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関東大震災朝鮮人虐殺

 

 

 

キミツクニチ (87歳) 証言

 

軍隊で朝鮮人を与えると受けに来なさいと連絡が各村に下逹されたが村自警団が

6人を受けて来ました朝鮮人は銃殺をさせて甘いと言ったがお酒を飲むようにして目を覆った後

竹窓で突きましたその後に大きい窪みをほって投げたが後にはお互いに延ばしてから

その次の朝鮮人は従兄が鉄砲でうちました

 

が外に

 

証言と一致する証拠も発見された

 

 

日本軍人たちが一斉に刀を選んで朝鮮人 83人をいっぺんに殺したしこの時姙娠した奥さんが

あったがその奥さんのお腹を割る時幼い赤んぼうが出たその幼い赤んぼうも突いて殺した

 

朝鮮人虐殺当時東京 江東  仮メイも (亀戸) 警察署で恣行された虐殺を記録した証言と

一致する犠牲者たちの身元と遺族が確認された

 

犠牲者を追跡した結果済州島大火邑人性里出身のゾミョソング (趙卯松 当時 32歳 ) 彼の弟(妹)

正昭 23歳 正化19歳妻 文戊連 38歳息子 泰錫 4歳一家族 5人が仮メイも警察署で

皆殺しされたことで現われた

また姙娠した状態で殺害された奥さんは妻 文氏だった

 

が証言の記録は当時仮メイも (亀戸)警察署から朝鮮語通訳で働いたナファンサン (羅丸山)

氏が目撃したことを当時日本留学の中だったツェスングだけ (崔承万)さんが 羅氏の目撃談を聞いて

文で残したことだ

 

崔の文には 羅氏が仮メイも警察署演舞場で先に殺害した 3人含み 86人の朝鮮人を銃刀で

でたらめにうってベア殺すのを直接見たと言ったことで出た

 

 当時独立新聞には 亀戸 警察署演舞場で騎兵 23連帯いわゆる 田村によって朝鮮人 86人虐殺

になったと書いた

ところで遺族に会って確認した結果 3人ではない 5人の一家族が虐殺されたことで出た

系図には犠牲された 趙氏5人皆

1923年 9月1日日本国関東地震の時錫牲されるという記録とともに

1923年日本国関東地震日本国政府蛮行によって虐殺されると手で書いた文が書かれている

 

 

地震発生後 2日に東京とその隣接 5軍に戒厳令が包告される

9月 2日午前 10時頃から朝鮮人を殺しても良いとと多くの地球儀警察署長が諸所で

言っていたと言う朝鮮人を殺しても良いという言葉を聞いた人も多くて証言もある

 

虐殺過程で日本人と朝鮮人を区別するため

15円 15強いと発音をするようにさせたと言う

濁音の連続で朝鮮語には濁音がないということを一般日本人がどう分かっただろうか?

 

15円 15強いと言うように指示したことは日本の官憲たちだった

 

これの証拠で多くの文書があるのに

大正 2年 (1913年) 韓国を竝合して 3年が  経った時作成された (朝鮮人識別  資料に関する )

という文書があった

 

が文書は内務省警報国が警察官庁窓口で朝鮮人を識別するための情報に作成された文書だ

 この文書によると

朝鮮人は言語上 発音に濁音は困る ...など内容がある

 水野連太郎は  地震当時内務代わりだったがこの人間は 3.1運動当時朝鮮総督府の最高指揮官

軽視総監だった

 

当時日本の政治権や軍部には

日本侵略に抵抗した義兵 7年の血生臭いがする戦争 3.1運動間島惨変など朝鮮を

経験した 者らが多かった

特に 3.1運動に対しては当時日本の新聞で暴徒たちの放火独立の陰謀暗殺という

否定的意味で報道されたから日本民衆たちは朝鮮人は残忍で恐ろしいという偏見を持つように

になったことだこのような偏見はデマが伝えて同時にデマを信じてしまった結果で現われた

 

 

1923年 11月 14日

千葉支材で開かれた千葉県ハがシカスキだねウラヤスゾングで  朝鮮人虐殺日本人誤殺事件の

どの被告人は一刀のもとにベア殺したが国家を思ったからだと述べた

 

 

1923年 9月 5日臨時震災事務局警備(経費)部に各方面の役人たちが集まって朝鮮人虐殺問題に関して

外部官憲が採択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を議論して次のように決めた

1. 風雪を徹底的に調査してこれを事実で肯定的に努力すること

2. 風雪宣伝の根拠を充分に調査すること

 

