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아이치현 현청 앞에서 찍은 한국인 女子勤勞挺身隊
아직 어린 소녀들이 대부분이다
女子勤勞挺身隊근거는
1944년 8월 23일에 시행된 칙령 여자 정신 근로령이다
이 근로령은 1944년 3월 각의 (閣議)에서 결정된 여자 정신대 제도를 입법화한 것으로 국가가 주도한 강제성의 동원이다
女子勤勞挺身隊 법령은 제1조에서
이 법령은 근로 협력에 관한 명령이며 정신 대원은 행해야 하는 者이다 라고규정하고 있다
女子勤勞挺身隊는 만12세 이상 미혼 여성이 대상자였다
일본 공장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일본어가 가능했던 초등학교 재학생이거나 졸업한 여성들이 다수 동원되었다
이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는 여성들의 조혼이 유행하게 되어
10대 후반의 미혼 여성들을 보기 드물게 되었다고 한다
일본으로 동원된 한국 여성 정신대의 규모는 2500명에서 4000명 정도로 추정한다
女子勤勞挺身隊 법령 제1조에서
女子勤勞挺身隊 대원은 근로 협력을 행해야 하는 者라고 규정하였는데
일반 女子勤勞挺身隊 대원으로 편성된 후에는 女子勤勞挺身隊 동원을 거부할 수 없었다
만약 거부할 경우 국가총동원법에 의해 1년 이하 징역 또는 1000엔 이하 벌금을 내어야 했다
1945년 8월 기준으로 작성된 미쓰비시 사보
이 사보에 따르면 미쓰비시 전체 계열사에서는 34만 7천 974명의 노동자가 있었는데
반도인 즉 한국인 징용자 중에 1만 2천 913명은 징용이고
非징용은 171명이다
또 나고야 미쓰비시 여자 근로 挺身隊는 9.485명으로 되었 있는데
일본은 자국의 여성들도 근로 挺身隊로 동원했기 때문에
모두 한국 여성이라고 보기 어렵지만 한국 여성들도 상당히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일본은 戰時체제에서 기업을 직접 국유화하지 않았지만 노무 관리 전반을 완전히 국영으로 운영하였다
즉 당시 기업은 직원을 자유롭게 채용하거나 퇴직시킬 수 없었고 노동자가 필요하면 국가에 신청을 하였다
그러면 . .국가는 노동자를 선발하여 노동력이 필요하다고 신청한 기업에
노동자를 배분하는 형태였다
동원된 노동자들은 국가에서 지정해 준 기업에서 일해야 했다
임금(賃金)은 기업이 지불했지만 賃金 수준은 국가에서 통제하였다
이것은 1944년 2월 10일 매일신보사에서 발행한 징용 문답서이다
1938년 국가 총동원법이 제정된 후 1939년 국민 징용령이 공포되었다
징용 문답에는
학도선등 (學徒先登)이라고 하며 천황을 위해 영광스럽게 징용에 임하고 생산에 노력할 것을 다짐한다
라는 문장 부터 시작한다
징용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천황폐하를 위해 일하는 것이고 국가의 명령에 따라 국가에서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 징용의 근본이다 라고 답변하고 있다
만약 가정에 사정이 생겨 징용에 나갈 수 없는 사람의 경우는 어떻게 하는가 라는 질문에는
징용은 戰時에 있어 국가의 긴급 업무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정의 사정이나 일신상의 이해에 따라
주저할 때가 아니며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수치스럽다 라고 말하고 있다
또 징용 명령서를 받으면 징용자가 공장을 선택할 수 없고 국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고
징용 중에 일을 중단하고 싶어도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고 도망가게 되면 국가 총동원법에 따라 처벌받는다
라고 직시하고 있다
징용 출두 명령서
1945년 1월 13일 오전 9시 까지 대전부청 공회당으로 출두하라 라고 지시하고 있다
징용 영장을 받은 사람은 국가에서 지정한 사업체에 복무하도록 되어 있고
만약 징용을 거부할 경우 국가 총동원법에 따라 1년 이하 징역 또는 1000엔 이하 벌금을 내어야 되는
처벌을 받았다
賃金 지불 요청서
이것은 사할린으로 징용된 김규철씨가 1944년 11월 11일 부터 탄광에서 일했으나 賃金을 받지 못하여
일본 당국에서 賃金을 지불해 줄 것을 요청하는 賃金 지불 요청서이다
1945년 3월 12일에 발행하였다
