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사람들은 많은 관계를 맺고 , 유지하고, 또 깨면서들 살아간다.
관계라고 표현되는 이 단어의 산술적 의미나 한 번 풀어 볼까나...
인간은 어차피 사회적 동물이니만큼 혼자선 절대로 살아 갈 수가 없다.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다면 인간은 좀 더 자유로울 수도 있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팝송 중 킹 크림슨의 에피타프(Epitaph)라는 노래가 있다.
런닝타임이 한참 긴 노래 중 한곡인 이노래를 난 순전히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나는 가사 때문에 좋아 한다.
후렴부의 Confusions will be my epitaph—-라는 귀절의 해석을 위하여 며칠 밤을 지새웠던 기억이 새롭다.
팝송중엔 의외로 가사를 음미해 볼 가치성이 있는 노래들이 많다.
Stairways to Heaven 같은 노래도 정말 명시 중의 명시다.
헉!
얘기가 엉뚱한 곳으로 갔군...
다시 돌아와서—-
우리가 보통 감정이 머리 끝까지 올랐을 때 표현 하는 말...
"너 반 죽을 줄 알아—-"
반 죽으면 그럼 반은 살아 있는 게 된다.
半을 수학적으로 표기하면 1/2
그럼 반 죽음 = 반 생(삶) 즉 1/2 죽음 = 1/2 삶 이 된다...
양변에 2를 곱하면 죽음 = 삶이 되는 것이다.
이 공식이 바로 Epitaph가 절규하듯 주장하는 인생의 논리다.
난 어릴 때(고딩 때 생각) 모든 관계에서 반 이상 남는 장사를 하려고 생각 했었다.
친구와의 교우 관계에서도 그렇구—-
아버님이 지방국세청 고위 공무원 출신의 세무사이셨던 까닭에 난 별로 어려운 생활을 해 본 기억이 없다.
부모님 모두 일본에서 공부 하신 탓인지 상당히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성장 했던 것 같다.
아버님의 수리관념 덕분에 아직도 난 숫자와 씨름하며 살고 있지만 한 번도 내가 택한 이 길을 되돌아 보고 후회한 적은 없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공짜가 없다는 진실을 깨우쳐 주신 아버님을 난 실제로 존경한다...
말 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을 빼곤—-
그래서 난 어릴 때도 모든 관계를 숫자로 풀곤 했다.
저 친구는 몇 점일까?
저 친구는 몇 % 정도의 완벽성을 갖추고 있을까?
저 집은 얼마일까? 등 등 모든 게 숫자와 관련이 있었다.
다시말해 사람에게 숫자를 붙이는 일련의 작업을 통해 난 인간 관계를 만들어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심취해서 읽었던 백광출판사란 회사에서 출간한 “태극기”라는 책을 보고 동양철학과 서양의 과학이 접목되는 야릇한 체험을 하였다.
태극의 괘와 컴퓨터의 이진법...
우주 만물의 기본 숫자인 3
이 관계에서 이진법을 팔진법으로 바꾸고 또 10진법으로 바뀐 수를 16진법으로 바꾸고—-
그러면서 난 한없이 그 신비함에 빠졌던 기억이 난다.
물론 지금은 기억의 저편으로 넘겨 놓은 상태이지만—-
난 거기서 친구와의 관계를 數理로 푸는 요령(?)을 터득 했던 것이다.
거기에다 고전시간에 배우는 공자님, 맹자님 말씀은 왜 그리 좋았던지^^
지금도 가끔 쓰는 고사성어가 그때 실력이라면 왜 다 안 믿을까?
하여간 좋은 친구간의 산술적 의미는 마음의 숫자로 계산된다는 진리를 터득하기 가진 별로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 진정한 맘을 알기 위해선 때론 현실적 수치(물질)를 더 주어야 하고 또 잃어야 함이 많을 때가 훨씬 다반사이다.
최악의 조건일 때 그 사림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게 아닐까?
우린 친구의 개념을 거의 동년배로 생각 하지만 서구의 사람들은 이성과 나이를 초월하여 친구라는 표현을 쓴다.
난 적어도 친구에 대한 정의만큼은 서구의 사고 방식을 따르며 사는 사람이다.
필요할 때의 다가갈 수있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이다.
그건 算數가 필요하질 않으니 말이다...
한(?) 철학의 대가 Whistler wrote.
