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강이식(姜以式, 550~?)은 진주 강씨(晉州姜氏)의 시조로

고구려 영양왕(陽王) 시절의 장군이다.

 

남북조(南北朝)시조로 나뉘어 혼란하던 중국을 통일한 수 문제(隋文帝)

외부로 눈을 돌려 고구려를 정복하려는 야욕을 품고 통일된 隋의 국력을 과시하며

597년 고구려에게 국서() 보내서 조공과 봉작을 요구하게 된다.

 

598년 이런 도발에 고구려는 먼저 隋의 요서지방(遼西 地方)을 선제공격을 한다.

이때 강이식 장군은 병마원수(兵馬元帥)로 5만의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수(隋)나라의 국경 요새인 영주성(營州城)까지 군사를 밀고 나가게 되었다.

 

이때 수(隋)의 영주총관(營州總管) 위충(韋沖)의 군대는

강이식(姜以式) 장군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으며

강이식 장군은 여기서 큰 승리를 이끌어 낸다.

 

이후에 강이식 장군은 6만의 군사(기마병 1만과 보병 5만)를 휘하(麾下)에 두고

임유관으로 진격하여 수(隋) 나라 황제 문제(文帝)30만 대군과 싸워서

대승(大勝)을 거두게 된다. 이에 수 문제(隋文帝)는 철군하였다.

 

이것이 고구려와 수(隋)나라 간의 1차 전쟁으로 임유관(臨愉關)  전투이다.

 

 

 

 

경상남도 봉산사(鳳山祠) 강이식(姜以式) 장군을 모시는 사당
 

경상남도 봉산사(鳳山祠) 구내에 있는 강이식(姜以式) 장군 사적비

 

가장 오래된 진주 강씨(晉州姜氏)의 족보 남한보 (1685년)

 

598년 영양왕(陽王) 시절,강이식(姜以式) 장군이

수나라 문제(文帝)의 30만 대군을 물리쳤다는 내용

 

강이식(姜以式,) 장군의 묘가 있다고 하는 고려영자촌(高麗營子村)

 

 

원래는 위처럼 비석이 남아 있었지만 중국의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비석을 없애고

계속 도굴되고 파헤쳐서 지금은 거북이 석상만 남아 있다고 한다.

 

 

 

 

300년 만에 중국의 혼란을 종식 시키고

지나(支那)의 통일을 이룬 수(隋) 문제(文帝)는

기원 597년은 곧(고구려 영양왕 8년) 진(陳)을 병합하여

지나(支那)를 통일하여 수(隋)를 이룬지 17년째 되던해

해마다 이쯤에 자주 풍년이 들고 군사가 넉넉하자

수(隋)나라의 국력을 과시하면서 고구려 영양왕(陽王)에게

모욕적인 국서를 보내니 그 내용은 이렇다.

 

 

이하 전문(全文)

 

“짐(朕)이 천명을 받아 온 천하를 애육(愛育)하여

왕에게 바다 한 귀퉁이를 맡기는 것은

교화(敎化)를 드날려서 원로방지(圓로方趾)로

각기 그 천성(天性)을 다하게 함이다,

왕이 매양(한결같이 늘) 사절을 보내 해 마다 조공 (朝貢)하니,

(다른 나라의 사신 보내는 것을 조공이라고 하는 것은

지나(支那) 춘추시대 이례의 상례로 역사책에나 그렇게 썼을뿐

대등한 나라의 국서(書)에는 쓰지 못했는데, 이제 고구려를 도발해한 번 싸우고자 한 것이다.)

비록 번부(藩附)라 일컫기는 하지만은 정성이 미흡하다.

왕이 이미 짐(朕)의 신하이니 朕의 덕을 본받음이 옳은데,

왕은 말갈(靺鞨)을 구축하고 글안(契丹)을 가두어서

왕의 신첩 (臣妾)을 만듣고 짐(朕)에게 내조(來朝)하는 것을 막아

착한 사람이 의(宜)를 사모함을 밉게 여기니 어찌 이같이

해독(害毒)이 심한가? 짐(朕)의 태부(太府)에 공인 (工人)이 적지 않으니 왕이 쓰고자 한다고 아뢰면(청하면) 얼마든지 보낼 것인데,

(부강함을 과장한 말)

 왕이 지난번에 가만히 재물을 써서 소인을 이용하여

군사를 기르고 병기를 수리하니 이것이 무엇을 하려 하는 것인가

——-고구려가 비록 땅이 좁고 백성이 적지만

이제 왕을 내쫓고 드시 다른 관리를 보낼 것인데,

왕이 만일 마음을 씻고 행실을 바꾸면 곧 짐(朕)의 좋은 신하이니

어찌 반드시 다르게 관리를 두겠느냐. 왕은 잘 생각하라.

