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伝統武技

검도는 일본이 종주국이라고 흔히들 말하고 있다.

일본도를 이용하여 검법을 펼쳤다는 주장일까?

엄연히 도법과 검법은 다르다. 

 

일본 고유의 검법을 소개한 본격적 서적은 무엇인가? 

 

얼마 전에 일본인이 한국에는 무예가 없었다고 과감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무예도보통지 서문에 나오는 창이나 검의 병기는 없이 궁술(弓術)만 있었다. 하는 것을 인용한 것이다.

고려말 화포 무기의 개발로 인해서 재래식 무기의 가치는 줄어들었던 것이다.

 

한국의 전통 검법으로는 조선세법과 본국검법을 들 수 있다.

 

먼저 조선세법에 대해서 간략하게 알아 보자.

조선세법은 본국검법과 함께 무예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검법으로 중국의 병법 집대성적 문헌인 <武備志>를 통해 17세기초에 세상에 크게 알려진 검법이며 중국은 물론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역 사가 있는 민족 중에 칼(劍, 刀)을 무기로 사용하지 않은 민족은 없었다. 그러나 스스로 오천년의 역사를 지켜왔다고 자부하는 우리의 문화 속에 언제부터인가 확연치는않으나 칼은 예외인 것처럼 여겨져 왔다. 그리고 막연히 "칼"이라면 일본 것이라고 치부해 온 것이 작금의 현실이었다.

  우리의 것으로 그 이름이 전해지는 병법서는 신라의 것이 세 가지이고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만들었다는 것으로(단재의 주장) 고려 때 그 이름이 나타나는 것을 합해 네 가지가 있다.

  기록상 오래 된 것부터 차례로 보면

六陣兵法 : 阿 薛秀眞이 지었다는 것으로 文武王 14년(674)의 기록이"삼국사기"에 있다.

安國兵法 : 작자미상으로 惠恭王 2년(766)의 기록이"삼국유사"에 있다.

武烏兵法: 大舍 武烏가 15권을 찬술하여 왕에게 바쳤다는 것으로 元聖王 2년(786)의 기록이"삼국사기"에 있으며 "무예도보통지"에도 언급되어 있다.

金海兵書 : 신채호 선생에 따르면 金海란 연개소문의 字이며 그가 저술한 兵書가 바로 "김해병서"라는 것이다. 실제로 唐의 李衛公問對 서문에는 李靖이 당태종에게 "莫離支自謂知兵......"이라 하여 연개소문을 평가하고 있으며 고구려에서 일찍부터 兵法, 兵書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이 兵書에 관한 서명의 기록은 고려 정종 2년(1036) "고려사"의 것이 최초이며 역시"무예도보통 지"등에 언급되어 있다.

  " 무예도보통지"란 조선조 초기에 太宗의 명을 받아 河崙이 "陣說"을 편찬하였고 文宗 때는 "東國兵鑑", 端宗 때 "歷代兵要", 世祖 때"兵將圖 說" 등의 兵書가 출간되었으나 무예에 관한 것은 임진왜란 후인 宣祖31년(1598) 韓嶠가 중국의 "紀 新書"를 모본으로 許遊擊 등에게 실기를 물어 편찬한 소위 "武藝諸譜"가 최초의 것이다. 여기에 英祖 35년(1759)에 小朝(思悼世子)가 竹長槍 등 12기를 더하여 조선의 18기를 만든 것이 "武藝新譜"(현재 전해지고 있는 것은 없음)이고 정조 14년(1790)에 騎槍 등 말을 타고 할 수 있는 기예 6기를 보태어 24기를 만든 것이 바로 "武藝圖譜通志"이다. 이외에 우리에게 남아 있는 무예서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조선세법이 처음 소개된 책은 明나라 茅元儀가 쓴 <武備志>이다. 이 책은 <기효신서>와 더불어 중국의 대표적인 방법서이니 별도의 설명은 필요 없을 것이다.  

  이 <무비지>의 권86에 도보가 갖추어진 검법이 유일하게 실려있는데 그것이 바로 "조선세법"이다.

