた.


朝から下る秋祈る重い法廷の空気をもっと重くした.



李奉昌 有害は


1946年に 金九によって国内に奉還されて孝昌公園墓地に鞍された


李奉昌が逮捕する過程に対して新聞記事ではすぐ逮捕したと書いているだけだ


逮捕する過程で反抗をしたということはない写真での表情を見ても

星で反抗をしないで逮捕する姿だ


当時 日帝は言論を統制していたし新聞記事内容をひどく検閲していた

日本刑事たちは

李奉昌が爆弾を投げることを目撃してすぐすぐ逮捕したことではない

爆弾叫ぶ音とともに人々が四方で散らばる中に刑事たちは他人を指目して逮捕しようとすると

李奉昌が "あの人ではない私が爆弾を投げた人だと叫んで自ら逮捕したことだ


韓国内に新聞は日本で発行された新聞記事を伝えるのに止めている

ただ 李奉昌が死刑宣告を受けた日に秋雨が降っていたと書いたことは当時の悲しい感情を押して書いたことで

これは 日帝の検閲を避けるためだったように見える



日本は驚愕した

日本が朝鮮の近代化を手伝って朝鮮人たちは日本を有り難いと大大的に宣伝している時に

が 李奉昌 事件が起こったことだ


李奉昌は天皇暗殺実行の前にこんなものを言ったと言う

"私はもうから永遠な快楽のために去ることだからなにとぞ悲しまないでください "




韓国独立党は義挙後 1月 10日 李奉昌が 日皇を狙い撃ちしたことに対して宣言文を発表した


彼らは血族どうしお互いに結婚した怪獣を立てて自ら万歳一系と呼んで自慢にしている

あらゆる悪いことをする親分に座って人民たちの膏血を食べているのに自ら天皇だとイルカルで

一番高い席に座っている


あの日本皇帝は殺す価値がない彼の能力は気配ができるのに帽子と彼の権力は軍閥を統制するのに帽子と

彼の威厳は元老と政党党首を従えるのに足りない

もちろん明治大正昭和皆同じな巣窟の一派で傀儡であるだけだ


それとともに宣言文は

日本天皇を殺すしかない理由を 9種で説明した


1.彼が 元首の席にありあらゆる罪悪が集まる席にあること

,2. その 賊徒を捕らえようとすれば先に彼の王を捕らえ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

3.私たち祖国のために仕返しすること

4., 天罰を下げて人権を伸びることをのために

5.友邦のために恥辱を解いてくれるのために

6., 民たちの堪えるあてがなければ 無道一賃金を誅殺すること

7., 彼らの 国体を直して私たち 株券を回復するための

8. 悪い蛮夷には当然した着を下げて世界中人には悔やむことを与えるための

9. 空に 順と人に 応して天下を鼓動するようにして人類を解放させようと思うこと


韓国独立党の

天皇を殺すしかない理由 9種はちょっと刺激的だが当時朝鮮人たちの怒りが感じられる



李奉昌 義挙に対して

当時韓国で発行される新聞社たちは

東京発 内務省発表や記事をそのまま伝えていることに止めている


ところで中国の新聞は違った

中国の新聞は 李奉昌 義挙を特筆大書していた

中国の機関紙民国日報などは 韓国人 李奉昌が 日皇を狙い撃ちしたが不幸に的中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と報道して当時中国に駐屯していた日本軍隊の襲撃を受けた


福州に駐屯していた日本軍隊は警察と合同で 民国日報社 輪転機に砂を振り撤いて破壊して

幹部たちを殴ぐるなど新聞社にテロをほしいままにしていた


日皇不幸不中だと書いた担当記者は拷問にあって始末書を書いた後に釈放されたと言う


そして 日皇不幸不中だと書いた新聞社たちは皆日本政府によって皆閉鎖当たりこんにちはだった




交戦している中国国民党憲兵隊


上海に駐屯していた日本軍首脳は中国人を買収して刺客で偽装するようにして

日蓮宗の僧侶を暗殺するようにする日本はこれを言い立てで 1932年 1月 28日第1次上海思弁を起こして

上海を不法に占領する


李奉昌 義挙に対して中国新聞社たちの報道に対して日本政府は非常に戸惑ってしていたことだ

中日関係は非常に悪くなった


上海思弁は 李奉昌 義挙の結果だ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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