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치지마 사건 진상의 일단
~미 포로의 처형에 입회한 있다 소위의 증언~
치치지마 사건과는 제2차 대전 말기, 도쿄도 오가사 마을의 치치지마에서 일어난 미국 포로 장교등의 일련의 처형 사건.BC급 전범 재판의 하나로서 알려지지만, 오늘의 보고로는 처형 사건 중 한 건에 입회했다고 하는 있다 소위(정확하게는 소위 후보생)의 목격 증언의 내용을 전하고 싶다.
동후보생은 일본 변호사 연합 전 회장으로, 전후 보상 재판의 하나로 현재 계쟁중의 쥬우케이대 폭격 소송의 변호 단장을 맡고 있는 츠치야공헌씨(85세).이 사건의 청년·츠치야에게 준 영향은 크고, 변호사 활동의 원점이 되었다.
치치지마에
구제 시즈오카 고교시절의 1943년 11월에 학도 출진해, 훈련을 거쳐 1945년 1월에 도쿄에서 남 약 1300킬로의 오가사와라제도·치치지마의 제2 어뢰정대에게 배속되었다.덧붙여서 동섬의 남 약 200~300킬로에 있는 이오지마에 미군이 상륙한 것은 동년 2월, 다음달에 동섬의 일본군수비대는 전멸 하고 있다.
치치지마 사건에 대해서는 미군의 포로 파일럿을 추적 조사 한 「부친들의 성조기」의 저자로 알려진 제임스·브랏드레이의 2권째의 저작 「FLY BOYS」에 자세하게 쓰여져 있다.공교롭게도 이 저작은 국역 되어 있지 않다.
저서의 내용을 조금 융`미 개입시키고 싶다.치치지마 주변에서 추락해 포로가 된 미군 파일럿 8명의 그 후의 운명을 일·미 쌍방의 관계자의 증언을 기초로 집계한 것이다.해상에 착수했기 때문에, 미 잠수함에 구출된 죠지·부시(요네모토 대통령)도 나오는 이색 문서이다.8명중에 워렌·아르·뼈라고 하는 포로 장교가 가끔 등장한다.츠치야씨가 회화를 주고 받게 된 것은 이 뼈였다.
포로와의 일주일간
포로의 파일럿은 치치지마에 배치된 부대 마다 한 명씩 맡았다고 한다.어뢰정대에서는 뼈를 맡았다.처형까지의 기간은 적어도 일주일간은 있었다.이전, 변변치않은 영어로 뼈와 회화를 주고 받을 기회가 있었다.뼈는 해군 중위로 22세.츠치야씨는 소위 후보생으로 21세.당시 , 일본은 셈으로 연령을 말하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뼈에는 「The sameage」(동갑이구나)이라고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라고 츠치야씨는 말하고 있다.
처형 당일(브랏드레이의 저서에 의하면, 3월 17일), 츠치야씨는 당직 장교였다.뼈의 눈 가림을 해, 처형 장소에 데려 가는 것도 츠치야씨의 임무.이미 처형되는 것을 각오하고 있다고 보이고, 떠들지 않고, 원인 듯하지 않고, 종용으로서 처형 장소에 임한 모습을 잊을 수 없다.「어머니 한 명, 아이 한 명」 「나라(미국)에서는 어머니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츠치야씨는 뼈와의 회화속에서 지금도 뇌리로부터 멀어지지 않는 말이라고 이야기했다.이런 인간을 호락호락 처형하는지 생각했다고 한다.
전범 용의와 근소한 차이
츠치야씨는 당초, 포로를 파면하는 것이 명령되고 있었다.츠치야씨는 학생시절, 검도를 하고 있어 2단이었다.상관은 그것을 알고 있어 그러한 명령이 나와 있었다.군대에서는 상관의 명령에는 거역할 수 없다.그런데 그 후, 학도 출진조안에 4단이 있는 것을 알아, 그가 뼈의 목을 쳤다.전쟁이 끝나, 그는 전범 용의에 추궁 당해 잘 도망치지 못하고 고향에서 자살했다.츠치야씨는 만약 그 때, 당초의 명령 대로 자신이 자르고 있으면, 자신이 살인 용의의 전범이 되어 있었다.츠치야씨는 치치지마 사건의 진상의 일단을 이상의 같게 말했다.