朝鮮勢法
初習
眼法 擊法洗法刺法
擊 法有五
豹頭擊, 跨左擊, 跨右擊, 翼左擊, 翼右擊
刺 法有五
逆鱗刺, 坦腹刺, 雙明刺, 左夾刺, 右夾刺
格法有三
擧鼎格, 旋風格, 御車格
洗法有三
鳳頭洗, 虎穴洗, 騰蛟洗

擧鼎勢者卽擧鼎格也法能鼎格上Kill左脚右手平擡勢 向前제 擊中Kill退步裙란 看法
오른발을 앞으로 내며 칼을 들어 올려 머리칼(상 단)자세를 취하고 즉시 왼발이 나가며 앞을 향하여 가운데를 치고 걸음을 물려(왼발) 군란세를 한다.

坦腹勢者卽坦腹刺也法能衝刺中Kill進如崩山右脚右 手蒼龍出水勢向前進步腰擊看法
칼날을 비스듬히 위로 뽑아 오른발 오른손으로 배를 찌르고 앞을 향해 나아가 허리를 친다(왼발)

跨右勢者卽跨右擊也法能료 剪下Kill左脚右手綽衣勢 向前進步橫擊看法
오른발을 약간 오른 방향으로 틀며 칼을 뽑아 훌 터내리듯 왼발과 오른손으로 오른쪽을 걸터치고 앞 을 향하여 왼쪽으로 횡격한다.(오른발)

銀망 勢者卽銀망 格也法能四顧周身又能掠Kill四面向 前則左手左脚向後則右手右脚動則左右旋風제 電Kill看 法
칼을 옆으로 뽑아 앞을 향해서 왼손 왼발로, 뒤로 돌아서 오른손 오른발로 내려치고 좌우로는 비스듬 히 내려벤다(왼발, 오른발)

腰擊勢者卽腰擊也法能橫衝中Kill身步手劍疾若迅雷 此一擊者劍中之首擊也右脚右手斬蛇勢向前進步逆鱗 看法
왼발을 약간 비스듬히 앞으로 내며 칼을 뽑아 올 리고 즉시 오른발 오른손으로 왼쪽을 비껴 내려 친 후 앞을 향해 걸음을 나아가 역린한다.(왼발)

展翅勢者卽展翅擊也法能絞格上Kill 료掠下Kill右脚右 手偏閃勢向前 제步擧鼎格看法
제자리에서 칼을 밑에서 위로 뽑아 쳐 올리고 그 대로 돌려 오른발을 내면서 오른손으로 아래를 치 고 걸음을 당겨 거정격을 한다.

跨左勢者卽跨左擊也法能掃掠下Kill右脚右手提水勢 向前進步雙剪看法
왼발을 비스듬히 왼쪽으로 약간 내며 칼을 뽑아 오른발 오른손으로 왼쪽을 옆으로 내려치고 다시 앞을 향하여 걸음을 나가며 쌍으로 친다(왼발, 오른발)

右夾勢者卽右夾刺也法能絞刺中Kill左脚右手奔衝勢 向前立步擧鼎格看法
칼을 옆에서 위로 비스듬히 뽑아 몸을 오른쪽으로 돌렸다가 왼발을 앞으로 내며 왼쪽 옆구리를 찌르고 걸음을 세워 거정격을 한다.

 

다음은 본국검법이다. 

