開城 남대문. 開城은 고려의 도읍이었는데 원래 궁궐 주위에만 宮城, 皇城이 있었으나 거란 침입 이후 20km 넘는 길이의 外城을 쌓는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시기 內城을 쌓는데 남대문은 內城의 남쪽 문이다.
고려시대 開城 중심부에는 103m의 자남산이 있다. 송악산과 자남산에 소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開城은 松都라고 불렸다. 지금 이 산에는 김일성 동상이 있는데 현재 開城의 도시 중심축은 이 동상 앞에 있는 도로를 센터로 하고 있다. 멀리 보이는 큰 현대 건축물은 학생들이 방과 후에 교육을 받는 학생소년궁전이다.
1911년에 발행된 사진집의 開城의 모습으로 위의 사진과 같은 장소이다.
자남산에서 서북쪽을 바라본 풍경. 사진에 잘렸지만 오른쪽 끝에는 고려의 궁궐 터가 있다.
남대문에서 북쪽으로 나있는 길이 조선시대의 開城의 중심 주거구역으로 지금도 기와집들이 남아있다. 현대에 와서 개조된 집도 섞여 있다.
하천을 끼고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3번째 사진의 산 위에 있는 동상이 김일성 동상이다. 기와 지붕이 아닌 지붕도 보이는데 이것은 얇게 쪼개지는 성질이 있는 점판암으로 만든 지붕으로 開城 등 일부 지역에서 많이 사용한 지붕이다.
100년 전의 開城의 주택가. 이 하천은 이름이 배천인데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가 여러 지류가 합쳐진 沙川이 되어 동쪽으로 흘러간다.
북한은 80년대 민가 여러 채를 이용하여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민속여관을 만들었다.
민속여관은 3개 등급의 방이 있다. 가운데 배천이 흘러 산책을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주변의 민가와는 담장을 둘러 격리되어 있다. 開城은 예로부터 음식으로 유명한 도시였는데 이 여관에서는 여러 음식을 제공한다. 사진은 13첩 반상기인데 그냥 여기의 한정식이라고 보면 된다.
開城의 주택가의 골목길. 이곳의 집은 서울의 집과 비슷하게 벽이 벽돌과 화강암 돌로 쌓은 것이 많다.
예전부터 開城은 인삼이 유명하고 상업에 종사하는 상인이 많았기 때문에 밖으로 떠돌아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다른 지방보다 자물쇠가 튼튼하고 겹겹이 차단된 구조였다고 한다.
開城 南大門. 開城は高麗の都邑だったが元々宮廷周りにだけ 宮城, 皇城があったがんと言う(のは)侵入以後 20km 超える長さの 外城を積む. 高麗で朝鮮に移る時期 内城を積むのに南大門は 内城の南側門だ.
高麗時代 開城 中心部には 103mのザナムサンがある. 松岳山とザナムサンに松が多かったから 開城は 松都と呼ばれた. 今この山には金一性銅像があるのに現在 開城の都市中心軸はこの銅像の前にある道路をセンターにしている. 遠く見える大きい現代建築物は学生たちが放課後に教育を受ける学生少年宮殿だ.
1911年に発行された写真集の 開城の姿で上の写真のような場所だ.
ザナムサンで西北の方を眺めた風景. 写真に切られたが右側末には高麗の宮廷敷地がある.
南大門で北に出ている永遠に朝鮮時代の 開城の中心住居区域で今も瓦の家たちが残っている. 現代に来て改造された家もまじている.
河川をはめて村が形成されている. 3番目写真の山の上にある銅像が金日成銅像だ. 瓦屋根ではない屋根も見えるのにこれは薄く割れる性質がある粘板岩で作った屋根で 開城 など一部地域でたくさん使った屋根だ.
100年前の 開城の住宅街. この河川は名前が白川なのに北で南に流れて多くの支流が合された 沙川になって東に流れる.
北朝鮮は 80年代民家多くの軒を利用して外国人観光客のための民俗旅館を作った.
民俗旅館は 3個等級の部屋がある. 中白川が流れて散歩ができるようになっている. 周辺の民家とは垣根をかけて隔離されている. 開城は昔から食べ物で有名な回ったがこの旅館では多くの食べ物を提供する. 写真は 13包み飯床器なのにそのままここの韓定食だと見れば良い.
開城の住宅街の横町. こちらの家はソウルの家と似ているように壁が煙瓦とお影石石で積んだことが多い.
かつてから 開城は高麗人参が有名で商業に携わる商人が多かったからの外でさすらう場合が多かった. それで他の地方より錠が丈夫で畿重にも遮られた構造だったと言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