요수(遼水)가 넓다고 해도 장강(長江 : 揚子江)과 어찌 비하며,

고구려 군사가 많다 해도 진국(陳國)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인가

짐(朕)이 만일 기()를 생각에 두지 않고 왕의 허물을 탓할건데,

한 장군을 보내면 충분하다.무슨 큰 힘이 들겠느냐

그래도 순순히 타일러서 왕이 스스로 새로워지기를 바란다.”

 

 

영양왕(陽王)이 이런 모욕적인 글을 받고 크게 화내며

여러 신하들을 모아 회답의 글을 보낼 것을 의논하니,

 

강이식(姜以式)이 “이같이 오만하고 무례한 글은

 붓으로 회답할 것이 아니요 칼로 회답할 것입니다.” 하고

 

곧 개전(開戰)하기를 주장하니 왕이 그의 말(詞)을 따라서

강이식으로 병마원수(兵馬元帥)를 삼아서 정병 5만을 거느리고

임유관(臨愉關)으로 향하게 하고, 먼저 예(濊 : 隋書의 靺鞨)

군사 1만으로 요서 (遼西)에 침입하여 수(隋)의 군사를 유인하게

하고 글안(契丹)군사 수천명으로 바다를 건너가 지금의 산동(山東)을 치게 하니 이에 두 나라의 첫 번째 전쟁이 시작되었다.

 

 

 

 

고구려, 나라 간의 1차 전쟁 임유관(愉關) 전투

영양왕(陽王)은 수 문제(隋文帝)의 무례한 글에 칼로 회답하니,

 

 

598년 영양왕(陽王)은 강이식을 병마원수(兵馬元帥)로

삼아 정병 5만 명을 인솔하고 임유관(臨愉關)을 향하게 하고,

말갈병(靺鞨兵) 1만 명을 앞세워 요서 지방(朝陽의 榮州摠管)을

공격하게 하였다.

강이식 장군의 고구려軍은 임유관(臨愉關)에서 크게 승리하고

이것을 빌미로(계기로) 수 문제(隋文帝)는 30만 대군을 동원한다.

 

 

598년 이듬해 고구려의 군사가 요서에 침입하여 요서총관(遼西總管) 위충(韋沖)과 접전을 벌이다가

거짓 패하여 임유관(臨愉關)에서 나오니, 

수나라 문제는 30만 대군을 일으켜 고구려를 공격하는데 한왕(漢王) 양양(楊諒)으로 행군대총관(行軍大總管)으로 하여서

임유관으로 나오고 주나후(周羅喉)로 수군총관(水軍總管)

임명해서 바다로 나가게 하여 고구려를 공격하게 했다.

 

 

주나후(周羅喉)는 평양으로 향한다는 말을 퍼뜨렸으나

사실은 양식을 실은 배를 인솔하여 요해(遼海)로 들어와

양양(楊諒)의 군량을 대주려 함이었다.

이것을 간파한 강이식이 수군을 거느리고 바다 가운데 들어가

이것에 맞서서 쳐서 배를 격파하고, 군중에 명령을 내려서

성책(城柵)을 지키고 나가 싸우지 말라고 하니,

의 군사는 양식이 없고 또한 6월의 장마를 만나서

굶주림과 전염병에 숱한 사람이 狼藉하게 죽어가서

군하기 시작하였다. 강이식이 이것을 추격하여 전군(狼藉)을

거의 섬멸하고 무수한 군기(軍器)를 얻어 크게 개선(旋)하였다.

                                                                 

                                                                - <朝鮮上古史>

 
 
 
 
  9월에 수(隋)나라 군대가 돌아갔는데
    죽은 자가 열가운데 여덟, 아홉이였다 .
                                      -  <삼국사기>
 
 
 
아무튼 임유관(臨愉關) 전투에서
隋나라 軍은 30만중 25만 이상이 몰살 당하여
이후 수 문제(隋文帝)는 고구려를 두려워하여
다시 군사를 일으키지 못하니,
 휴전 조약을 맺고 상품의 무역을 다시 시작한다.
 