본국검법은 우리의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수록된 24기(技) 중의 하나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칼춤의 희(戱)라하여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다.
‘황 창(黃昌)은 신라 사람이다. 속설에 전하기를 나이 일곱에 백제의 시중(市中)에 들어가 칼춤을 추니 구경하는 사람이 담처럼 들러쌌다. 백제왕이 이 소문을 듣고 황창을 불러서 칼춤을 추라고 하였다. 황창은 기회를 보아 왕을 찔렀다. 이에 백제인들이 그를 죽였다. 신라인들이 이를 슬퍼하여 그의 얼굴 모습을 본떠서 가면을 만들어 쓰고 칼춤을 추었는데 그것이 지금도 전한다.’
또한 ‘왜(倭)가 신라와 인접해 있으므로 검기(劍技)와 검무(劍舞)가 반드시 전하여졌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황 창이 신라 사람인 것은 확실하나 화랑인지 아닌지, 또 어느 왕 때의 인물인지 알 수 없으며 ≪무예도보통지≫나 ≪동경잡기(東京雜記)≫는 ≪동국여지승람≫을 인용한 것 같은데, ≪동국여지승람≫은 어떤 문헌을 참고하였는지 밝히지 않았고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전혀 황창의 이름이 보이지 않아 더 이상의 고증은 어렵다.
상기한 것과 다른 몇가지 기록들을 종합하여 <본국검법>의 배경과 그 유래를 알아보기로 한다.
황 창이 백제왕을 찌른 사실은 당시 신라가 백제에 큰 원한이 있었음을 말한다. 신라는 그 국력이 백제에 미치지 못해 늘 피해를 당했던 것이다. 특히 무령왕 이후 성왕때에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어 피차 양립 못할 절박한 상태가 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황창에 관한 이첨(李詹)의 고증이 있다.
‘을 축년(乙丑年) 겨울에 내가 계림(경주)에 손님이 되어 갔는데 부윤 배공(裵公)이 향악을 베풀어 나를 위로하는데 탈을 쓴 동자(童子)가 뜰에서 칼춤을 추는 것을 보았다. 물어보니 말하기를, 신라 때 황창(黃昌)이라는 소년이 있었다. 나이 15,6세쯤 되어서 칼춤을 잘 추었는데 신라왕을 뵙고 말하기를 신이 원하건대 임금을 위하여 백제왕을 죽여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황창이 곧 백제로 가서 시가에서 춤을 추니 …… 살해되었다. 그의 어머니가 듣고 울부짖다가 드디어 눈이 멀었다. 사람들이 그의 어머니의 눈을 도로 밝아지게 하려고 꾀를 내어 사람을 시켜서 뜰에서 칼춤을 추게 하고 속여서 말하기를 창이 와서 춤춘다. 창이 죽었다는 전일의 말은 거짓말이다 하니, 그 어머니가 기뻐 울며 즉시 눈이 도로 밝아졌다 한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본국검법>의 배경은 신라의 화랑정신이며 이를 발판으로 신라에서는 훌륭한 검법을 창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본국검법>은 모두 33세(勢)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중 격법(擊法)이 12수(首), 자법(刺法)이 9수로 치고 지르는 것이 모두 21수이다.
진전살적세(進前Kill賊勢) 3수
향전살적세(向前Kill賊勢) 2수
후일격세(後一擊勢) 3수
후일자세(後一刺勢) 2수
일자세(一刺勢) 1수
안자세(雁字勢) 1수
직부송서세(直符送書勢) 1수
발초심사세(發艸尋蛇勢) 1수
표두압정세(豹頭壓頂勢) 1수
좌우요격세(左右腰擊勢) 2수(각1수)
장교분수세(長蛟噴水勢) 1수)
우찬격세(右鑽擊勢) 1수)
용약일자세(勇躍一刺勢) 1수
시우상전세(牛相戰勢) 1수
이 상이 격자지법(擊刺之法) 21수이고 내략(內掠), 외략(外掠), 방적(防賊) 등의 방어법이 있으며 지검대적세(持劍對賊勢), 금계독립세(金鷄獨立勢), 맹호은림세(猛虎隱林勢), 조천세(朝天勢), 전기세(展旗勢), 백원출동세(白猿出洞勢) 등의 기본 자세(格法)가 있다.

 

이상 검법에 대해서 간략하게 알아 보았다.

다음은 무예도보통지에 대해서 알아본다.


