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jp/exchange/photo/read.php?uid=8210&fid=8210&thread=1000000&idx=1&page=2&tname=exc_board_14&number=4985>「柱のエンタシスはギリシア風」と題した先の投稿では、法隆寺エンタシスのギリシア起源説が揚言された時代の思想的背景を説明した。 日本建築とギリシアとの関係が喧伝されたのは、ギリシア建築の影響の度合いにおいてアジア建築の価値を測ろうとするヨーロッパの視線への応答ではなかろうか、というのがそこでの私の主張である。



ところが、そうした主題とは別に、恐らく反論のつもりなのだろうが、「エンタシスは韓国起源ではなく中国起源だ」といった趣旨のレスを書き連ねる人たちがいた。 もとより私は東アジアの胴張りが古代中国で発生して韓国日本へ伝播したとする仮説――むろん、仮説である――が現時点で最も蓋然性が高いと考えているし、中国起源である可能性を本文中で明示してもいるのだが、相手の言ったことと言っていないことを正しく把握する能力を持たない人間も世の中には少なくないので、それはまあ、どうでもよい。 ただ、ジョン君がわざわざスレを立てておこなった以下の主張については、それなりに面白い話題ではあるので、改めてここに取り上げることにする。 曰く、



んで、なぜ現代の朝鮮に「梭柱」が残っているかというと、百済は程なく滅亡しておりますし、ほぼ関係ないと言っていいでしょう。じゃあ、今の韓国に残る梭柱はどこから来たの?と。



「宋」における最後の梭柱の流行。高麗はモンゴルに支配されるまで、そりゃもう宋をリスペクトすること甚だしく、モンゴルに支配された後もグジグジと宋に対する劣情を募らせます。この時代に、流入した宋の建築様式が、モンゴルに対する文化的反発等と結びつき、形態として固定化されたと考える方が妥当だよね。( ´H`)y-~~



まあ、現在韓国にある梭柱をもつ建築物の形式は、六朝様式ではまったくないわけでして・・・それが上記推測の理由なの。





文章が散漫で無駄な言辞が多いが、要約すると、後代の韓国建築は、六朝様式ではないので、その梭柱は宋由来のものであって、百済と関係がないのだ、という主張らしい。



言うまでもなく――毎度のごとく――論理過程としては全く成り立たない主張である。 高麗以降の韓国建築のうち、柱の胴張りが顕著なのは主に柱心包系の建築である。 これは「六朝様式」とやらではないが、宋様式でもさらにない。





左:多包系建築。 右:柱包系建築。





梭柱を持つ宋様式の例としてジョン君が挙げた、華林寺大殿(964年)。





宋代以降の中国建築は、柱間にも組物を置く、いわゆる詰組あるいは多包式の様式を常とする。 ジョン君の主張するように、現存する韓国建築の胴張りが宋由来であって、それ以前の時代と何の関わりもないのであれば、その胴張りは多包系建築においてこそ見られるものであるはずだ。 が、実際は逆である。 胴張りが顕著なのは、柱頭のみに組物を置く、従って唐代以前の中国建築の系譜に連なる柱心包系建築なのだ。



そもそも新様式の導入は、旧様式の完全な廃棄を意味しない。 韓国建築が中国建築の特定の様式を導入したからといって、建築の諸要素の全体が中国様式に従う必然性はなく、また実際にそうした例もない。 移植に際しては意図するとせざるとに関わらず、要素の取捨選択が行われる。 従って、「韓国建築が六朝様式か否か」、という問題構制自体が意味を成さない。 問えるのは「どの部分に六朝様式からの影響が見られるか」である。 ある部分に宋様式を導入したとしても、他の部分では従来から継承されるものもあっただろう。 日本において天平時代に唐様式が移植された折にも、飛鳥時代から継承された平行垂木の要素が残ったように、後代の韓国が唐や宋の様式を取り入れたとしても、三国時代から胴張りが継承されることは当然ありうる。



