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어두운 방안, 창호문으로 은은한 약한 빛만이 비칠 뿐이다. 늙은 스님은 힘없는 목소리로 제자를 부른다. “혜진아.” 대답이 없다. 문이 열리고 갑자기 밝아지면서 빛이 쏟아지는 마당이 나타난다. 1989년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의 첫 장면이다.

 이 영화는 로카르노 국제 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다. 존재감이 없던 한국영화의 첫 국제 영화제 작품상으로 당시 극찬을 받았다. 감독은 원래 직업이 영화감독이 아니라 대학에서 서양화를 가르치던 교수였는데 영화를 좋아해서 독학으로 영화를 공부하였고 제작과 연출은 물론 각본, 촬영, 편집, 미술, 조명에 이르기까지 혼자 작업하였다. 무명의 배우들을 기용해 늙은 스님과 동자승, 청년의 이야기를 그리며 불교 철학과 존재론적 통찰의 시선을 담아냈다. 원하는 태양 광선을 얻기 위해 한 장소에서 몇 달동안 기다리기도 한 작가주의 감독으로 단 2편의 영화를 찍었다. 그의 대표작인 이 작품에서 배경이 된 장소가 바로 영산암이다.

 


 

 

 감독은 왜 영화의 주된 장소로 이곳을 선택하였을까. 영산암은 봉정사에 딸린 작은 암자다. 승려들은 절에서 공동 생활을 하며 계율에 따라 생활을 하고 수행을 한다. 절은 속세와 떨어져 있지만 기도를 하는 신도들이 모여들고 잦은 佛事가 이루어져 번잡하다. 때문에 한적한 곳에 암자를 짓고 개인적인 수행을 하며 修道에 전념을 한다. 절은 불교의 절대자인 부처님을 모시고 중생에게 佛法을 전파해야 하기 때문에 규모가 크고 화려한 장식을 한다. 이에 반해 암자는 승려의 修道가 주목적이기 때문에 규모가 작고 소박하며 인간적인 공간이 될 수밖에 없다.

 영산암 역시 화려함이나 거대함과는 거리가 멀다. 건물들은 엉성하며 건축 수법 또한 수준이 낮다. 하지만 이 곳에는 채워진 곳보다 비워진 곳에서 큰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영산암의 공간은 자연에 녹아 유기적이고 자연스럽게 표출되어 자연의 미로 승화되는 경지에 이른다. 감독은 이곳에서 완성되어지는 한국의 禪的 공간의 숨은 의미를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건축이란 공간을 채우는 것 뿐일까. 우리는 보통 건축을 채우는 개념으로만 생각하지만 건축이란 또한 비우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동양문화의 미학이기도 한데 서구의 지식이 한계에 도달한 지금 ‘emptiness’라는 단어는 서구에서도 주목하고 있는 개념어이다. 비운다는 것은 한국 전통문화의 고유한 미학이기도 하다. 음악에서 음과 음 사이, 그림에서 여백을 중요시 여겼던 것처럼 건축에서도 건물과 건물 사이는 중요한 공간이었다.

 일본 교토에는 료안지라는 절에는 작은 정원이 있다. 담장에 둘러싸인 적막한 공간에 자갈밭 위로 바위 몇 개만 있을 뿐이다. 그 놀라운 정적에 깊은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방문객들은 조용히 앉아 피안의 세계인 것처럼 이 공간이 주는 고요함을 숨죽이며 바라본다. 나에게는 세계 최대의 목조건물이라고 자랑하는 건물보다 더 일본적이며 강렬하다. 그런데 이 정원은 변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들어갈 수 없으며 어떤 것도 바뀌지 않는다. 비워져 있지만 보이지 않는 투명한 물체가 이 공간에 가득 깔려 있는 듯 하다. 비움이라는 화두는 같지만 그것이 드러나는 방식에서는 한국과 차이가 있다.

 

 

 

 

 한국의 한옥 마당과 비교를 해보면 잘 안다. 한옥의 마당은 보통 하얀 흙이 깔려있을 뿐 비워진 상태로 남아있을 뿐 앞마당을 과도하게 꾸미지 않는다. 이런 비워져 있는 한옥의 마당은 그 속에서 잔치를 해도 괜찮으며 노동을 해도 무방하다. 놀이판을 벌일 수도 있고 제례의 의식을 거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끝나면 다시 비움으로 변한다. 그리고 마치 연극이 끝난 무대와 같이 모든 삼라만상을 머금은 듯 고요해진다. 빈 그릇에 어떤 것을 담느냐에 따라 그 그릇의 성격이 규정되고 다시 재구성된다. 료안지의 비움이 확정적이고 정적인 공간이라면 한옥의 마당은 불확정적이며 생동하는 공간인 것이다.