これは朝鮮人暴動などデマが一部事実だったということで国家的責任を隠蔽しようとする

決定だった

 

1923年 10月 20日朝鮮人に対する報道が解禁された後司法省は一部不逞 鮮人の犯罪が

事実だったと発表する

 

 

 

 

これを一部日本人たちが朝鮮人の暴動は事実だったという証拠で提示している

 

 

それでは司法省で作成した  朝鮮人犯罪容疑者実態を見ましょう

 

日本司法部が調査した朝鮮人犯罪容疑者

容疑者は裁判判決の前まで犯罪者ではない

......................................................................................................................

 

1. 罪目 : デマ放火脅迫強盗公務執行邪魔殺人橋梁破壊節度毒殺予備

総 20件人数 85人‾86人

全員 声明(名前)未詳素材不明

....................................................................................................................

 

2. 罪目 : 強盗

総1件人数 30人

声明(名前)判明された 1人は素材不明その外 29人皆声明(名前)未詳素材不明

..................................................................................................................

 

3. 罪目: 強盗 強姦 1人殺人未遂 2人

総 3件人数 4人

声明(名前)判明されているが皆素材不明逃亡死亡

......................................................................................................................

 

4.罪目:爆発物取り扱い規則違反 1人 ...強盗 1人.... 銃砲火薬取り扱い変則違反 1人

総 3件人数 3人

 

ここで起訴された人は爆発物違反件で裁判で有罪判決受けたが

事実上犯罪と思いにくいと思う

トラックで寝ていた時周辺にダイノマイトがあったということなのに  そのダイノマイトは

工事現場の品物なので ...

........................................................................................................................

 

5.罪目 : 節度 11件横領 1件節度横領 2件臓物運び違反 1件

総 15件人数 16人

...........................................................................................................................

 

容疑者総 138人から 139人

その中に 119人から 120人は声明(名前)未詳載せるとか素材不明だしたがって信憑性ない

 

それでは 19人残って実際に起訴された  朝鮮人は 12人に過ぎない

節度節度横領 10件爆発物違反 1件

 

東京裁判府が 1923年 9月1日から 11月 30日まで受け付けた節度件は皆  4.409件と言う

 

1923年大震災後国際赤十字で朝鮮人虐殺犠牲者規模に対する真相糾明の調査活動を

したがこの活動に対して日本政府は朝鮮人虐殺現況を多様な方法で隠蔽したと言う

 

埼玉混調警察署巡使アリア健司では警察署を襲った自警団が 9月 4日から 5日朝に

かけて虐殺した朝鮮人を燃やす時に  数字をわからないようにしなさいという命令を受けたと証言する

 

軽視総監は  1923年 11月 6日から内務省警報局長の前の報告書に

在日本関東地方 罹災 朝鮮同胞慰問組 >という名前で朝鮮人虐殺状況を調査していた

調査団の  朝鮮人ユーゴを引受方法の申し込みに対して断ったと報告した

が調査団によれば朝鮮人虐殺者 6661人の中に  3.240人は死骸も捜すことができない

同胞と記録した (独立新聞 1923年 12月 5日 )

 

が 6661人の朝鮮人犠牲者は地震による犠牲者ではなく虐殺による犠牲者だ

 

 

朝鮮人虐殺行動を見れば東京の場合軍隊による虐殺が多くて横浜の場合自警団に

の一虐殺が多い

横浜の場合自警団による虐殺の多いのに警察が動員されて民衆たちに自警団を

組織するようにして朝鮮人を虐殺した所だ

 

デマを言いふらしたことから虐殺まで日本政府が関与していた

 

朝鮮総督府軽視総監出身の内務代わり 水野連太郎

総督府  警務局長出身の  赤池濃

内務省警報局長 後藤文夫

 

が 3人がデマの張本人だ

 

 

 


일본 정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

간토 대지진 한국인 학살

 

 

 

키미츠 쿠니치 (87세) 증언

 

군대에서 한국인을 준다고 받으러 오라고 연락이 각 마을에 하달되었는데 마을 자경단이

6명을 받아왔습니다 한국인은 총살을 시켜 달라고 했는데 술을 마시게 하고 눈을 가린 뒤

죽창으로 찔렀습니다 그 뒤에 큰 구덩이를 파고 던졌는데 나중에는 서로 미루다가

그 다음 한국인은 사촌형이 총으로 쏘았습니다

 