인생에서 사람들은 많은 관계를 맺고 , 유지하고, 또 깨면서들 살아간다.
관계라고 표현되는 이 단어의 산술적 의미나 한 번 풀어 볼까나...
인간은 어차피 사회적 동물이니만큼 혼자선 절대로 살아 갈 수가 없다.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다면 인간은 좀 더 자유로울 수도 있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팝송 중 킹 크림슨의 에피타프(Epitaph)라는 노래가 있다.
런닝타임이 한참 긴 노래 중 한곡인 이노래를 난 순전히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나는 가사 때문에 좋아 한다.
후렴부의 Confusions will be my epitaph---라는 귀절의 해석을 위하여 며칠 밤을 지새웠던 기억이 새롭다.
팝송중엔 의외로 가사를 음미해 볼 가치성이 있는 노래들이 많다.
Stairways to Heaven 같은 노래도 정말 명시 중의 명시다.
헉!
얘기가 엉뚱한 곳으로 갔군...
다시 돌아와서---
우리가 보통 감정이 머리 끝까지 올랐을 때 표현 하는 말...
"너 반 죽을 줄 알아---"
반 죽으면 그럼 반은 살아 있는 게 된다.
半을 수학적으로 표기하면 1/2
그럼 반 죽음 = 반 생(삶) 즉 1/2 죽음 = 1/2 삶 이 된다...
양변에 2를 곱하면 죽음 = 삶이 되는 것이다.
이 공식이 바로 Epitaph가 절규하듯 주장하는 인생의 논리다.
난 어릴 때(고딩 때 생각) 모든 관계에서 반 이상 남는 장사를 하려고 생각 했었다.
친구와의 교우 관계에서도 그렇구---
아버님이 지방국세청 고위 공무원 출신의 세무사이셨던 까닭에 난 별로 어려운 생활을 해 본 기억이 없다.
부모님 모두 일본에서 공부 하신 탓인지 상당히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성장 했던 것 같다.
아버님의 수리관념 덕분에 아직도 난 숫자와 씨름하며 살고 있지만 한 번도 내가 택한 이 길을 되돌아 보고 후회한 적은 없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공짜가 없다는 진실을 깨우쳐 주신 아버님을 난 실제로 존경한다...
말 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을 빼곤---
그래서 난 어릴 때도 모든 관계를 숫자로 풀곤 했다.
저 친구는 몇 점일까?
저 친구는 몇 % 정도의 완벽성을 갖추고 있을까?
저 집은 얼마일까? 등 등 모든 게 숫자와 관련이 있었다.
다시말해 사람에게 숫자를 붙이는 일련의 작업을 통해 난 인간 관계를 만들어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심취해서 읽었던 백광출판사란 회사에서 출간한 "태극기"라는 책을 보고 동양철학과 서양의 과학이 접목되는 야릇한 체험을 하였다.
태극의 괘와 컴퓨터의 이진법...
우주 만물의 기본 숫자인 3
이 관계에서 이진법을 팔진법으로 바꾸고 또 10진법으로 바뀐 수를 16진법으로 바꾸고---
그러면서 난 한없이 그 신비함에 빠졌던 기억이 난다.
물론 지금은 기억의 저편으로 넘겨 놓은 상태이지만---
난 거기서 친구와의 관계를 數理로 푸는 요령(?)을 터득 했던 것이다.
거기에다 고전시간에 배우는 공자님, 맹자님 말씀은 왜 그리 좋았던지^^
지금도 가끔 쓰는 고사성어가 그때 실력이라면 왜 다 안 믿을까?
하여간 좋은 친구간의 산술적 의미는 마음의 숫자로 계산된다는 진리를 터득하기 가진 별로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 진정한 맘을 알기 위해선 때론 현실적 수치(물질)를 더 주어야 하고 또 잃어야 함이 많을 때가 훨씬 다반사이다.
최악의 조건일 때 그 사림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게 아닐까?
우린 친구의 개념을 거의 동년배로 생각 하지만 서구의 사람들은 이성과 나이를 초월하여 친구라는 표현을 쓴다.
난 적어도 친구에 대한 정의만큼은 서구의 사고 방식을 따르며 사는 사람이다.
필요할 때의 다가갈 수있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이다.
그건 算數가 필요하질 않으니 말이다...
한(?) 철학의 대가 Whistler wro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