임유관(愉關)에서 수나라와 고구려의 1차 전쟁은
고구려의 승리로 끝을 내리게되고
이후 영양왕(陽王) 23년 서기 612년
수나라(隋) 양제(煬帝)가 역사상 유례가 없는
113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로 공격 올때까지
두 나라 사이에 10여년 동안(童顔)이나 아무런 일이 없었다.


高句麗と 隋の 1次戦争

 

姜移植(姜以式, 550‾?)は 真珠姜さん(晉州姜氏)の詩調で

高句麗 栄養王(陽王) 時代の将軍だ.

 

南北朝(南北朝)詩調で分けられて混乱した中国を統一した 数問題(隋文帝)

外部で目を向けて 高句麗を征腹しようとする野慾を抱いて 統一された 隋の 国力を誇示して

597年 高句麗に 国書() 送って 朝貢と封爵を要求するようになる.

 

598年 こんな挑発に高句麗は先に 隋の 夭逝地方(遼西 地方)を先制攻撃をする.

この時 姜移植将軍は病魔元首(兵馬元帥)で 5万の軍事を導いて出場して

数(隋)国の国境この頃の 領主性(営州城)まで軍事を 推し進めるようになった.

 

この時 数(隋)の領主総管(営州総管) ウィツング(韋沖)の軍隊は

姜移植(姜以式) 将軍の軍隊と 戦闘をしたし

姜移植将軍はここで 大きい勝利を導き出す.

 

以後に姜移植将軍は 6万の軍事(騎馬兵 1万と歩兵 5万)を旗下(麾下)に置いて

林留官で進撃して 数(隋) 国皇帝 問題(文帝)30万大軍と戦って

大勝(大勝)をおさめるようになる. これに 数問題(隋文帝)は 撤兵こんにちはだった.

 

これが高句麗と 数(隋)国の間の 1次戦争で 林留官(臨愉関)  戦闘だ.

 

 

 

 

慶尚南道峰山社(鳳山祠) 姜移植(姜以式) 将軍を仕える祠堂
 
慶尚南道 峰山社(鳳山祠) 構内にある姜移植(姜以式) 将軍寺跡碑

 

一番古い真珠姜さん(晉州姜氏)の系図南韓補 (1685年)

 

598年栄養王(陽王) 時代,姜移植(姜以式) 将軍が

幸運にめぐまれなさい問題(文帝)の 30万大軍を退けたという内容

 

姜移植(姜以式,) 将軍の畝があると言う高麗英字村(高麗営子村)

 

 

元々は上のように 碑石が残っていたが中国の文化革命を経りながら碑石を無くして

ずっと盗掘されて暴いて今は 亀席上だけ残っていると言う.

 

 

 

 

300年ぶりに 中国の 混乱を終熄させて

経って(支那)の 統一を成した 数(隋) 問題(文帝)は

紀元 597年はすぐ(煮こむね栄養王 8年) チン(陳)を竝合して

経って(支那)を統一して数(隋)を成してから 17年目ドエドンして

毎年 これ頃によく豊年になって軍事が豊かにしよう

数(隋)国の 国力を誇示しながら 高句麗栄養王(陽王)に

侮辱的な国書を送ったらその内容は このようだ.

 

 

以下専門(全文)

 

“荷(朕)が千名を受けて来た天下を愛育(愛育)して

王に海限りコーナーを任せることは

教化(教化)を取り上げて飛ばして元老防止(円で方趾)で

それぞれその天性(天性)をつくすようにすることだ,

王がメヤング(専ら増える) 謝絶を送って日ごとに朝貢 (朝貢)したら,

(他の国の 使臣送ることを 朝貢だと 言うことは

経って(支那) 春秋時代異例の常例で 歴史書にでもそれほど使っただけ

対等な 国の国書(書)には使うことができなかったが, これから高句麗を挑発して一度争おうとしたのだ.)

たとえボンブ(藩附)だと称えることはするだけでは真心が不十分だ.

王がもう荷(朕)の臣下だから 朕の徳を模範とすることが正しいのに,

王は旺歪(靺鞨)を構築して文の中(契丹)を閉じこめて

王のシンチォブ (臣妾)をマンドッゴ荷(朕)に内助(来朝)することを阻んで

善良な人が義(宜)を慕うことを憎く思ったらどうしてこのように

解読(害毒)がひどいか? 荷(朕)の テブ(太府)に公認 (工人)が 少なくないから 王が使おうと すると申し上げれば(青蝦面) いくらでも送るはずだが,

(富強することを誇張した言葉)

 王がこの前にじっと財物を書いて小人を利用して

軍事を育てて兵器を修理したら これが何をしようと思うことか

-----高句麗がたとえ地が狭くて民が 少ないけれど

これから王を追い出して ドシ他の管理を送るはずだが,

王がもし心を洗って行実を変えればすぐ荷物(朕)仲がいい臣下だから

どうして必ず 違うように管理を置くのか. 王はよく考えなさい.

