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2년 신라의 대야성이 백제에 의해 함락되면서 김춘추의 딸인 고타소랑이 사망한다. 이때 김춘추가 백제를 멸망시킬 것을 계획을 하고, 신라는 이때부터 고구려와 백제를 상대로 하여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게 된다.
이 시기부터 김춘추는 고구려와 백제의 염탐을 위하여 목숨을 건 외교활동을 전개를 하는데, 倭에 방문을 한 김춘추의 목적이 무엇인가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일본서기에서는 김춘추를 인질로 받고 임나의 조를 면제를 시켰다고 나오고 있지만, 인질로 온 김춘추와 일본의 사신이 함께 당나라로 간 것은 논리적으로 설명을 하기 힘들다. 즉, 애초부터 인질로 온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김춘추가 일본에 갈 때, 공작 2마리를 들고 갔던 것으로 나오는데, 공작이 비록 귀한 짐승이긴 하지만, 그것이 임나의 조를 면제시켜줄 정도의 가치있는 짐승은 아니었다고 본다. 즉, 일본이 김춘추에게 임나의 조를 면제해준 배경이 일본서기에서는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백제와 倭는 서로를 배신을 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광개토 대왕비문에서도 이 점이 확인이 되고,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서도 역시 공통으로 백제가 꾸준하게 일본에 인질을 보낸 점, 그리고 일본에서 백제왕을 임명하여 내려보낸 것도 확인이 되기 때문에 둘은 동족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면 정확할 것이다.
둘 다 그 근원이 중국에서 이주해온 한족이기 때문이다. 중국인이라는 의미다.
즉,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고자 했다면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은 백제 그 자체가 아니라, 백제의 근원인 일본의 세력이다. 이 당시 일본의 정치권을 잡고 있었던 인물은 백제인 소가씨였다. 한성백제의 멸망이후 일본 열도로 넘어간 목례만치의 후손인 것으로 보는데, 일본으로 넘어가서 소가씨의 시조가 되었던 것은 한일 양국에서 모두 인정을 하고 있을 것으로 본다.
재미있는 것은 김춘추가 일본 열도에 갔다고 알려진 시점을 전후에서 이들 소가씨 일족이 중대형 황자에 의해 모조리 참살당하는 것이 나온다. 이것이 그 유명한 을사의 변이라는 사건인데, 이 때부터 비로서 일본에서 천황가가 그 실제적인 권리를 가질 수 있게 된다. 그 이전까지 일본의 천황가는 없는 존재와 다름이 없었던 지경이었다.
그럼 중대형황자가 소가씨 일족을 치기 위해서 필요한 전제가 있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이자, 가장 상식적인 것이 바로 “병력”이다. 당시의 일본의 병권은 소가씨 일족이 모조리 쥐고 있었다. 헌데 이들 소가씨 일족의 통제를 받지 않았던 세력이 있었다. 그들이 누구였을까?
바로 야요이 倭계의 무장세력들이다. 이들은 삼한인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신라와 대단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세력이다. 신라와 야마토倭의 관계를 조율했던 집단 역시도 바로 이들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즉, 김춘추가 일본 열도로 도래한 것은 바로 이들 야요이 倭세력으로 하여 천황가를 지원을 하여 소가씨 일족을 모조리 몰살을 시키는 것에 목적을 두었다는 이야기다.
왜 김춘추는 소가씨 일족을 쳐서 없애야 했을까? 바로 열도의 백제 후원세력이 이들 소가씨 일족이었다는 것을 의미를 하는 것이다. 신라 김춘추의 목적은 백제를 멸망시키는 것인데, 열도에서 백제를 지원하는 이들 소가씨 일족이 존재한다면 그 뜻이 성사가 될 수가 있을까? 결코 불가능한 일이다.