 

 

 

 

 대개의 한국의 옛 건축은 이 보물같은 공간인 “마당”을 가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불확정적 성격을 가장 극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옛 건축을 꼽으면 두말 않고 영산암이다.

 

 

 

 

 우화루(雨花樓)라는 현판이 걸린 길다란 樓마루가 긴 세월의 무게를 담으며 휘어져서 앞을 가로막은 모습을 보면 이 건축이 쉽사리 바깥 사람에게 그 내부를 열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폐쇄적인 외관에 내부로 통하는 통로는 작은 문 하나 뿐이다. 출입을 위한 樓마루 밑의 문은 높이가 성인 남성의 키보다 약간 낮아서 머리를 숙이지 않으면 들어갈 수가 없게 하였다. 따라서 시선은 樓마루 밑을 통과할 때까지 자연히 아래로 향하고 터널같은 문을 통과해 돌계단 앞에 와서 비로소 고개를 들면 급격히 밝아지면서 한 길 높이 위에 햇살 가득한 마당이 있다.

 

 

 

 

 그러나, 그러고서 이 마당에 오르면 볼품없는 암자의 모습에 많은 사람들은 이내 실망할 수도 있다. 실제로 영선암의 건축 하나 하나는 별 볼품이 없다. 쓴 부재도 시시하고 그 결구 방법도 그저 그렇다. 공간을 보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괜한 시간 낭비일 것이다. 그러나 그 엉성한 건물들이 집합하여 만드는 공간의 구성은, 공간을 볼 수 있는 이에게는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을 자아내게 하고 한없는 명상의 세계로 이끈다.

 

 

 

 영산암은 6채의 집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개 한국의 절 건축은 법당을 정면에 두고 좌, 우측에는 선방과 승방이 놓여지고 앞쪽에는 누각 형식의 건물이 놓여져 가운데에는 사각형의 정연한 마당이 생기기 마련이다. 영산암에서는 마당을 가운데 두고 앞쪽과 좌, 우측에는 3개의 건물(1,2,3 건물)이 결합하여 匚字를 이루고 마당을 마주한 뒷쪽에는 법당인 응진전(6번 건물 應眞殿)이 입구 오른쪽에 치우쳐 위치하고 좌측으로는 삼성각(5번 三聖閣 : 山神, 七星, 獨聖)와 노전(4번 爐殿 : 절을 관리하는 스님 숙소)이 엉성하게 집합되어 있다.

 

 

 

 

 영산암은 비탈진 지형 탓에 아랫마당, 중간마당, 윗마당 이렇게 3단의 마당(빨간 1, 2, 3)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화루 밑에서 보면 그 마당들은 축대와 불규칙한 돌계단들로 오르내리며 이어져 있다. 높낮이에서 오는 리듬과 운율이 있다.

 


 

 

 출입구인 우화루 아래에서 보면 신기하게도 눈길은 정면에 바로 보이는 응진전이 아니라 10시 방향 대각선으로 먼저 끌려든다. 중간마당의 구석에 있는 커다란 바위와 그 바위를 뚫고 자랐다는 소나무가 시각의 초점이 되기 때문이다. 보통은 묘한 긴장감이 느껴지는 이 대각선을 따라 무의식적으로 발길이 이곳으로 향한다. 이것은 의도된 구성으로 조경 효과는 물론 동선을 대각선으로 구성하여 좁은 공간이 더욱 확장되어 보이게 하기 위함이다.

 

 

 

 

 이런 의도에 따라 법당인 응진전으로 바로 가지 않고 왼편 대각선 방향의 계단으로 올라 윗마당의 공간을 즐긴 뒤에 비로소 오른쪽으로 꺾어 응진전에 들어가 예불을 올리게 되는 것이다.

 

 

 

 바위와 소나무는 시각의 초점 역할을 하여 두 마당을 연결하기도 하지만 높이가 다른 마당과 마당 사이를 구분하여 윗마당의 공간을 적당히 둘러싸면서 공간의 독립성을 주게 된다. 이어주기도 하고 닫아주기도 하는 것이다.