실제, 전장과는 비참하고, 어리석은 것.그러한 현실을 눈앞으로 한 것이, 전쟁을 반복해 안 된다라고 하는 생각으로 연결되어, 변호사에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츠치야씨는 단속했다.
기록과 표현
츠치야씨의 증언으로부터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점이 몇개인가 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치치지마 사건은 처형한 포로의 인육 식사건에 살짝 바꿀 수 있어 일의 진상이 애매하게 되어 북 싫지만 있다.예를 들면, 진쿠니히코씨의 「쇼와사의 수수께끼를 쫓는다(아래)」(후미하루 문고)의 제32장 「인육 사건의 치치지마로부터 생환한 부시」로, 진씨는 「살해한 뒤, 뼈의 고기나 내장을 골라내 시체를 손괴」라는 미군일법정의 기소장을 인용하면서, 「인육식에의 언급은 없지만, 관계자의 회상에 의하면
」이라고 해, 인육식에 묶으려고 하는 문맥으로 이 부분은 구성되어 있다.
츠치야씨의 증언에 의하면, 뼈의 살해된 날, 츠치야씨는 당직 장교로, 그 심야, 굶주림에 괴로워하는 군사 2명이 뼈의 사체를 파내 먹으려고 하는 것을 경고하고 있어 또 뼈의 목을 친 장소는 「모래 사장」(진씨)이 아니고, 미군의 포탄으로 구멍이 열린 흙위.뼈의 고기를 먹었다는 것은 사실 에 반한다, 라고 츠치야씨의 어투는 날카로왔다.
향후의 나의 과제의 하나는, 치치지마 사건의 전범 재판은 미 해군의 괌 군사법정으로 열리고 있어 이 기록을 맞을 필요가 있다.그러나 전승국이 패전국을 재판한 전범 재판인 이상, 판결이 반드시 공정한 중재를 반영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츠치야씨의 증언에는, 기록과 표현 후에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가 있다 일을 제기하고 있다고 나는 받아 들이고 있다.그러나, 츠치야씨의 증언에 의해서, 사건의 진상의 일단이 밝혀진 것처럼 생각한다.
이상을 가지고, 츠치야씨로부터 들은 「치치지마 사건 진상의 일단」의 중간 보고로 하고 싶다.
父島事件 真相の一端
〜米捕虜の処刑に立ち会ったある少尉の証言〜
はじめに
父島事件とは第二次大戦末期、東京都小笠村の父島で起こった米国捕虜将校らの一連の処刑事件。BC級戦犯裁判の一つとして知られるが、本日の報告では処刑事件のうちの一件に立ち会ったというある少尉(正確には少尉候補生)の目撃証言の内容を伝えたい。
同候補生は日弁連元会長で、戦後補償裁判の一つで現在係争中の重慶大爆撃訴訟の弁護団長を務めている土屋公献さん(85歳)。この事件の青年・土屋に与えた影響は大きく、弁護士活動の原点になった。
父島へ
旧制静岡高校時代の1943年11月に学徒出陣し、訓練を経て1945年1月に東京から南約1300キロの小笠原諸島・父島の第二魚雷艇隊に配属された。ちなみに同島の南約200〜300キロにある硫黄島に米軍が上陸したのは同年2月、翌月に同島の日本軍守備隊は全滅している。
父島事件については米軍の捕虜パイロットを追跡調査した『父親たちの星条旗』の著者で知られるジェームズ・ブラッドレーの二冊目の著作『FLY BOYS』に詳しく書かれている。あいにくこの著作は邦訳されていない。
