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1906년 조선에 통감부가 설치되었다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은 시설자금 1.150만원 대부분을 일본인 거류민 시설 경찰기구 확충

등 통감부의 자의적 용도로 소비해 버렸다

 

일제의 차관공세는 조선 정부와 민간의 경제적 독립을 위협하는 것으로 조선의 토착 자본을

일본의 차관에서 벗어나기 위한 운동이 전개되었다

 

1907년 1월30일  대구에서 일어나 전국으로 퍼진 국채보상운동은 국채를 갚는 국권수호운동이었다

 

대구 광문사 [廣文社]사장 김광제 [金光濟] 부사장 서상돈 [徐相敦]은 국채를 갚아 나가자 라는

취지의 국채보상운동을 제창하였다 김광제 서상돈은 [대한매일신보]에서 

 

국채1300만원은 바로 우리 대한제국의 존망에  직결되는 것으로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인데

국고로 해결할 도리가 없어 2000만 인민들이 3개월 동안 흡연을 금하고 그 대금으로 국고를 갚아

국가를 위기에서 구하자 ......

라고 취지를 밝혔다

 

민회소 [民會所]를 설립해 모금운동을 벌이고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만세보 등

신문으로 국채보상 운동에 대한 켐페인을 벌여  각계각층의 호응이 일어났다

 

 

 

 

여인들은 머리에 비녀를 빼고 의연금으로 보내고

충주군 경무서 죄수들은  짚신을 삼고  모은 돈 6원 60전을 대한매일신보에 보내왔고

일본의 유학생들은 금연 금주로 모은 돈을 보내기도 하는 등 국내외적으로

운동은 확산되고 있었다

이 운동을 추진해 왔던 중심은 대한매일신보의 양기탁과 영국인 베델 [bethell]이었다

 

1907년 4월에서 5월까지 230만원을 모았고 12월까지 활발하게 의연금을 모았다

 

국채보상 운동은 국권수호운동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위기를 느낀 일본은

이 운동의 중심 양기탁을 횡령혐의의 누명을 씌우고 채포하였고 영국인 베델은

 1908년 5월 3주의 금고와 벌금형을 내리고 국외로 추방하였다

양기탁은 증거불충분으로 무죄석방 되었지만

 운동을 체계적으로 지휘하지 못했고 일제의 탄압과 방해에 체계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여

 

좌절되어 버렸다

 

국가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국민이 자발적으로 일어난 애국운동으로 이 국채보상운동은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제는 1906년 조선에 통감부를 설치한 이후 언론 통제에 들어갔다

대한매일신보는 양기탁이 영국인 베델을 발행인으로 내세워 운영했기 때문에 일제의 간섭으로

부터 피하고 있었다

당시 통감부 문서에 의하면 국한문 7500부 한글 4500부 영문 500부 등 합계 1만 2500부로

당시로서는 대단한 부수였다

1908년 당시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는 외부대신 하야시 다다스에게 보낸 電文에서

대한매일신보 [大韓每日申報]를 그대로 두면 치안유지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우려가 있다

라고 전하며

외국에서 발행하는 한국어 신문 또는 외국인이 국내에서 발행하는 한국어 신문으로 치안유지를

방해한다 라고 판단되면 내무대신이 발매 및 반포를 금하고 그 신문은 압수할 수 있다

라는 이른바 광무신문지법 [光武新聞紙法]제 34조로 벌칙을 정한다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것은 대한매일신보의 영향이 컸기 때문에 일제는

대한매일신보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주한 영국총사 코크번 에게 베델을 처벌하라는 소송장을 내는 등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일제는 국채보상금 횡령이라는 누명을 씌우고 베델을 국외로 추방하였다

 

 

일제가 조사한 국채보상금 현황 1907년 8월 22일

 

 

양기탁

 

1908년 5월 베델이 국외로 추방되고 같은 해 7월12일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경성지방법원  1908년 8월31일을 1차 공판으로 9월29일 5차 공판을 열렸다

3차공판 9월15일

증인으로 나온 베델은  자신과 양기탁은 횡령한 사실이 없고 양기탁은 어떤 책임도 없다 라고

증언하였다

4차공판 9월26일

양기탁은 진술에서 나는 3만원을 흘므링거 회사로 이체한 것은 알고 있으나 주식구입에 대해서는

모른다 라고 진술했다

5차공판 9월29일

논고를 요구받은 일본인 검사는 양기탁은 의연금을 횡령한 증거가 없고 그 처분에 관한 책임은

전적으로  베델에게 있으므로 공소를 취하하고 무죄석방을 요청한다 라고 논고하였다

 

 

 

대구광역시 국채보상운동 기념관

 

