梨峙 전투
1592년 음력 7월 8일 전라도 珍山郡과 高山縣 경계의
梨峙에서 임시 都節制使 權慄과 同福縣監 黃進 麾下의
1500人 朝鮮軍이 倭將 小早川隆景 麾下의 2000人 日本軍을 격퇴하였다
이 전투로 일본의 전라도 進擊 작전은 霧散되었다
梨峙 전투는 日本軍의 全州 침입을 막기 위한 熊峙戰鬪와 거의 동시에 벌어졌는데,
熊峙와 錦山 전투에서 朝鮮軍이 비록 敗北하였지만,
梨峙 전투에서는 끝내 朝鮮軍이 日本軍을 격파함으로써
日本軍의 전라도 진출을 저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투 중에 黃進이 총을 맞고 쓰러지자 한때 사기가 떨어졌으나
權慄이 將兵을 督戰하여 倭軍을 격퇴시켰다.
이 전투로 말미암아 전라도가 보존되어 後方兵站基地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朝鮮軍 1500 VS 倭軍 2000
梨峙 戦闘
1592年旧暦 7月 8日全羅道 珍山郡と 高山県 境界の
梨峙で臨時 都節制使 権慄と 同福県監 黄進 麾下の
1500人 朝鮮軍が 倭将 小早川隆景 麾下の 2000人 日本軍を撃退した
が戦闘で日本の全羅道 進撃 作戦は 霧散になった
梨峙 戦闘は 日本軍の 全州 侵入を阻むための 熊峙戦闘とほとんど同時に起ったが,
熊峙と 錦山 戦闘で 朝鮮軍がたとえ 敗北しましたが,
梨峙 戦闘では結局 朝鮮軍が 日本軍を撃破することで
日本軍の全羅道進出を沮止するきっかけになった.
戦闘の中に 黄進が鉄砲を当たって倒れるとひととき詐欺が落ちたが
権慄が 将兵を 督戦して 倭軍を撃退させた.
が戦闘でよって全羅道が保存して 後方兵站基地としての役目ができ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