 正祖 30卷, 14年(1790 庚戌 / 청 건륭(乾隆) 55年) 4月 29日(己卯) 5번째기사
《무예도보통지》가 완성되다
《武藝圖譜通志》成。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Tree=0&tabid=k&id=k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가 완성되었다. 무예에 관한 여러 가지 책에 실린 곤봉(棍棒), 등패(藤牌), 낭선, 장창(長槍), 당파, 쌍수도 등 여섯 가지 기예는 척계광의 《기효신서》에 나왔는데, 선묘때 훈련 도감 낭청 한교에게 명하여 우리 나라에 출정한 중국 장수들에게 두루 물어 찬보를 만들어 출간하였고, 영종 기사년에 장헌 세자가 모든 정사를 대리하던 중 기묘년에 명하여 죽장창, 기창, 예도, 왜검, 교전, 월협도, 쌍검, 제독검, 본국검, 권법, 편, 곤 등 12가지 기예를 더 넣어 도해로 엮어 새로 《신보》를 만들었고, 상이 즉위하자 명하여 기창, 마상 월도, 마상 쌍검, 마상 편곤 등 4가지 기예를 더 넣고 또 격구, 마상재를 덧붙여 모두 24가지 기예가 되었는데, 검서관 이덕무·박제가에게 명하여 장용영에 사무국을 설치하고 자세히 상고하여 편찬하게 하는 동시에, 주해를 붙이고 모든 잘잘못에 대해서도 논단을 붙이게 했다. 이어 장용영 초관 백동수에게 명하여 기예를 살펴 시험해 본 뒤에 간행하는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그 차례는 열성조가 군문을 설치하고 편찬한 병서와 궁중 후원에서 시험을 거친 《연경월위》 등을 널리 상고하여 사항에 따라 순차로 배열한 뒤에 《병기총서》라는 명칭을 붙여 첫머리에 싣고, 다음에는 척계광과 모원의의 약전인 《척모사실)》을 싣고, 다음은 한교가 편찬한 《기예질의》를 실었다. 이어 한교가 훈련 도감에서 일한 경위를 그의 견해와 합쳐 《질의》 밑에 실었다. 다음에는 인용한 서목을 넣었고, 다음은 24가지 기예에 대한 해설과 유래와 그림이 있고, 다음에는 모자와 복장에 대한 그림과 설명을 붙였다. 또 각 군영의 기예를 익히는 것이 같지 않기 때문에 고이표를 만들어 그 끝에 붙이고 또 언해 1권이 있어서 책은 모두 5책인데 어제서를 권두에 붙였다. 이때에 이르러 장용영에서 인쇄하여 올리고 각 군영에 반포한 다음 또 1건은 서원군  한교의 봉사손에게 보냈다.


《무 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는 奎章閣 검서관인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와 장용영壯勇營 장교인 백동수白東脩 등이 正祖의 명으로 1790년(正祖 14년)에 편찬한 훈련용 병서이다. 임금의 명으로 만들어졌다 하여 《어제무예도보통지》(御製武藝圖譜通志) 또는 《어정무예도보통지》(御定武藝圖譜通志)라고도 불린다.

원래 조선의 무예는 동양의 무술과는 다른 경기 스포츠의 형식으로 맨손 격투기는 수박, 검은 각투, 궁시(弓矢)의 기(技), 창술은 삼갑창, 갑을창, 기창세와 보창세, 검은 경상도는 조선세법과 본국검법, 평안도는 쌍검술이 주종을 이루었다. 그러다가 명나라 사람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를 얻게 되자 1598년(선조 31년)에 한교(韓嶠)가 곤봉 등 6종을 내용으로 《무예제보(武藝諸譜)》 편찬하였고, 1759년(영조 35년)에 죽장창(竹長槍) 등 12종을 늘려서 18종으로써 《무예신보(武藝新譜)》를 편찬하였다. 정조 때에 이르러 기예(騎藝) 등 6종을 다시 추가하여 24종에 달하는 각종 무예에 관한 자세한 도보(圖譜), 곧 도해와 설명을 붙여 1790년[1](정조 14년) 4월 29일(음)에 완간하였다. 4권 4책의 한문본과 1권 1책의 한글 해석본이 있다.


조선 정조 때 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백동수(白東修) 등이 왕명에 따라 편찬한 종합무예서. 4권 4책. 목판본. 1790년(정조 14)에 완간되었다. ≪무예통지≫·≪무예도보≫·≪무예보≫라고도 한다.