著書の内容をちょっと紹介したい。父島周辺で墜落し捕虜となった米軍パイロット8人のその後の運命を日米双方の関係者の証言をもとにまとめたものだ。海上に着水したため、米潜水艦に救出されたジョージ・ブッシュ(米元大統領)も出てくる異色ドキュメントである。8人の中にウオーレン・アール・ボーンという捕虜将校がたびたび登場する。土屋さんが会話を交わすことになったのはこのボーンだった。
捕虜との一週間
捕虜のパイロットは父島に配置された部隊ごとに一人ずつ預かったという。魚雷艇隊ではボーンを預かった。処刑までの期間は少なくとも一週間はあった。この間、つたない英語でボーンと会話を交わす機会があった。ボーンは海軍中尉で22歳。土屋さんは少尉候補生で21歳。当時、日本は数えで年齢を言う習慣があったから、ボーンには「The same age」(同い年だね)と言ったことを覚えている、と土屋さんは語っている。
処刑当日(ブラッドレーの著書によると、3月17日)、土屋さんは当直将校だった。ボーンの目隠しをし、処刑場所に連れていくのも土屋さんの任務。既に処刑されることを覚悟しているとみえて、騒がず、わめかず、従容として処刑場所に臨んだ姿が忘れられない。「母一人、子一人」「国(米国)では母が首を長くして待っている」。土屋さんはボーンとの会話の中でいまでも脳裏から離れない言葉だと話した。こういう人間をむざむざと処刑するのかと思ったという。
戦犯容疑と紙一重
土屋さんは当初、捕虜の首を切ることを命令されていた。土屋さんは学生時代、剣道をしていて二段だった。上官はそれを知っていてそういう命令が出ていた。軍隊では上官の命令には逆らえない。ところがその後、学徒出陣組の中に四段のいることが分かり、彼がボーンの首をはねた。戦争が終わり、彼は戦犯容疑に問われ、逃げ切れずに郷里で自殺した。土屋さんはもしあのとき、当初の命令通り自分が切っていたら、自身が殺人容疑の戦犯になっていた。土屋さんは父島事件の真相の一端を以上のように語った。
実際、戦場とはむごく、愚かなもの。そういう現実を目の当たりにしたことが、戦争を繰り返してはいけないという思いにつながり、弁護士への道を歩むことになったと土屋さんは締めくくった。
記録と表現
土屋さんの証言から考えなければならない点がいくつか挙げられるように思う。父島事件は処刑した捕虜の人肉食事件にすり替えられ、事の真相があいまいにされてきたきらいがある。例えば、秦郁彦氏の『昭和史の謎を追う(下)』(文春文庫)の第32章「人肉事件の父島から生還したブッシュ」で、秦氏は「殺害したあと、ボーンの肉や内臓を摘出して死体を損壊」との米軍事法廷の起訴状を引用しながら、「人肉食への言及はないが、関係者の回想によると…」とし、人肉食に結びつけようとする文脈でこの部分は構成されている。
土屋さんの証言によると、ボーンの殺害された日、土屋さんは当直将校で、その深夜、飢えに苦しむ兵2人がボーンの遺体を掘り起こし食べようとするのを戒めており、またボーンの首をはねた場所は「砂浜」(秦氏)でなく、米軍の砲弾で穴の開いた土の上。ボーンの肉を食ったというのは事実に反する、と土屋さんの語気は鋭かった。
今後の私の課題の一つは、父島事件の戦犯裁判は米海軍のグアム軍事法廷で開かれており、この記録をあたる必要がある。しかし戦勝国が敗戦国を裁いた戦犯裁判である以上、判決が必ずしも公正な裁きを反映しているとは限らない。
土屋さんの証言には、記録と表現の上で考えなければならない問題があることを提起していると私は受け止めている。しかし、土屋さんの証言によって、事件の真相の一端が明らかにされたように思う。
以上をもって、土屋さんから聞いた「父島事件 真相の一端」の中間報告とした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