従って、ジョン君の反論の論理過程について言えば、主張者の論理に対する理解の水準を反映した惨憺たるものというほかない。 その瑕疵は普通の知能があれば誰でも気づくものであるから、本来は上記のような反駁の労を取る必要もないのだろう。 ただ、彼の結論については興味深く感じたこともここに告白しておこう。





彼の文を読んで最初に思ったのは、「宋代の梭柱の様式が、南北朝時代の梭柱と具体的な差異を持ち、高麗以降の韓国建築の梭柱が後者でなく、前者であると弁別できる」場合に、恐らくこうした推測は成り立つだろう、ということだった。 仮に彼がそのような論理構築によって上述の主張を行っていたら、私も楽しめただろう。 実際には無理な相談なので、ここで仮に私が主張して見ることにしよう。 正直なところ私は宋代と南北朝時代の梭柱の差など考えたことがなかったから、その二つが異なるということも、ありうると思った。



ちなみに私が知っている韓国建築の胴張りとは、例えばこのようなものである。 
「一般に柱高さの下から三分の一のあたりを最も太くし、柱頭は根幹より細くする。」(『韓国の建築』張慶浩) 「柱の全体の長さ中、下から1 / 3ほどの高さまで柱の太さが次第に大きくなって行ってそこから次第に太さを減じる形状」(『韓国伝統建築: 庭園・樓閣・塔婆』 韓国伝統建築研究会)――つまり韓国でベフリム(胴張り)と呼ばれているのは、下から三分の一の高さで最も柱を太くする形状のことらしい。実際、浮石寺無量寿殿の柱を見てもそうなっている。



これに対し、宋代の梭柱とはどのようなものか。 北宋時代に編纂された建築技術書である『営造法式』によれば、この時代の梭柱の正式な方法は、柱を上・中・下に三分し、中段は直線、上・下段を先細りに成型(梭杀)する。 上段のみに梭杀を施す「上梭柱」もあり、上下に梭杀を施すものをこれと区別して「上下梭」と呼ぶこともある、という。 実はここでは、下から三分の一を最も太くするという記述はない。 この通りに作れば、上から三分の一までの中間部分の太さは同じになるはずである。



つまり、宋代に正式とされた梭柱は、韓国の胴張りと異なるのだ。 では法隆寺はどうか? これはよく知られているように、下から三分の一の高さで最も太くなる、韓国と同じ胴張りである。 私としては営造法式のそれを『中国式』、韓国と法隆寺のそれを『韓国式』と呼びわけたいところだが(笑)、角を立てずに前者を新式、後者を古式の胴張りとでも呼んでおこう。





左、法隆寺。中、韓国の胴張り。右、中国の梭柱(百度百科掲載)。






さて、そうした予備知識を持った上で当該スレでの栄養市民のレスを読むと、意味が分かるだろう。 



「梭柱の影響は、法隆寺東大門が最もそれに当てはまるようです。」



「ただ、法隆寺金堂や中門の目立つ徳利柱が、これとどう繋がるかはよく分かりません。中国起源は別に否定しませんが。」



「中国建築書の営造方式によれば、梭柱は柱を3分割し、上の3分の一をさらに三分割して順次細くする(巻杀)。そして柱頭は饅頭形に丸める(緊杀)。さらに下の3分の一は、中間の3分の一の下端と同じ太さに揃える手法だそうです。」



「緊杀は天平建築に見られ、東大門は巻杀も行い、明らかに梭柱の影響が伺えるそうですが、法隆寺金堂や中門はこの手法には従っていないようです。」



「ただ、営造方式は法隆寺金堂よりかなり時代が下るわけですから、金堂や中門が非常に古い梭柱を示していると解釈することも可能かもしれません。」



「従って、金堂や中門の徳利柱の起源は中国にあり、とすることには否定しません。」



彼としては、新式の梭柱が天平時代の建築に見られること、彼が徳利柱と呼ぶ法隆寺の古式の胴張りがそれと異なることを指摘しているのである。 そして、それは正しい。 これに対するジョン君の反論は正視に堪えないので、引用しないでおこう。