임 진왜란 후 군사의 무예훈련을 위한 필요성에 따라 1598년(선조 31) 한교(韓嶠)의 ≪무예제보 武藝諸譜≫, 1759년(영조 35) ≪무예신보 武藝新譜≫가 간행되었는데, 이 책은 ≪무예제보≫와 ≪무예신보≫를 집대성하고 보완한 것이다.
체 재는 첫머리에 정조의 서(序)를 비롯하여 범례, 병기총서(兵技總敍), 척·모사실(戚茅事實), 기예질의(技藝質疑), 인용서목(引用書目) 등이 있으며, 본문에는 24종의 병기(兵技)를 수록하였고, 책 끝에는 관복도설(冠服圖說)과 고이표(考異表)가 부록으로 포함되어 있다.
[편찬/발간 경위]
서문에서는 정조가 이 책을 간행하게 된 동기를 간략히 밝히고 있다. 이에 따르면, 당시 우리 나라에는 창이나 검의 병기는 없이 궁술(弓術)만 있었다.
그 런, 임진왜란 뒤 선조 때 곤봉(棍棒)·장창(長槍) 등 여섯 가지 기예를 다룬 ≪무예제보≫가 편찬되었으며, 영조 때에는 여기에 죽장창(竹長槍)·예도(銳刀) 등 12기를 더하여 ≪무예신보≫를 간행하였고, 다시 마상(馬上)·격구(擊球) 등 6기를 더하여 도합 24기로 된 도보를 만든 것이라고 하였다.
[내용]
병기총서에서는 군문(軍門)의 건치(建置), 병서(兵書)의 편찬, 내원(內苑)에서의 시예(試藝) 등을 연대순으로 간술하고 있다. 이는 조선 초부터 ≪무예도보통지≫ 편간까지의 전투기술사 또는 병기사(兵技史)로서 큰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척·모사실에서는 이 책을 편찬하는 데 표준으로 삼은 ≪기효신서≫와 ≪무비지 武備志≫의 저자인 척계광(戚繼光)과 모원의(茅元義)의 소전(小傳)을 다루었으며, 기예질의는 한교가 병기에 관하여 명나라의 허유격(許遊擊)과 문답한 것을 모은 것이다.
이 질의 끝에 있는 한교의 약전(略傳)에는 ≪기효신서≫에 관한 구입 경로와 해석, 기예의 훈련 등에 관한 일화도 실려 있다.
인용서목에는 ≪기효신서≫·≪무비지≫ 등 참고한 책 145종을 기록하여, 조선의 무기(武技)와 외래의 무기가 어떻게 융합, 흡수되었는가를 한눈에 알 수 있게 하고 있다.
24 기로 된 본문의 구성을 보면, 권1에는 장창·죽장창·기창(旗槍)·당파·기창·낭선 등 여섯 가지, 권2에는 쌍수도(雙手刀)·예도·교전(交戰) 등의 왜검(倭劍) 세 가지, 권3에는 제독검(提督劍)·본국검(本國劍)·쌍검·마상쌍검·월도(月刀)·마상월도·협도(挾刀) 및 요도(腰刀)와 표창을 사용하는 등패(藤牌) 등 여덟 가지, 권4에는 권법(拳法)·곤봉·편곤(鞭棍)·마상편곤·격구·마상재(馬上才) 등 여섯 가지로 모두 23종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러나 등패의 사용에서 요도와 표창을 분리하여 24기로 보는 것이다. 책 끝에 있는 관복도설은 무기에 필요한 옷의 그림과 설명을 한 것이고, 고이표는 영(營)에 따라 다른 기법의 비교표이다.
이 책은 당시의 무예서들이 전략과 전술 등 이론을 위주로 한 것들인 데 비해 24기의 전투기술을 중심으로 한 실전 훈련서로, 당시의 무예와 병기에 관하여 종합적인 조감을 할 수 있는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본문 외에 당시의 역사·사회 문제를 종합적으로 조감할 수 있는 각종 자료가 모아져 있어 그 진가를 더하고 있다.
무기를 설명하는 과정에서는 각기(各技)마다 중국식·아국식(我國式)을 뚜렷이 하고, 도식(圖式)·설(說)·보(譜)·도(圖)·총보(總譜)·총도(總圖)로 나누어 일일이 알기 쉽게 그림과 함께 설명을 하고 있다.
요즈음 중국·일본 등에서도 동양무술사의 서술에 ≪무예도보통지≫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 따로 언해본도 있는데, 이를 합쳐서 최근 한국체육사연구회에서 영인하였다. 규장각도서 등에 있다.


일본의 무예서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다음을 참고하자.