신라가 백제를 칠 때, 倭가 후방을 치게 되면 신라로서는 진퇴양난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즉, 신라의 입장에서는 후방의 倭를 견제할 수 있는 방안이 있어야 했다는 것인데, 그 방안이 바로 백제 지원세력인 소가씨 일족을 모조리 참살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라와 통하고 있었던 야요이 倭세력을 중대형 황자의 지원세력으로 삼아, 소가씨 일족을 도살을 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에서 소가씨 일족이 참살당한 직후부터 신라에서는 백제를 향한 대공세를 단행을 한다.
644년부터 신라는 백제에게 빼앗긴 가혜성과 가잠성등 7개 성을 다시 탈환을 하고 그 병사 1만명을 참수를 하고, 648년에는 대야성을 다시 탈환을 하면서 병사 2만을 참수하고 장수 8명을 잡아 고타소의 유골과 교환을 한다. 그리고 기록에는 없지만 고구려에게 빼앗겼던 비열홀 역시도 당시 신라가 다시 탈환을 했던 것으로 추정을 하고 있다.
일본의 천황가는 천황가를 능멸하던 소가씨 일족을 마침내 모두 토벌하는 것이 가능했고, 그 배경이 신라의 도움이었다 한다면 반드시 그 은혜를 갚을려고 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바로 임나의 조를 면제를 하는 것이다.
임나는 일본 천황가에 있어서 가장 가슴아픈 사건이다. 신라에 의해 임나는 영구히 한반도에서 멸망을 당했으며, 전방후원형은 이때부터 한반도에서 영원히 퇴출되었다.
흠명천황의 유언이 임나를 수복하라는 것이었는데, 다시는 이 뜻을 이루어내지 못했다. 이유는 일본 열도내에 존재하는 야요이 倭의 세력이 결코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즉, 이때에도 이미 일본내부에서 내전이 상당히 심각했다는 것을 의미를 한다.
일본 천황가의 숙원이 임나를 수복하라는 것인데, 신라가 그 임나를 멸망시킨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그 임나의 조를 면제를 시켜줬다는 것은 그에 상응할만한 어떤 일을 신라가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김춘추가 인질로 왔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중대형 황자가 소가씨 일족을 참살하는데 신라가 지원을 했기 때문에 나온 결과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642年新羅のたらい性が百済によって陷落されながらキム・チュンチュの娘であるGotha小娘が死亡する. この時キム・チュンチュが百済を滅亡させることを計画をして, 新羅はこの時から高句麗と百済を相手にして大大的な反撃に出るようになる.
が時期からキム・チュンチュは高句麗と百済の廉探のために命をかけた外交活動を展開をするのに, 倭に訪問を一キム・チュンチュの目的が何なのかがよく知られていない.
日本書紀ではキム・チュンチュを人質に受けて任那の締める免除をさせたと出ているが, 人質に来たキム・チュンチュと日本の使臣が一緒に唐に行ったことは論理的に説明をしにくい. すなわち, 最初から人質に来た人ではなかったということを意味する.
そしてキム・チュンチュが日本へ行く時, 工作 2匹を持って行ったことで出るのに, 工作がたとえ珍しいけだものではあるものの, それが任那の締める兔除させてくれるほどの価値のあるけだものではなかったと見る. すなわち, 日本がキム・チュンチュに任那の締める兔除してくれた背景が日本書紀では出ていないのだ.
百済と 倭はお互いを裏切りをすることが不可能だった. グァンゲト大王碑文でもこの点が確認になって, 三国史記と日本書紀でもやっぱり共通で百済が倦まず弛まなく日本に人質を送った点, そして日本で百済王を任命して下ろしたことも確認になるからふたつは同族の概念を持っていたと思えば正確だろう.
二つともその根源が中国から移住して来た漢族だからだ. 中国人という意味だ.
すなわち, 新羅が百済を滅亡させようとしたら一番警戒しなければならない対象は百済そのものではなく, 百済の根源である日本の勢力だ. この当時日本の政治権を取っていた人物は百済人蘇我さんだった. 漢城百済の滅亡以後日本列島に移った目礼ほどの子孫であることで見るのに, 日本に移って蘇我さんの詩調になったことは韓日両国で皆認定をしていることで見る.
