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일본인 대책 (회유책)
1223년 고려에 일본인가 침범했다는 기록이 있고
1227년 1260년 1263년 1367년 1375년 1377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일본에 사신을 보내며
일본인 금지 요청을 하였다
1360년
일본인는 강화를 습격하여 300명을 죽이고 미곡 4만석을 탈취해 갔다
1367년
고려는 金龍을 교토로 보내고 아시카가 막부에게 일본인의 침략을 중지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막부는 金龍을 天龍寺에 머물게 하고 승려 妙芭에게 고려에 답서를 쓰게 하였다
답서는
일본인는 큐슈 등지의 해적들이 벌이는 행위이며 장차 일본인를 금지할 대책을 마련하겠다
라고 썼다
막부는 金龍 등 고려의 사신이 귀국할 때 까지 승려 범탕을 동행시켜 고려에 답서를
전달하였다
1375년 羅興儒를 사신으로 파견하여 일본인 금지 요청을 한다
1376년 崔瑩은 부여 흥산에 상륙한 일본인를 격퇴하였다
1377년 鄭夢周를 사신으로 파견하여 이미가와 료순 (今川了俊)에게 일본인 금지 요청을 하고
포로 수백명을 데리고 왔다
1378년 고려는 포로 송환에 대한 답례로 今川了俊에게 사절을 보내며 일본인 통제를 요청하며
그에게 금 은 호표피 등 선물을 주었다
고려의 일본인 대책은 초기에는 중앙 막부에 사신을 보내고 일본인 금지 요청을 하는 것이었으나
약속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의 침입이 계속되고 있어
막부에서 큐슈 등 변경지역 실력자들과 교섭하며 일본인에 대한 실질적 금지 요청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계속되는 일본인 침입으로 고려는 외교적 교섭으로 일본인를 완전히 통제한다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군사적 대책을 마련하게 된다
고려의 일본인 대책 (군사적 대책 )
崔茂宣
고려는 일본인의 주요 침입지역 각지에 城을 쌓고 진수군 (鎭戍軍)이라고 불리는 지방군을 증설하였다
또 수군에 해당되는 기선군 (騎船軍)을 정비하여 배를 조종하는데 뛰어난 사람을 뽑아 수군에
배속하고 벼슬을 주었다
崔茂宣은 화약 제조에 성공하여 화포를 생산하고 화통방사군 이라는 화기 전문 부대를 만든다
1380년 최무선 (崔茂宣)은 금강 하구 진포 (鎭浦)에서 일본인를 격퇴하였다
1380년 9월 荒山大捷
그런데 진포에서 패했던 일본인가 다시 상륙하여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지방에서 민간인 학살과
방화를 저지르며 이 황산 일대에 몰려들었다 李成桂는 이 황산 일대에서 阿只拔都가 이끄는
일본인를 격퇴하였는데 이것을 황산대첩 이라고 한다
1383년 鄭地가 진도에서 화포를 이용하여 일본인를 격퇴하였다
1389년 고려는 100척의 병선을 동원하여 일본인의 근거지 쓰시마를 공격했고
이렇게 고려의 골칫거리였던 일본인의 기세는 쇠락해져 갔다
조선의 일본인의 대책 (회유책)
그러나 조선 초기에 일본인는 또 다시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1392년 조선 太祖는 승려 각추를 무로마치 막부에 보내고 일본인 금지 요청을 하였다
아시카가 요시미츠 (足利義滿)은 일본인들의 통제와 한국인 포로 송환을 약속하고 승려 수윤(壽允)을
회답사로 조선에 파견하였다
1394년 7월 큐슈의 실력자 이미가와 료순 (今川了俊은 한국인 포로 659명을 송환하고
일본인 금지 약속을 한다 또 1395년에 포로 570명을 송환하였다
조선은 今川了俊에게 감사 사절을 보내며 토산물과 대장경 등 선물로 주었다
그런데 큐슈의 또 다른 실력자 오우찌는 조선에 사절을 보내며 토산물을 헌상하며 일본인 금지
약속을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대장경을 선물로 줄 것을 요구하였다
1395년 이후 일본은 조선에 일본인 금지 약속과 포로 송환을 내세워 조선의 하사품과 바꾸는 형태로
조선과 외교 교섭에 나서고 있었다
조선의 일본인 대책 (군사적 대책)