16 세기말, 조선에서는 한반도 전장으로 임진왜란(1592 ) (1597) 계기로서 무예 연구 중요성 재인식되었다., 조선 명령에 의해, 국가적 사업으로서 ,,삼국 145 병법 무예 관련 서적 참고 편집되어 14(1790) , 간행되었다., 조선시대 무예 집대성 으로, 조선시대 무예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한편, 에도 병법 무술, 각각 원록14(1701) , 보력7(1757) 편찬간행되고 있다.저자 山本勘助로 되어 있지만, 明応2(1493)-永禄4(1561) 추정되고 있어 위서 가능성 높다.게다가 紀效新書, 중국10 대군 하나 여겨지는 종합적 병법무예이며, 중국(명대)에서 편찬,간행 가장 중요한 무예이다.저자, 軍事家,,장군 이며, 에 의해서 2 종류 14 巻本(1560, 1584) 18 巻本(1562) 편찬,간행되고 있다. 성립 연대로부터 말하면, 紀效新書(1560), 兵法秘傳書(1701) 武術早學(1757), 武藝圖譜通志(1790) 순서이다.
그런데, 삼국 사서에는 공통되는 권법 볼 수 있다.紀效新書( 마찬가지)懶扎衣出門架子,金鷄獨立,抛架子,拈肘勢 4(동작필자) 그래서 있다.에는 권법 전부 32( 紀效新書 마찬가지), 武術早學에도 32 있지만, 兵法秘傳書에는 4 밖에 없기 때문에이다. 4 동작 표현 그림 四書와도 아주 비슷하지만, 동작이나 이나 다리 늘리는 방법, 짓는 방법 전혀 같지 않다., 四書 복장 모두 차이가 난다. 한국 전투 의복이지만, 紀效新書 중국 전투 의복이나 상반신 나체, 모두 최소 한도 의복이다.兵法秘傳書 武術早學 바지 혹은 나체이다.한층 더 그러한 그림 설명 사서 각각 차이가 난다., 사서와도 그림 그려진 , 체형으로부터 판단하면, 모두 비교적 연령 높은 30 후반내지 40 이상 인물과 같이 보여진다.사서 동작 명칭 모두 ・・기세혹은 ・・ 주먹()와 같이, 같은 동작 명칭 이용되고 있다.편찬간행 연대로부터, 병법무술 권법, 紀效新書 영향 받고, 간행되었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일본, 조선과도 권법에 관해서 말하면 紀效新書 모델로 하고 있지만, 그러나 단순하게 모방한 것은 아니고, 각각 궁리 응용 더하고 자국 도입하고 있는 것이다.이상 내용 통해서, 권법 세계에도, 16 세기 이후 중국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문화 교류 흔적 볼 수 있다.
http://www.fwu.ac.jp/la/matsunami/documents/%91%E68%89%F1%91%E5%89%EF%8F%B4%98%5E.pdf

동양의 무예서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자.


무비지(武備志) 해제
http://www.nfm.go.kr/_Common/Download.nfm?filename=05.pdf&dir=22&seq=395

Ⅳ. 기효신서(紀效新書) - 국립민속박물관
http://www.nfm.go.kr/_Common/Download.nfm?filename=04.pdf&dir=22&seq=395


무예제보번역속집(武藝諸譜飜譯續集) 해제
http://www.nfm.go.kr/_Common/Download.nfm?filename=03.pdf&dir=22&seq=395

무예제보(武藝諸譜) 해제
http://www.nfm.go.kr/_Common/Download.nfm?filename=02.pdf&dir=22&seq=395

병서간고(兵書簡考)
http://www.nfm.go.kr/_Common/Download.nfm?filename=01.pdf&dir=22&seq=395

본국검법
http://ureturni.com.ne.kr/Kumdo/BonkuckGum.htm 

 

 

《무비지(武備志)》는 명나라의 모원의(茅元儀; 1594∼1644)가 집대성한 병법, 무예서이다. 명
의 내우외환과 군비의 부족을 실감한 모원의가 명의 부국강병을 실현하기 위하여 중국 고대의 2
천여 종의 군사관련 서적을 15년 간 수집, 편집하여, 1621년(天啓元年)에 편찬하였다.

 

 

도무비지의 쌍수법 삽화 

도법(刀法)은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卷2에 첫번째 수록되어 있는‘쌍수도법이다. 척계광 장군이 신유(辛酉)년에 일본인(倭.寇)들에게 얻어서《기효신서》기재하였고, 이것을 모원의가《무비지》에 전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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