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国号の名乗りはどうして遅くなったのか。
新唐書
原文:「日本,古倭奴也。・・・・・・・
其王姓阿每氏,自言初主號天御中主,至彥瀲,凡三十二世,皆以「尊」為號,居築紫城。彥瀲子神武立,更以「天皇」為號,徙治大和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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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亨元年,遣使賀平高麗。後稍習夏音,惡倭名,更號日本。使者自言,國近日所出,以為名。或云日本乃小國,為倭所並,故冒其號」
訳文:日本は古の倭奴(わな)国である。・・・・・・・
国王の姓は阿毎(あめ又はあま)氏である。その国王が自ら言うには、初代の国王は天御中主(あめのみなかぬし)と名乗り、彦瀲(ひこなぎさ)に至るまで、およそ三十二代とされている。彼らは皆、尊(みこと)を尊称として、筑紫城に存在していた。(そして)彦瀲の子の神武(じんむ)が継ぎ立ち、あらためて天皇を名乗り、大和州に移り住んでその地を治め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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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亨(かんこう)元年(670年)、日本は唐に使者を遣わして、唐が高麗を平定したことを慶賀した。その後、日本人は中国の発音に習熟して、倭の呼び名を嫌い、あらためて日本と改号した。
(その点について)使者が自ら言うには、「わが国が、太陽の出る所に近いので、それで国名とした」と。或いはこうも云っている。「日本国はもと小国だったので、倭国がこれを併合することになった。その結果、倭国はその日本という国号を奪ったのだ」と。
これより、日本国は、歴史書に載る前に倭国とは別に古くから列島にあったことがわかる。
それでは、なぜ聖徳太子は「日本」ではなく、「日出処」との文書を中国に送ったのだろうか。
それは、日本が天皇の万世一系の国であるとの建前に対して、当時がそうではなかったからである。
つまり、蘇我氏の存在である。
豪族が力を持っていれば、部族連合の国ということになり、中国に対して示しがつかないのである。
しかし、645年 力のあった蘇我氏本家は、乙巳の変で滅亡した。
それから、体制を整備して、晴れて670年日本国の名乗りとなったのである。
百済の墓碑では、天皇の万世一系などどうでもいいので記載できたのだろう。
蛇足:これと関連して、神武天皇の前までの32代が筑紫に奴国王としていたならば、邪馬台国は、神武以降の欠史8代に相当し、大和にあったことになる。
邪馬台国の時代はなぜ欠史なのか。
卑弥呼を女王として諸国間で共立したというのも天皇の万世一系の国としてはそぐわない。なので欠史としたのだろう。
일본호의 이름 밝히기는 어째서 늦어졌는가.
신당서
원문:「일본, 고 야마토노야. ·······
기왕성아?씨, 자언 첫주호천귀중주, 지?염, 범32세, 모두이 「존」때문호, 거축자성.?염자 카미타케립, 갱이 「천황」때문호, 사치다이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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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형원년, 견사하평고려.후초습하음, 오 야마토명, 갱호일본.사자자언, 국근일 태생, 이 때문명.혹운일본내소국, 때문야마토소 수준, 고 모기호」
번역문:일본은 고의 야마토노(함정) 국이다. ·······
국왕의 성은 아 마다(엿 또는 여승) 씨이다.그 국왕이 스스로 말하려면 , 초대의 국왕은 하늘 귀중주(짤 수 있는 마셔 울지 않는 해)라고 자칭해, 언염(히 와 물가)에 이르기까지, 대략 32대로 되어 있다.그들은 모두, 존(봐 것)을 존칭으로서 치쿠시성에 존재하고 있었다.(그리고) 언염의 아이 카미타케()가 이어 서, 재차 천황을 자칭해, 다이와주로 옮겨 살아 그 땅을 치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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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형(완공) 원년(670년), 일본은 당에 사자를 보내고, 당이 고려를 평정 한 것을 경축 했다.그 후, 일본인은 중국의 발음에 익숙 하고, 야마토의 통칭을 싫어해, 재차 일본과 개칭했다.
(그 점에 도착해) 사자가 스스로 말하려면 , 「우리 나라가, 태양이 나오는 곳에 가깝기 때문에, 그래서 국명으로 했다」라고.혹은 이렇게도 말하고 있다.「일본은 아래 오구니였으므로, 야마토국이 이것을 병합 하게 되었다.그 결과, 야마토국은 그 일본이라고 하는 국호를 빼앗았던 것이다」라고.
이것보다, 일본은, 역사서에 실리기 전에 야마토국과는 별도로 옛부터 열도에 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왜 쇼오토쿠 타이시는 「일본」이 아니고, 「일출곳」이라는 문서를 중국에 보낸 것일까.
그것은, 일본이 천황의 만세일계의 나라이다라는 표면에 대해서, 당시가 그렇지 않았으니까이다.
즉, 소가씨의 존재이다.
호족이 힘을 가지고 있으면, 부족 연합의 나라라는 것이 되어, 중국에 대해서 계시가 대하지 않기 때문에 있다.
그러나, 645년력이 있던 소가씨 본가는, 을미의 이상하고 멸망 했다.
그리고, 체제를 정비하고, 개여 670년 일본의 이름 밝히기가 되었던 것이다.
(쿠다라)백제의 묘비에서는, 천황의 만세일계등 아무래도 좋기 때문에 기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족:이것과 관련하고, 진무 덴노의 앞까지의 32대가 치쿠시에 나노쿠니왕으로 하고 있었다면, 사마일국은, 카미타케이후의 결사 8대에 상당해, 다이와에 있던 것이 된다.
사마일국의 시대는 왜 결사인가.
히미코를 여왕으로서 제국간에서 공동설립 했다는 것도 천황의 만세일계의 나라로서는 맞지 않다.그래서 결사로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