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철도를 타고 일본인들이 한국으로 몰려 오고 있었다
서울 충무로 일대
서울 충무로 일대 일본인 거류지역
일본인들은 1904년 러일전쟁 전후로 한국으로 급속하게 몰려 오고 있었다
1880년대 인천
일본인 거류민 지역
1883년 일본제1은행 인천 출장소 개설 되었다
1878년 국내 최초의 서구식 은행이 부산에 들어서고 후에 원산 인천에 출장소가 설치된 것
이 은행들은 조선에서 활동하는 일본 상인들을 지원하여 산업자본과 고리대금 자본을 육성하고
토지구입 자금을 공급하고 있었다
일본제1은행 인천 출장소의 주요업무는 조선의 金을 매입하여 해관세를 취급하는 것
1895년 청일전쟁 후 조선은 세수 감소로 재정적 타격을 받아 일본으로 부터 30만원 300만원
차관을 도입하였다
1896년 조선은 일본으로 부터 차관으로 도입한 500만원을 갑오개혁 이후에 계속된 내정개혁으로
사용하였고 나머지 200만원은 경인철도 부설에 사용할 계획이었으나 고종의 러시아 아관파천으로
실패하였다
이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반도에서 영향력이 커지고 차관을 제멋대로 들여왔다
화폐정리 자금으로 일본의 제일은행으로 부터 들어온 300만원을 재정고문으로 왔던 메가다의
주관 아래 조선의 조폐창인 전환국을 폐쇄하고 일본의 조폐국에서 돈을 만들어 원래 쓰고 있던
백동화를 바꾸는데 사용하였다
백동화의 유통문제는 있지만 화폐정리 자체가 일본의 침략목적으로 실시되었기 때문에
실업계의 공황이 일어나 상인들은 상점문을 닫고 도망가거나 자실하는 등 당시 조선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특히 일제는 대한제국에 관세를 담보로 천만원 차관을 강요해 국채와 차입금 등 명목으로 도입된
차관액이 1907년 1300만원이었다
한일협약 이후 1906년까지 4회에 걸쳐 1.150만원 차관을 도입하였다
1차 -1905년 폐정리자금채 라는 명목으로 해관세를 담보로 300만원 도입하였다
2차—1905년 6월 대한제국 정부의 부채정리와 재정융통에 필요한 자금 명목으로 대한제국
국고금을 담보로 200만원 도입하였다
3차- 1905년 12월 대한제국 토착자본을 일본 자금에 예속시키는 목적으로 금융자금채
150만원을 도입하였다
4차- 1906년 3월 기업자금채 명목으로 500만원을 도입하였다
京釜鉄道に乗って日本人たちが韓国に群がって来ていた
ソウル忠武路一帯
ソウル忠武路一帯日本人居留地域
日本人たちは 1904年露日戦争前後で韓国で急速に群がって来ていた
1880年代仁川
日本人居留民地域
1883年和製1銀行仁川支所開設になった
1878年国内最初の西欧式銀行が釜山に立ち入って後に原産仁川に支所が設置されたこと
が銀行は朝鮮で活動する日本商人たちを支援して産業資本と高利貸金資本を育成して
土地購入資金を供給していた
和製1銀行仁川支所の主な業務は朝鮮の 金を買い入れて海関世を扱うこと
1895年日清戦争後朝鮮は税収減少で財政的打撃を受けて日本から 30万ウォン 300万ウォン
次官を取り入れた
1896年朝鮮は日本から次官で取り入れた 500万ウォンを甲午改革以後に続いた内政改革で
使ったし残り 200万ウォンは 京人鉄道敷設に使う計画だったが高宗のロシア俄館播遷で
失敗した
以後露日戦争で勝利した日本は韓半島で影響力が大きくなって次官を自分勝手に持ちこんだ
貨幤整理資金で日本の第一銀行から入って来た 300万ウォンを財政顧問で来たメガ多義
主観の下朝鮮の造幤局である転換国を閉鎖して日本の造幤局で お金を作って元々使っていた
白銅貨を変えるのに使った
白銅貨の流通問題はあるが貨幤整理自体が日本の侵略目的に実施されたから
実業界の恐慌が起きて商人たちはサングゾムムンを閉めて逃げだすとか自失するなど当時朝鮮経済に
大きい打撃を与えた
特に日帝は大韓帝国に関税を担保で千万ウォン次官を強要して国債と借入金など名目で導入した
次官額が 1907年 1300万ウォンだった
韓日協約以後 1906年まで 4回にわたって 1.150万ウォン次官を取り入れた
1次 -1905年閉廷里者錦采という名目で海関世を担保で 300万ウォン取り入れた
2次 --1905年 6月大韓帝国政府の団扇整理と財政融通に必要な資金名目で大韓帝国
国庫金を担保で 200万ウォン取り入れた
3次- 1905年 12月大韓帝国土着資本を日本資金に隷属させる目的に金融者錦采
150万ウォンを取り入れた
4次- 1906年 3月 企業者錦采名目で 500万ウォンを取り入れ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