夭寿(遼水)が広いと言っても長江(長江 : 揚子江)とどうして比べて,

高句麗軍事が多い しても誠実な人(陳国)と比べることができようか

荷(朕)がもし気()を 考えに置かないで王の咎を咎めることなのに,

一将軍を送れば 十分だ.何か大きい力が 入るのか

それでも素直にたしなめて王が自ら新しくなるように願う.”

 

 

栄養王(陽王)がこんな侮辱的な文を受けて大きく怒って

多くの臣下たちを集めて回答の文を送ることを議論したら,

 

姜移植(姜以式)が “このように傲慢で無礼な文は

 筆に回答するのではないです刀に回答するでしょう.” して

 

すぐ開戦(開戦)するのを主張したら王が彼の言葉(詞)に よって

姜移植で病魔元首(兵馬元帥)をして精兵 5のみを従えて

林留官(臨愉関)で向けるようにして, 先に例(〓 : 隋書の 靺鞨)

軍事 1だけで夭逝 (遼西)に侵入して数(隋)の軍事を誘引するように

と文の中(契丹)軍事数千名で海を渡って今の山東(山東)を打つようにしたらここに両国の一番目戦争が始まった.

 

 

 

 

高句麗, 国簡儀 1次 戦争 林留官(愉関) 戦闘

栄養王(陽王)は数問題(隋文帝)の無礼な 文に刀に回答したら,

 

 

598年 栄養王(陽王)は姜移植を病魔元首(兵馬元帥)で

して精兵 5万人を率いて林留官(臨愉関)を向けるようにして,

旺歪病(靺鞨兵) 1万人を 先に立たせて夭逝地方(朝陽の 栄州〓管)を

攻撃するようにした.

姜移植将軍の 高句麗軍は林留官(臨愉関)から大きく 勝利して

これを言葉尻で(きっかけで) 数問題(隋文帝)は 30万 大軍を動員する.

 

 

598年 翌年 高句麗の軍事が夭逝に侵入して夭逝総管(遼西総管) ウィツング(韋沖)と合戦をしてから

偽り敗れて林留官(臨愉関)から出たら, 

幸運にめぐまれなさい問題は 30万 大軍を起こして高句麗を攻撃するのに ハンワング(漢王) 洋洋(楊諒)で行軍大塚官(行軍大総管)にして

林留官で出て ズナフ(周羅喉)で水軍総管(水軍総管)

任命して 海に出るようにして高句麗を攻撃するようにした.

 

 

ズナフ(周羅喉)は 平壌に向けるという話を言いふらしたが

事実は 様式を 実はお腹を率いて了解(遼海)に入って来て

洋洋(楊諒)の軍糧をまかなおうとハムだった.

これを看破した姜移植が水軍を従えて海の中入って行って

これに対立して打ってお腹を撃破して, 群衆に命令を下して

城柵(城柵)を守って出て争うなと言ったら,

の軍事は様式がなくてまた 6月の梅雨に会って

飢えと伝染病に多い人が 狼藉するように死んで行って

トエ軍し始めた. 川移植がこれを追撃して全軍(狼藉)を

ほとんど殲滅して限りない軍旗(軍器)を 得て大きく改善(旋)した.

                                                                 

                                                                - <朝鮮上古史>

 
 
 
 
  9月に 数(隋)国軍隊が帰ったが
    死亡者がヨルがウンデ八つ, 九つだった .
                                      -  <三国史記>
 
 
 
とにかく林留官(臨愉関) 戦闘で
隋国 軍は 30万重 25万 以上が沒死にあって
以後数問題(隋文帝)は 高句麗を恐れて
また軍事を起こすことができないから,
 休戦条約を結んで商品の貿易をまた始める.
 
林留官(愉関)で スナラと 高句麗の 1次戦争は
高句麗の 勝利で 終りを下げるようになって
以後 栄養王(陽王) 23年西紀 612年
幸運にめぐまれなさい(隋) 羊蹄(煬帝)が歴史上類例がない
113万の大軍を 導いて高句麗で 攻撃来るまで
二つの国の間に 10年余りの間(童顔)や何らの事がなか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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