 


国債保償運動

 

 

1906年朝鮮に統監府が設置された

朝鮮の外交権を剥奪した日本は施設資金 1.150万ウォン大部分を日本人居留民施設警察期で拡充

など統監府の恣意的用途で消費してしまった

 

日製の次官攻勢は朝鮮政府と民間の経済的独立を脅威することで朝鮮の土着資本を

日本の次官から脱するための運動が展開された

 

1907年 1月30日  大邱で起きて全国で広がった国債保償運動は国債を返す国権守護運動だった

 

代で広問社 [広文社]社長金広済 [金光済] 副社長ショ・サンドン [徐相敦]は国債を返して行こうという

主旨の国債保償運動を提唱した金広済ショ・サンドンは [大韓毎日新報]で 

 

国債1300万ウォンはまさに私たち大韓帝国の存亡に  直結されることで返すことができなければ国が亡びるはずなのに

国庫で解決する道理がなくて 2000万人民たちが 3ヶ月の間喫煙を禁じてその代金で国庫を返して

国家を危機で求めよう ......

と主旨を明らかにした

 

閔会所 [民会所]を設立して募金運動をして大韓毎日新報黄城新聞帝国新聞万歳報など

新聞で国債補償運動に対するケムペインをして  各界各層の呼応が起きた

 

 

 

 

女人たちは頭にかんざしを抜いて義捐金に送って

忠州だね警務で罪囚たちは  草履を三考  溜めたお金 6ウォン 60銭を大韓毎日新報に送ったし

日本の留学生たちは禁煙今週に溜めたお金を送ったりするなど国内外的に

運動は拡散していた

が運動を推進して来た中心は大韓毎日新報の梁起鐸とイギリス人ベセル [bethell]だった

 

1907年 4月から 5月まで 230万ウォンを集めたし 12月まで活発に義捐金を集めた

 

国債補償運動は国権守護運動で  展開されたから危機を感じた日本は

が運動の中心梁起鐸を横領疑いの濡れ衣を着せて菜圃したしイギリス人ベセルは

 1908年 5月 3週の金庫と罰金刑を下げて国外で放逐した

梁起鐸は証拠不十分で無罪釈放になったが

 運動を体系的に指揮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し日帝の弾圧と邪魔に体系的に対応することができなくて

 

挫折されてしまった

 

国家を危機で求めるために国民が自発的に起きた愛国運動にこの国債保償運動は

歴史的意義があると思います

 

日帝は 1906年朝鮮に統監府を設置した以後言論統制に入って行った

大韓毎日新報は梁起鐸がイギリス人ベセルを振出人で立てて運営したから日製の干渉で

から避けていた

当時統監府文書によると国漢文 7500部ハングル 4500部英文 500部など合計 1万 2500部に

当時としてはすごい壊した

1908年当時痛感だった伊藤博文は外部大臣Hayashiダダスに送った 電文で

大韓毎日新報 [大韓毎日申報]をそのまま置けば治安維持に重大な影響を  及ぼす恐れがある

と伝えて

外国で発行する韓国語新聞または外国人が国内で発行する韓国語新聞で治安維持を

邪魔すると判断されれば内務代わりが発売及び頒布を禁じてその新聞は押収することができる

といういわゆる光武新聞地方法院 [光武新聞紙法]第 34条で罰則を決める

 

国債保償運動が全国的に拡散したことは大韓毎日新報の影響が大きかったから日製は

大韓毎日新報を弾圧し始めた

在韓イギリス銃士コクボンにベセルを処罰しなさいという訴訟状を出すなど

虎視消消と機会を狙った日製は国債補償金横領という濡れ衣を着せてベセルを国外で放逐した

 

 

日製が調査した国債補償金現況 1907年 8月 22日

 

 

梁起鐸

 

1908年 5月ベセルが国外に追放されて同じ年 7月12日日本警察に逮捕した

 

京城地方法院  1908年 8月31日を 1次公判で 9月29日 5次公判を開かれた

3チァゴングパン 9月15日

証人で出たベセルは自分と梁起鐸は横領した事実がなくて梁起鐸はどんな責任もないと

証言こんにちはだった

4チァゴングパン 9月26日

梁起鐸は陳述で私は 3万ウォンをフルムリングゴ会社に振込みしたことは分かっているが株式購入に対しては

分からないと述べた

5チァゴングパン 9月29日

論告を要求受けた日本人検事は梁起鐸は義捐金を横領した証拠がなくてその処分に関する責任は

全面的に  ベセルにあるので公訴を取下げして無罪釈放を要請すると論告こんにちはだった

 

 

 

大邱広域市国債保償運動記念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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