조선의 이러한 회유책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는 조선에 침입하여 여러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1414년 9월 형조에 올린 보고 내용에는
왜인들이 이익을 탐하는데 부끄러웁 없이 배에서 내리자마자 물건을 요구하고
고을에서 표독한 짓을 하며 칼로 백성들을 상하게 하며 재물을 약탈하니 그 부도덕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인이 왕래하며 죄를 범하면 대명율 (大明律)로 다스려 주십시요
라고 쓰고 있다
1419년 대마도 정벌
1419년 5월 일본인는 남해안 서해안을 거치고 충청도 서천 지방과 황해도 해주까지 상륙하여
노략질을 하였는데 조선은 이것을 대마도 島主 소우 사다모리 (宗貞盛)에 의한 선동이라고 보고
쓰시마 정벌을 계획하게 되었다
1419년 6월
조선은 李從茂가 대마도를 정벌하고 일본인를 제압한 후 일본인들의 조선 출입을 통제하였다
일본은 대마도 에서 조선과의 교역이 어렵게 되자 끈질기게 조선에 통교할 것을 요구한다
1419년 태종은 대마도 島主에게
대마도 라는 섬은 원래 경상도 계림에 예속했으니 본디 우리나라 (조선)의 땅이라는 것이
문적에 실려 있어 분명히 상고할 수 있다 라며 항복 권고문을 보냈고
1436년 대마도 島主는 대마도를 조선의 지방으로 편입해 줄 것을 조선 세종에게 상소문을
올렸고 조선은 대마도 島主를 태수로 봉했다
퇴계 이황 (李滉)
일본의 끈질긴 요구로 조선은
1426년 일본에 3포 즉 부산포 齊浦 鹽浦를 개항하여 이곳에서만 교역을 허락하였는데
일본인들이 교역 확대를 요구하며 폭동을 일으켜 교역이 중단되기도 하였다
특히 1510년에는 3포 倭亂이 일어난다
1545년 대마도 島主는 일본인가 조선에 침입한 것을 사죄하며 평화 조약을 맺을 것을
요청하였는데 조선은 거절하였다
1545년 당시 퇴계 李滉 선생은
甲辰乞勿絶倭使疏 라는 상소를 올렸는데
倭는 야만이므로 야만은 야만을 대하는 법에 따라야 한다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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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 이어 조선시대에도 일본인 문제는 끊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조선은 일본인들의 일본인 행위를 막기 위해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거나 국교를 열어 교역을
허용하는 등 평화적 교섭으로 일본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일본인들은 이런 조선의 평화적 교섭에 호응하며 왕래하고 있었지만
(일본은 일본의 국내 사정 등 일본인 문제를 완전히 통제하는데 실패를 한다 )
일본인는 약탈 방화 학살 등 여러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조선이 이황 선생의 상소를 경고로서 받아들이고 군사력 증강에 힘썼다면
.....하는 안타까움이 남습니다
高麗の倭寇対策 (懐柔策)
1223年高麗に倭寇が侵犯したという記録があって
1227年 1260年 1263年 1367年 1375年 1377年など何回にかけて日本に使臣を送って
倭寇禁止要請をした
1360年
倭寇は強化を襲って 300人を殺して米穀 4万石を奪取して行った
1367年
煮こもうとする 金竜を京都に行かせて足利幕府に倭寇の侵略を中止することを要請した
ここに幕府は 金竜を 天竜寺にとどまるようにして僧侶 妙芭に高麗に答書を使うようにした
らしくては
倭寇は九州等地の海賊たちがする行為で将来倭寇を禁止する対策を用意する
と書いた
幕府は 金竜 など高麗の使臣が帰国するまで僧侶ボムタングを 同行させて高麗に答書を
伝達した
1375年 羅興儒を使臣で派遣して倭寇禁止要請をする
1376年 崔瑩は付与フングサンに上陸した倭寇を撃退した
1377年 鄭夢周を使臣で派遣して李米価とリョスン (今川了俊)に倭寇禁止要請をして
虜数百人を連れて来た
1378年煮こもうとする虜送還に対するお返しで 今川了俊に謝絶を送って倭寇統制を要請して
彼に金銀ホピョピなど贈り物を与えた
高麗の倭寇対策は初期には中央幕府に使臣を送って倭寇禁止要請をすることだったが
約束があったにもかかわらず倭寇の侵入が続いていて
幕府で九州など変更地域実力者たちと交渉して倭寇に対する実質的禁止要請をするようになった