이 외에

 

증언과 일치하는 증거도 발견되었다

 

 

일본 군인들이 일제히 칼을 뽑아 한국인 83명을 한꺼번에 죽였으며 이 때 임신한 부인이

있었는데 그 부인의 배를 가를 때 어린 아기가 나왔다 그 어린 아기도 찔러 죽였다

 

한국인 학살 당시 도쿄 江東 가메이도 (龜戶) 경찰서에서 자행된 학살을 기록한 증언과

일치하는 희생자들의 신원과 유족이 확인되었다

 

희생자를 추적한 결과 제주도 대정읍 인성리 출신의 조묘송 (趙卯松 당시 32세 ) 그의 동생

正昭 23세 正化19세 아내 文戊連 38세 아들 泰錫 4세 일가족 5명이 가메이도 경찰서에서

몰살된 것으로 드러났다

또 임신한 상태에서 살해당한 부인은 아내 文氏였다

 

이 증언의 기록은 당시 가메이도 (龜戶)경찰서에서 조선어 통역으로 일했던 나환산 (羅丸山)

氏가 목격한 것을 당시 일본 유학 중이던 최승만 (崔承萬)씨가 羅氏의 목격담을 듣고

글로 남긴 것이다

 

崔의 글에는 羅氏가 가메이도 경찰서 연무장에서 먼저 살해한 3명 포함 86명의 한국인을 총칼로

마구 쏘고 베어 죽이는 것을 직접 보았다 라고 말한 것으로 나왔다

 

 당시 독립 신문에는 龜戶 경찰서 연무장에서 기병 23연대 소위 田村에 의해 한국인 86명 학살

되었다고 썼다

그런데 유족을 만나 확인한 결과 3명이 아닌 5명의 일가족이 학살된 것으로 나왔다

족보에는 희생된 趙氏5명 모두

1923년 9월1일 일본국 관동 지진 때 희생당함 이라는 기록과 함께

1923년 일본국 관동 지진 일본국 정부 만행에 의해 학살당함 이라고 손으로 쓴 글이 적혀있다

 

 

지진 발생 후 2일에 도쿄와 그 인접 5군에 계엄령이 포고된다

9월 2일 오전 10시 무렵 부터 한국인을 죽여도 좋다고 라고 여러 지구의 경찰 서장이 도처에서

말하고 있었다고 한다 한국인을 죽여도 좋다 라는 말을 들은 사람도 많고 증언도 있다

 

학살 과정에서 일본인과 한국인을 구별하기 위해

15엔 15센 이라고 발음을 하도록 시켰다고 한다

탁음의 연속으로 조선어에는 탁음이 없다 라는 것을 일반 일본인이 어떻게 알았을까?

 

15엔 15센 이라고 말하게 지시한 것은 일본의 관헌들이었다

 

이것의 증거로 여러 문서가 있는데

다이쇼 2년 (1913년) 한국을 병합하고 3년이  지났을 때 작성된 (한국인 식별  자료에 관한 건 )

이라는 문서가 있었다

 

이 문서는 내무부 경보국이 경찰 관청 창구에서 한국인을 식별하기 위한 정보로 작성된 문서다

 이 문서에 의하면

한국인은 언어上 발음에 탁음은 곤란하다 ...등 내용이 있다

 水野連太郞은  지진 당시 내무대신이었는데 이 인간은 3.1운동 당시 조선 총독부의 최고 지휘관

경시총감이었다

 

당시 일본의 정치권이나 군부에는

일본 침략에 저항했던 의병 7년의 피 비린내나는 전쟁 3.1운동 간도 참변 등 조선을

경험한 者들이 많았다

특히 3.1운동에 대해서는 당시 일본의 신문으로 폭도들의 방화 독립의 음모 암살 이라는

부정적 의미로 보도되었기 때문에 일본 민중들은 한국인은 잔인하고 무섭다 라는 편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편견은 유언비어가 전파되고 동시에 유언비어를 믿어 버린 결과로 나타났다

 

 

1923년 11월 14일

지바지재에서 열린 지바현 하가시카쓰키군 우라야스정에서  한국인 학살 일본인 오살 사건의

어느 피고인은 단칼에 베어 죽였는데 국가를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진술하였다

