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의 고구려 원정은 598년,612-613해의 3회 행해져(614년은 망명자의고사정을 수에 인도해, 수에의 조공을 조건으로 강화), 첫번째는 악천후와 역병에 의해 철퇴.3번째는 반란으로 철퇴, 4번째는 조공의 불이행을 이유로 계획을 세웠지만 국내가 불안정화해 실행되지 않고.
문제는 2번째의 612년의 물건으로 자신이 조사한 곳, 수는 30.5만을 칭하는 대군.한국의 주장이라면 113만으로, 한국인의Japmoney는 설명 할 수 없지만 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만,
1600년의 세키가하라에서 양군 합해 20만 정도라고 말해진다.1619년의 사르후의 싸움으로 명군(조선병 포함한다)이 16만(45만으로 칭한다), 누르하치의 잔금군이 6만.1636년의 혼타이지의 조선 정벌로 12만, 증기 기관 이후의 동력이 있는 러일 전쟁의 제로로 70만, 일본에서 65만으로 수의 113만은 어디의 나라, 시대이기도 한 전과의 과장 표현이지요.
한국의 주장대로로 하려면 113만명 분의 음료수, 식량 관리에 진군 경로, 기지의 설영, 도중에 역병에 의한 철퇴를 피하기 위해 위생 환경의 유지(한국은 구축함으로 corona의 클러스터 일으켰지)와 4600만의 나라를 할 수 있는 한계를 가볍게 넘을 수 있는 느낌입니다.
이것이라도 113만을 분산시키지 않고 1이나 곳에 모아 격파하는 한국이 주장하는 승리 조건을 채우는 일과 비교하면 현격히 편합니다.한국의 망상을 채우는 방법은 자신에게는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한니발의 알프스 넘어는 코끼리로 알프스를 넘는 터무니 없는 것으로 로마와의 회 적전에 5만이라고 해지는 전력의 반수 이상과 상병의 대부분을 잃고 있습니다.한국사의 조건을 채우는 일과 비교하면, 코끼리로 알프스를 넘는 것이 터무니 없어도 실현될 수 있을 뿐(만큼) 좋습니다.
隋の高句麗遠征は598年、612-613年の3回行われ(614年は亡命者の斛斯政を隋に引き渡し、隋への朝貢を条件に講和)、一度目は悪天候と疫病により撤退。3回目は反乱で撤退、4回目は朝貢の不履行を理由に計画を立てたが国内が不安定化し実行されず。
問題は2回目の612年の物で自分が調べた所、隋は30.5万を号する大軍。韓国の主張だと113万で、韓国人のJapmoneyは説明出来無いけど出来たと主張していますが、
1600年の関ヶ原で両軍合わせて20万程度と言われる。1619年のサルフの戦いで明軍(朝鮮兵含む)が16万(45万と号する)、ヌルハチの後金軍が6万。1636年のホンタイジの朝鮮征伐で12万、蒸気機関以降の動力が有る日露戦争の帝露で70万、日本で65万と隋の113万は何処の国、時代でもある戦果の誇張表現でしょう。
韓国の主張通りにするには113万人分の飲料水、食糧管理に進軍経路、基地の設営、途中で疫病による撤退を避ける為に衛生環境の維持(韓国は駆逐艦でcoronaのクラスター起こしたよね)と4600万の国がやれる限界を軽く越えられる感じです。
これでも113万を分散させずに1か所に纏めて撃破する韓国の主張する勝利条件を満たす事と比べれば格段に楽です。韓国の妄想を満たす方法は自分には想像できませんでした。
ハンニバルのアルプス越えは象でアルプスを越える無茶な物でローマとの会敵前に5万と言われる戦力の半数以上と象兵の殆どを失っています。韓国史の条件を満たす事と比べれば、象でアルプスを越える方が無茶でも実現できるだけマシで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