要するに、中国の胴張りの様式は隋唐を境に変化している。 下から三分の一を最も太くする古式の胴張りは恐らく南北朝時代の中国に発して三国時代の韓国を経て日本の法隆寺や後代の韓国建築に残り、その後、中国本土においては中間部を直柱とする新式へと切り替わった。 新式の胴張りは天平建築に残り、北宋の官式建築にも採用されて営造法式に記され――やがて中国では姿を消した、という解釈が成り立つわけである。



結局のところ、仮に梭柱の形式に差異があるという論理に換骨奪胎しても、上掲の反論はやはり成り立たないようだ。 現存する韓国建築に残る胴張りは宋由来、という主張は依然として誤りである。 まあそのこと自体はどうでもいいが、新たな知見が得られた点に関しては、ここで栄養市民のレスを顕彰しておきたいと思う。



두 엔타시스

「기둥의 엔타시스는 그리스풍」이라고 제목을 붙인 앞의 투고에서는, 호류사 엔타시스의 그리스 기원설이 양언 되었던 시대의 사상적 배경을 설명했다. 일본 건축과 그리스와의 관계가 훤전된 것은, 그리스 건축의 영향의 정도에 대해 아시아 건축의 가치를 측정하려고 하는 유럽의 시선에의 응답은 아닌가, 라고 하는 것이 거기서의 나의 주장이다.

그런데 , 그러한 주제와는 별도로, 아마 반론의 작정일 것이다가, 「엔타시스는 한국 기원은 아니고 중국 기원이다」라는 취지의 레스를 써 늘어 놓는 사람들이 있었다. 원래 나는 동아시아의 몸통 의욕이 고대 중국에서 발생해 한국 일본에 전파 했다고 하는 가설--물론, 가설이다--가 현시점에서 가장 개연성이 높다고 생각하고 있고, 중국 기원일 가능성을 본문중에서 명시해도 있지만, 상대가 말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은 것을 올바르게 파악하는 능력을 가지지 않는 인간도 세상에는 적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뭐, 아무래도 좋다. 단지, 존군이 일부러 스레를 세워 행한 이하의 주장에 대해서는, 그 나름대로 재미있는 화제이므로, 재차 여기에 다루기로 한다. 가라사대,

그리고, 왜 현대의 조선에 「사주」가 남아 있는가 하면, (쿠다라)백제는 정도 없게 멸망 하고 있고, 거의 관계없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자, 지금의 한국에 남는 사주는 어디에서 왔어?(와)과.

「송」에 있어서의 마지막 사주의 유행.고려는 몽고에 지배될 때까지, 그렇다면 이제(벌써) 송을 리스페크트 하는 것 심하고, 몽고에 지배된 후도 그지그지와 송에 대한 열정을 더해갑니다.이 시대에, 유입한 송의 건축 양식이, 몽고에 대한 문화적 반발등으로 결합되어, 형태로서 고정화되었다고 생각하는 분이 타당하지.( ′H`) y-~~

뭐, 현재 한국에 있는 사주를 가지는 건축물의 형식은, 육조 양식에서는 전혀 없는 것이라서···그것이 상기 추측의 이유야.


문장이 산만으로 쓸데 없는 언사가 많지만, 요약하면, 후대의 한국 건축은, 육조 양식은 아니기 때문에, 그 사주는 송유래의 것이며, (쿠다라)백제와 관계가 없는 것이다, 라고 하는 주장한 것같다.

말할 필요도 없이--매번과 같이--논리 과정으로서는 전혀 성립되지 않는 주장이다. 고려 이후의 한국 건축 가운데, 기둥의 몸통 의욕이 현저한 것은 주로 주심 파오계의 건축이다. 이것은「육조 양식」인지는 아니지만, 송양식에서도 한층 더 없다.


좌:다포계 건축. 우:주포계 건축.


사주를 가지는 송양식의 예로서 존군이 둔, 화하야시지 오토노(964년).