それなのに続く倭寇侵入で煮こもうとする外交的交渉で倭寇を完全に統制するということは
難しいということを悟って軍事的対策を用意するようになる
高麗の倭寇対策 (軍事的対策 )
崔茂宣
煮こもうとする倭寇の主要侵入地域各地に 城を積んで真髄だね (鎭戍軍)と呼ばれる地方君を増設こんにちはだった
また水軍に当たる機先君 (騎船軍)を整備して お腹を操るのにすぐれた人を選んで水軍に
倍速して官職を与えた
崔茂宣は火薬製造に成功して火砲を生産して火筒放射だねという火器専門部隊を作る
1380年崔茂宣 (崔茂宣)は金剛河口ジンポ (鎭浦)で倭寇を撃退した
1380年 9月 荒山大捷
ところでジンポで敗れた倭寇がまた上陸して慶尚道全羅道忠清道地方で民間人虐殺と
放火をやらかしてこの硫酸一帯に寄り集まった 李成桂はこの硫酸一帯で 阿只抜都が導く
倭寇を撃退したがこれを荒山大捷と言う
1383年 鄭地が進度で火砲を利用して倭寇を撃退した
1389年煮こもうとする 100尺の兵船を動員して倭寇の足だまり対馬を攻撃したし
こんなに高麗の苦手だった倭寇の勢いは衰落されて行った
朝鮮の倭寇の対策 (懐柔策)
しかし朝鮮初期に倭寇は再び騒ぎ立て始めた
1392年朝鮮 太祖は僧侶角錘を室町幕府に行かせて倭寇禁止要請をした
足利ヨシミツ (足利義満)は倭寇たちの統制と朝鮮人虜送還を約束して 僧侶スユン(寿允)を
回答社で朝鮮に派遣した
1394年 7月九州の実力者李米価とリョスン (今川了俊は朝鮮人虜 659人を送還して
倭寇禁止約束をするまた 1395年に虜 570人を送還した
朝鮮は 今川了俊に感謝謝絶を送って物産と大蔵経など贈り物で与えた
ところで九州のまた他の実力者オウチは朝鮮に謝絶を送って物産を献上して倭寇禁止
約束をした
それとともに彼は大蔵経を贈り物で与えることを要求した
1395年以後日本は朝鮮に倭寇禁止約束と虜送還を立てて朝鮮のくだされ物と変える形態で
朝鮮と外交交渉に出ていた
朝鮮の倭寇対策 (軍事的対策)
朝鮮のこのような懐柔策にもかかわらず倭寇は朝鮮に侵入して多くの問題を起こしていた
1414年 9月刑曹に申し上げた見て内容には
倭人たちが利益を貪るのにブクロウブなしに船から降りるやいなや品物を要求して
村で毒毒しい仕業をして刀で民たちをいたむようにして財物を掠奪したらその不道徳を
懲戒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倭人が往き来して罪を犯せば大命率 (大明律)で治めてください
と書いている
1419年 対馬島 征伐
1419年 5月倭寇は南海岸西海岸を経って忠清道西天地方と黄海道海州まで上陸して
盗みをしたが朝鮮はこれを 対馬島 島主 小雨サダモリ (宗貞盛)による 煽動だと報告
書くよ征伐を計画するようになった
1419年 6月
朝鮮は 李従茂が 対馬島を征伐して 倭寇を圧した後日本人たちの朝鮮出入りを統制した
日本は 対馬島で朝鮮との交易が難しくなるとしつこく朝鮮に通交することを要求する
1419年太宗は対馬島 島主に
対馬島という島は元々慶尚道桂林に隷属したからもとより我が国の (朝鮮)の地というのが
門跡に積まれていて確かに上告することができてと言いながら降参勧告文を送ったし
1436年対馬島 島主は対馬島を朝鮮の地方で編入してくれるのを朝鮮世宗に上書を
あげたし朝鮮は対馬島 島主を太守に封じた
退渓李滉 (李滉)
日本のしつこい要求で朝鮮は
1426年日本に 3砲すなわち釜山浦 斉浦 塩浦を開港してこちらでばかり交易を承諾したが
日本人たちが交易拡大を要求して暴動を起こして交易が腰砕けになったりした
特に 1510年には 3砲 倭乱が起きる
1545年 対馬島 島主は 倭寇が朝鮮に侵入したことを謝罪して平和条約を結ぶことを
要請したが朝鮮は 断った
1545年当時退渓 李滉 先生は
甲辰乞勿絶倭使疏 という上訴を申し上げたが
倭は野蛮なので野党だけは野党のみを対する方法に従わなければならないと言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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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時代に引き続き朝鮮時代にも倭寇問題は絶えていなかったです
朝鮮は日本人たちの倭寇行為を阻むために日本に使臣を派遣するとか 国交を開いて交易を
許容する など平和的交渉で 倭寇問題を解決しようと努力しました
日本人たちはこんな朝鮮の平和的交渉に互応しながら往き来していたが
(日本は日本の 国内事情など倭寇問題を完全に統制するのに失敗を する )
倭寇は掠奪放火虐殺など多くの問題を起こしていたことです
朝鮮が李滉先生の上訴を警告として受け入れて軍事力増強に力をつくしたら
.....と思う 切なさが残りま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