 

 

1923년 9월 5일 임시 진재 사무국 경비부에 각 방면의 관리들이 모여 한국인 학살 문제에 관해

외부 관헌이 채택해야 할 것을 의논하고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1. 풍설을 철저히 조사하고 이것을 사실로 긍정적으로 노력할 것

2. 풍설 선전의 근거를 충분히 조사할 것

 

이것은 한국인 폭동 등 유언비어가 일부 사실이었다는 것으로 국가적 책임을 은폐하려는

결정이었다

 

1923년 10월 20일 한국인에 대한 보도가 해금된 후 사법성은 일부 불령 鮮人의 범죄가

사실이었다고 발표한다

 

 

 

 

이것을 일부 일본인들이 한국인의 폭동은 사실이었다는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면 사법성에서 작성한  한국인 범죄 용의자 실태를 봅시다

 

일본 사법부가 조사한 한국인 범죄 용의자

용의자는 재판 판결 전까지 범죄자는 아니다

......................................................................................................................

 

1. 죄목 : 유언비어 방화 협박 강도 공무집행 방해 살인 교량파괴 절도 독살예비

총 20건 인원수 85명~86명

全員 성명미상 소재불명

....................................................................................................................

 

2. 죄목 : 강도

총1건 인원수 30명

성명판명된 1명은 소재불명 그 외 29명 모두 성명미상 소재불명

..................................................................................................................

 

3. 죄목: 강도 强姦 1명 살인미수 2명

총 3건 인원수 4명

성명 판명되고 있으나 모두 소재불명 도망 사망

......................................................................................................................

 

4.죄목:폭발물 취급 규칙 위반 1명 ...강도 1명.... 총포화약 취급 변칙 위반 1명

총 3건 인원수 3명

 

여기서 기소된 사람은 폭발물 위반 건으로 재판에서 유죄 판결받았는데

사실상 범죄라고 보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트럭에서 자고 있었을 때 주변에 다이너마이터가 있었다는 것인데  그 다이너마이터는

공사현장의 물건이므로 ...

........................................................................................................................

 

5.죄목 : 절도 11건 횡령 1건 절도횡령 2건 장물 운반 위반 1건

총 15건 인원수 16명

...........................................................................................................................

 

용의자 총 138명에서 139명

그 중에 119명에서 120명은 성명미상 이거나 소재불명이다 따라서 신빙성 없다

 

그러면 19명 남는다 실제로 기소된  한국인은 12명에 불과하다

절도 절도횡령 10건 폭발물 위반 1건

 

도쿄 재판부가 1923년 9월1일 부터 11월 30일까지 접수한 절도 건은 모두  4.409건 이라고 한다

 

1923년 대지진 후 국제적십자에서 한국인 학살 희생자 규모에 대한 진상규명 조사 활동을

하였는데 이 활동에 대해 일본 정부는 한국인 학살 현황을 다양한 방법으로 은폐했다고 한다

 

사이타마 혼조 경찰서 순사 아리아 겐지로는 경찰서를 습격한 자경단이 9월 4일 부터 5일 아침에

걸쳐 학살한 한국인을 불태울 때에  숫자를 알 수 없도록 하라 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증언 한다

 

경시총감은  1923년 11월 6일 부터 내무성 경보국장 앞의 보고서에

在일본 관동 지방 罹災 조선동포 위문반 >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인 학살 상황을 조사하고 있던

조사단의  한국인 유골 인수 방법의 신청에 대해 거절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이 조사단에 따르면 한국인 학살자 6661명 중에  3.240명은 시체도 찾을 수 없는

동포라고 기록하였다 (독립신문 1923년 12월 5일 )

 

이 6661명의 한국인 희생자는 지진에 의한 희생자가 아니라 학살에 의한 희생자이다

 

 

한국인 학살 행태를 보면 도쿄의 경우 군대에 의한 학살이 많고 요코하마의 경우 자경단에

의한 학살이 많다

요코하마의 경우 자경단에 의한 학살이 많은데 경찰이 동원되어 민중들에게 자경단을

조직하게 하여 한국인을 학살한 곳이다

 

유언비어를 퍼뜨린 것 부터 학살까지 일본 정부가 관여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 경시총감 출신의 내무대신 水野連太郞

총독부  경무국장 출신의  赤池濃

내무성 경보국장 後藤文夫

 

이 3人이 유언비어의 장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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