미쓰비씨 기업 소유의 해저 탄광이 많았다
미씨비씨는 전쟁 당시 조선소와 항공기 제작소 등을 운영했던 군수업체였다
일본인 학자 다케우치 히로야쓰가 쓴 “미쓰비씨 재벌에 의한 강제 연행 戰時 노동에 대하여 ” 를 보면
미쓰비씨는 1939년 이후에도 한국인을 최소 10만명을 강제로 징용했다고 한다
미쓰비씨는 일본 한반도 뿐만 아니라 동남 이시아 미트로네시아 사할린 등 작업장을 125곳을 두었다
한국인 노무자들은 임금(賃金)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고 학대받았다
사고 질병 등으로 사망해도 이것을 숨기기도 하였다
나가사키 미쓰비씨 탄광 다카시마 (高島) 광업소에서 사망한 표상만씨의 사망 통지서
이것은 1971년 6월 10일에 발급된 한국인 강제 징용자 표상만씨의 사망 통지서인데
1942년에 낙반 사고로 사망했다는 증명서를 .,( 그의 유족과 일본 시민 단체 노력으로 ) 1971년에 발급받었다
일본 국립 문서관 쓰쿠바 분관에 보관된 노동성 조사의
“한국인 노무자 미지급 賃金 채무조” (1950년 10월 6일)에 따르면
한국인 노무자 등에게 지급하지 않은 賃金을 공탁형태로 일본 법무부에 맡긴 기업 중에 미쓰비씨가 1만 935명으로
제일 많았다
미쓰비씨 중공업 나가사키 조선소는 한국인 406명 분이 급료 퇴직금 등 85만 9770엔을 공탁하였다
이 돈은 일본 은행에 예치되어 있다
1945년 8월 원자폭탄이 투하된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한국인이 7만명이 거주하고 있었고 이 중에 4만명이
피해를 입었다
한국인 노무자는 미쓰비씨 조선소에서 4700명 다카시마 탄광에 3500명 정도 있었지만 정확한 피해 사례는
밝혀지지 않았다
미쓰비씨는 전쟁 이전의 일은 현재 회사와 별개이고
1965년 한일협정으로 개인 청구권이 소멸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카시마(高島)에는 미쓰비씨 주도로 해저 탄광이 많이 개발되어 있었다
이 섬은 시멘트를 매립하여 3개의 섬을 이어 붙인 것으로 하시마 (端島)섬 보다 규모가 더 크다
이 섬으로 끌려 온 한국인은 4000명 정도 되었다
노무자 중에 익사 압사 병사한 한국인 노무자들의 시체가 섬 한쪽에 매립되었다
미쓰비씨 측에서는 사업자 위패를 소각해 버려 한국인 유골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1988년 다카시마 탄광이 폐쇄해 유골의 일부를 킨소지 (金松寺)에 옮기고 나머지는 유골은
공양탑 아래 매립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공양탑 이라는 이름으로 비석이 남아 있는데 현재는 공양탑으로 가는 길이 폐쇄되어 있다
서경덕 교수 등 한국측에서 한국인 유골을 킨소지에 이전한 것이 맞느냐 라고 질문하였는데
金松寺 측은 미쓰비씨가 알고 있을 것이다 라고 답변하였고
미쓰비씨 측은 나가사키는 알고 있을 것이다 라고 답변하는 등 일본은 외면하고 있다
日本愛知県県庁の前で取った韓国人 女子勤労挺身隊
まだ幼い少女たちの大部分だ
女子勤労挺身隊根拠は
1944年 8月 23日に施行された勅令女精神勤労領だ
が勤労領は 1944年 3月閣議 (閣議)で決まった女従軍慰安婦制度を立法化したことで国家が主導した強制性の動員だ
女子勤労挺身隊 法令は第1条で
が法令は勤労協力に関する命令で精神隊員は行わなければならない 者だラゴギュゾングしている
女子勤労挺身隊は満12歳以上未婚女性が対象者だった
日本工場で仕事をするから日本語が可能だった小学校在校生や卒業した女性たちが多数動員された
10代後半の未婚女性たちを珍しくなったと言う
日本で動員された韓国女性従軍慰安婦の規模は 2500人から 4000人位に推正する
女子勤労挺身隊 法令第1条で
女子勤労挺身隊 隊員は勤労協力を行わなければならない 者と規定したが
一般 女子勤労挺身隊 隊員で編成された後には 女子勤労挺身隊 動員を拒否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もし拒否する場合国家総動員法によって 1年以下懲役または 1000円以下罰金を出さ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1945年 8月基準に作成された三菱社報
が社報によれば三菱全体系列社では 34万 7千 974人の労動者があったが
半島であるすなわち韓国人徴用者の中に 1万 2千 913人は徴用で
非徴用は 171名だ
また名古屋三菱女勤労 挺身隊は 9.485人になるあるのに