송대 이후의 중국 건축은, 건축물의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두는, 이른바 힐조 혹은 다포식의 양식을 상으로 한다. 존군이 주장하도록(듯이), 현존 하는 한국 건축의 몸통 의욕이 송유래이며, 그 이전의 시대와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이면, 그 몸통 의욕은 다포계 건축에 대해야만 볼 수 있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실제는 역이다. 몸통 의욕이 현저한 것은, 주도에만 공포를 두는, 따라서 당대 이전의 중국 건축의 계보에 늘어서는 주심 파오계 건축이다.

원래 신양식의 도입은, 구양식의 완전한 폐기를 의미하지 않는다. 한국 건축이 중국 건축의 특정의 양식을 도입했다고 하고, 건축의 제요소의 전체가 중국 양식에 따르는 필연성은 없고, 또 실제로 그러한 예도 없다. 이식에 즈음해서는 의도하면 키바구니와에 관련되지 않고, 요소의 취사 선택을 한다. 따라서,「한국 건축이 육조 양식인가 아닌가」, 이라고 하는 문제구제 자체가 의미를 이루지 않는다. 물을 수 있는 것은「어느 부분에 육조 양식으로부터의 영향을 볼 수 있을까」이다. 어느 부분에 송양식을 도입했다고 해도, 다른 부분에서는 종래부터 계승되는 것도 있었을 것이다. 일본에 있어 텐표우시대에 중국 양식식이 이식된 때에도, 아스카 시대부터 계승된 평행 서까래의 요소가 남은 것처럼, 후대의 한국이 당이나 송의 양식을 도입했다고 해도, 삼국시대로부터 몸통 의욕이 계승되는 것은 당연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존군의 반론의 논리 과정에 대해 말하면, 주장자의 논리에 대한 이해의 수준을 반영한 참담이라는 자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그 하자는 보통 지능이 있으면 누구라도 눈치채는 것이기 때문에, 본래는 상기와 같은 반박의 노를 취할 필요도 없겠지. 단지, 그의 결론에 대해서는 흥미롭게 느낀 것도 여기에 고백해 두자.


그 문장을 읽어 최초로 생각한 것은,「송대의 사주의 양식이, 남북조 시대의 사주와 구체적인 차이를 가져, 고려 이후의 한국 건축의 사주가 후자가 아니고, 전자이라고 변별 할 수 있다」경우에, 아마 이러한 추측은 성립될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었다. 만일 그가 그러한 논리 구축에 의해서 상술의 주장을 실시하고 있으면, 나도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는 무리한 상담이므로, 여기서 만일 내가 주장해 보기로 하자. 정직한 곳 나는 송대와 남북조 시대의 사주의 차이등 생각했던 적이 없었으니까, 그 둘이 다르다고 하는 일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덧붙여서 내가 알고 있는 한국 건축의 몸통 의욕이란, 예를 들면 이러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기둥 높이아래로부터 3 분의 1의 근처를 가장 굵게 해, 주도는 근간보다 가늘게 한다.」( 「한국의 건축」장경호) 「기둥의 전체의 길이 가운데, 아래로부터 1 / 3 정도의 높이까지 기둥의 굵기가 점차 커져 가서 거기로부터 점차 굵기를 줄이는 형상」( 「한국 전통 건축: 정원·누각·불사리를 안치하는 탑」한국 전통 건축 연구회)――즉 한국에서 베후림(몸통 의욕)으로 불리고 있는 것은, 아래로부터 3 분의 1의 높이로 가장 기둥을 굵게 하는 형상인것 같다.실제, 부석사 무량수전의 기둥을 봐도 그렇게 되고 있다.

이것에 대해, 송대의 사주와는 어떠한 것인가. 북송 시대에 편찬 된 건축 기술서인 「조영 법식」에 의하면, 이 시대의 사주의 정식적 방법은, 기둥을 상·안·하에 3 분해, 중단은 직선, 상·하단을 쇠퇴에 성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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