面白いことはキム・チュンチュが日本列島へ行ったと知られた時点を前後でこれら蘇我さん一族が中大型皇子によって全部惨殺されることが出る. これがその有名な乙巳の便という事件だが, この時からはじめて日本で天皇家家その実在的な権利を持つ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る. その以前まで日本のチォンファングがはない存在と違うことがなかった地境だ.
それでは中大型皇子が蘇我さん一族を打つために必要な前提がなければならない. 一番重要なことにしよう, 一番常識的なことがすぐ兵力だ. 当時の日本の兵権は蘇我さん一族が全部握っていた. どころがこれら蘇我さん一族の統制を受けなかった勢力があった. 彼らが誰だったろうか?
すぐ彌生 倭係の武将勢力たちだ. これらは三韓人という意識を持っていたし, 新羅とすごく密接な関係を持っていた勢力だ. 新羅と大和倭の関係を調律した集団やっぱりもまさにこれらだったことで見ている.
すなわち, キム・チュンチュが日本列島で渡来したことはまさにこれら彌生 倭勢力にしてチォンファングがを支援をして蘇我さん一族を全部皆殺しをさせることに目的を置いたという話だ.
どうしてキム・チュンチュは蘇我さん一族を打って無くさ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だろうか? すぐ列島の百済後援勢力がこれら蘇我さん一族だったということを意味をするのだ. 新羅キム・チュンチュの目的は百済を滅亡させることだが, 列島で百済を支援する人々蘇我さん一族が存在したらその意味が成功になることができるか? 決して不可能な事だ.
新羅が百済を打つ時, 倭が後方を打つようになれば新羅としては痛しかゆしの危機を迎えるようになる. すなわち, 新羅の立場(入場)では後方の 倭を牽制することができる方案が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ということだが, その方案がすぐ百済支援勢力である蘇我さん一族を全部惨殺をするのだ.
そして新羅と通じていた彌生 倭勢力を中大型皇子の支援勢力にして, 蘇我さん一族を屠殺をさせるのだ. そして日本で蘇我さん一族が惨殺された直後から新羅では百済に向けた大攻勢を断行をする.
644年から新羅は百済に奪われた仮彗星と家蚕性 7個省をまた奪還をしてその兵士 1万名を斬首をして, 648年にはたらい性をまた奪還をしながら兵士 2のみを打ち首にして長寿 8人を取ってGotha所の遺骨と交換をする. そして記録にはないが高句麗に奪われた卑劣ホールやっぱりも当時新羅がまた奪還をしたことで推定をしている.
日本のチォンファングがはチォンファングがを凌蔑した蘇我さん一族を遂に皆討伐するのが可能だったし, その背景が新羅の助けだったしたら必ずその恩恵を返そうとしたはずだ. それが何だったろうか? すぐ任那の締める免除をするのだ.
任那は日本チォンファングがにおいて一番胸が痛む事件だ. 新羅によって任那は永久に韓半島で滅亡にあったし, 前方後援型はこの時から韓半島で永遠に退出された.
欽命天皇の遺言が任那を収復しなさいというのだったが, 二度とこの意味を遂げ出すことができなかった. 理由は日本列島内に存在する彌生 倭の勢力が決して手強かったからだ. すなわち, この時にももう日本内部で内戦がよほど深刻だったということを意味をする.
日本天皇加衣宿願が任那を収復しなさいというのに, 新羅がその任那を滅亡させた許すことができない罪をやらかしたにもかかわらずその任那の締める免除をさせてくれたということはそれに相応するに値するどんな仕事を新羅がしたということを意味する. それはキム・チュンチュが人質に来たからで(から)がなく, 中大型皇子が蘇我さん一族を惨殺するのに新羅が支援をしたから出た結果であるしかないの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