日本は自国の女性たちも勤労 挺身隊に動員したから
皆韓国女性だと思いにくいが韓国女性たちもよほど含まれているでしょう
日本は 戦時体制で企業を直接国有化しなかったが労務管理全般を完全に国営で運営した
すなわち当時企業は職員を自由に採用するとか退職させ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し労動者が必要ならば国家に申し込みをした
それでは . .国家は労動者を選抜して労動力が必要だと申し込んだ企業に
労動者を配分する形態だった
動員された労動者たちは国家で指定してくれた企業で働か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賃金(賃金)は企業が支払ったが 賃金 水準は国家で統制した
これは 1944年 2月 10日毎日新報社で発行した徴用問答書だ
1938年国家総掛かり法が制定された後 1939年国民徴用領が公布された
徴用問答には
学徒船 (学徒先登)と言って天皇のために栄え栄えしく徴用に林して生産に努力することを念をおす
という文章から始める
徴用が何やらという質問に対して
天皇陛下のために働くことで国家の命令に従って国家でさせる仕事をすることが徴用の根本だと返事している
もし家庭に事情が起こって徴用に出ることができない人の場合はどのようにするかという質問には
徴用は 戦時において国家の緊急業務をすることだから家庭の事情や一身上の理解によって
ためらう時ではなくて .そんな考えをする人は恥かしいと言っている
また徴用命令書を受ければ徴用者が工場を選択することができないし国家の命令に従わなければならないし
徴用の中に日を中断したくても絶対にそんなことができないし逃げだすようになれば国家総掛かり法によって処罰される
と直視している
徴用出頭命令書
1945年 1月 13日午前 9時まで大田俯聴公会堂で出頭しなさいと指示している
徴用令状を受けた人は国家で指定した事業体に服務するようになっていて
もし徴用を拒否する場合国家総掛かり法によって 1年以下懲役または 1000円以下罰金を出さなければならない
処罰された
賃金 支払い要請で
これはサハリンに徴用されたギムギュチォルシが 1944年 11月 11日から炭鉱で働いたが 賃金を受けることができなくて
日本政府で 賃金を支払ってくれるのを要請する 賃金 支払い要請書だ
1945年 3月 12日に発行した
ミスビシ企業所有の海底炭鉱が多かった
未さんBCは戦争当時造船所と航空機製作所などを運営した軍需業社だ
日本人学者竹内ヒロヤスが使った “ミスビシ財閥による強制連行 戦時 労動に対して ” を見れば
ミスビシは 1939年以後にも韓国人を最小 10万名を強制に徴用したと言う
ミスビシは日本韓半島だけでなく東南であってミット路ネシアサハリンなど作業場を 125ヶ所を置いた
韓国人労務者たちは賃金(賃金)をまともに受け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し 苛酷な労動に苦しんだし虐待受けた
事故疾病などで死亡してもこれを隠したりした
長崎ミスビシ炭鉱高島 (高島) 鉱業所で死亡した表象だけさんの死亡通知書
これは 1971年 6月 10日に発給された韓国人強制徴用者表象だけさんの死亡通知書なのに
1942年に落盤事故で死亡したという証明書を .,( 彼の遺族と日本市民団体努力で ) 1971年に発給受けた
日本国立文書官筑波分館に保管された労動省の調査の
“韓国人労務者未払い 賃金 債務組” (1950年 10月 6日)によれば
韓国人労務者などに支給しない 賃金を供託形態で日本法務省に任せた企業の中にミスビシが 1万 935人で
一番多かった
ミスビシ重工業長崎造船所は韓国人 406人の方が給料退職金など 85万 9770円を供託した
がお金は日本銀行に預置されている
1945年 8月アトミックボムが投下された広島長崎に韓国人が 7万名が居住していたしこの中に 4万名が
被害を被った
韓国人労務者はミスビシ造船所で 4700人高島炭鉱に 3500人位いたが正確な被害事例は
ミスビシは戦争以前の事は現在会社と別個で
1965年韓日協定で個人請求権が消滅したと主張している
高島(高島)にはミスビシ主導で海底炭鉱がたくさん開発されていた
この島はセメントを埋め立てて 3個の島を引き続き付けたことになさるよ (端島)島より規模がもっと大きい
が島でひかれて来た韓国人は 4000人位になった
労務者の中に溺死圧死病死した韓国人労務者たちの死骸が島一方に埋め立てされた
ミスビシ側では事業者位牌を焼却してしまって韓国人遺骨がどの位かわからないと言う
1988年高島炭鉱が閉鎖して遺骨の一部をキンソだ (金松寺)に移して残りは遺骨は
供養塔の下埋め立てたと言う
今は供養塔でありなさいという名前で碑石の残っているのに現在は供養塔に行く永遠に閉鎖されている
金松寺 側はミスビシが分かっているでしょうと返事したし
ミスビシ側は長崎は分かっているでしょうと返事するなど日本はそっぽを向いてい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