 

 

 

 

 주지실(3번)은 툇마루 모퉁이가 樓마루와 붙어 있다. 그러고보면 마당을 둘러싼 툇마루들은 모두가 같은 레벨로 되어 서로 동위성을 유지하고 있다. 폐쇄적인 외관과 달리 마당 안에서는 건물 사이 사이의 열린 공간으로 끊임없이 외부의 풍경이 드나든다.(파란 화살표)  밖에서의 영산암이 단절과 축소였다면, 안에서의 영산암은 개방과 확장의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영산암은 그런 특성으로 인해 텅 비어 있는 속에 바깥 세상을 가득 끌어들인다. 비움으로 인해 채울 수 있다는 불교의 진리를 웅변으로 말해주는 셈이다. 樓臺에 올라 바깥과 영선암의 마당 사이의 경계에 걸터앉아 쏟아지는 햇살 속에 몸을 맡기면 사바세계와 극락의 경계에서 그 불안정하고 불확정적인 우리네 삶을 관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속에서 어느새 이 건축이 만든 무대 위에서 끊임없이 사유하는 나를 만나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완벽하지 않은 영산암의 개별 건축군의 구성은 마치 무대 위의 배경이다. 마당은 비워진 무대이고 나의 행위는 자연에 의해 관망되는 연기였다. 물론 누구든 여기선 독백하는 모노드라마의 주역이며 집단행위의 출연자가 된다. 영산암은 그 마당에 담기는 사건에 의해 건축이 완성되는 것이다.

 건축의 완성은 개별 건물의 화려함이나 기교가 아니라 물처럼 자연스럽게 흐르는 공간의 이동과 그 속에서 주변 자연과 하나가 되는 짜임일 것이다. 비록 개별 건물들은 낡고 엉성하지만 그런 퇴락한 건물들이 서로 어울려 자연스런 흐름과 비움의 공간을 연출해 냄으로 우리의 행위와 사유로 이 공간을 채울 수 있는 영산암은 그야말로 虛의 미학이다.

 

 

 

 


韓国建築話

 

 

 暗い方案, チァングホムンで仄かな弱い光だけが映るだけだ. 老けたお坊さんは力無い声で弟子を呼ぶ. ヒェジンよ. 返事がない. ドアがあいて急に明るくなりながら光の零れ落ちる庭先が現われる. 1989年映画 ¥"逹磨はなぜ東へ行ったのか¥"の初場面だ.

 この映画はロカルノ国際映画祭で最優秀作品賞を受けた. 存在感がなかった韓国映画の初国際映画祭作品賞で当時絶賛を受けた. 監督は元々職業が映画監督ではなく大学で洋画を教えた教授だったが映画が好きで独学で映画を勉強したし製作と演出はもちろん脚本, 撮影, 編集, 美術, 照明に至るまで 一人で作業した. 無名の俳優たちを起用して老けた お坊さんと同自乗, 青年の話を描いて仏教哲学科存在論的通察の視線を盛り出した. 願う太陽光線を得るために一場所で 何タル洞の中待ったりした作家株の監督でただ 2本の映画を撮った. 彼の代表作であるこの作品で背景になった場所がすぐ霊山癌だ.

 


 

 

 監督はどうして映画の主な場所でこちらを選択しただろうか. 霊山癌は鳳停寺に付いた小さな庵だ. 僧侶たちはお寺で共同生活をして戒律によって生活をして遂行をする. 引きずって行った俗世間と離れているが祈祷をする信徒たちが集まって来てひんぱんな 仏事が成り立って煩雑だ. のためものしずかな所に庵を建てて個人的な遂行をして 修道に専念をする. 引きずって行った仏教の絶対者である仏様を仕えて衆生に 仏法を伝えなければならないから規模が大きくて派手な飾りをする. これに反して庵は僧侶の 修道が主眼だから規模が小さくて素朴で人間的な空間になるしかない.

 霊山癌も派手やゴデハムとは距離が遠い. 建物はしまりがなくて建築手法も水準が低い. しかしこちらには満たされた所より留守にされた所で大きい意味を見つけることができる. 霊山癌の空間は自然にとけて有機的で自然に表出されて自然の迷路昇華される境地に至る. 監督はこちらで完成されられる韓国の 禅的 空間の隠れた意味を見つけたかも知れない.

 

 

 

 

 建築と言う(のは)空間を満たすことだけだろう. 私たちは普通建築を満たす概念だけで思うが建築と言う(のは)また留守にすることでもある. これは東洋文化の美学だったりあるが 西欧の知識が限界に到逹した今 ‘emptiness’という 単語は西欧でも注目している概念語だ. 留守にするということは韓国伝統文化の固有した美学でもある. 音楽でうーんとうーんの間, 絵で 余白を重要視思ったように建築でも建物と建物の間は重要な空間だった.

 日本京都にはリョアンジというお寺には小さな 庭園がある. 垣根に 取り囲まれたさびしくて静かな空間に砂利畑慰労岩いくつだけ あるだけだ. 彼 驚くべきな静寂に深い印象を受けるしかないのに訪問者たちは静かに座って彼岸の世界人のようにこの空間が与える静かさを息を殺しながら眺める. 私には世界最大の木造建物だと誇る建物よりもっと日本的で強烈だ. ところでこの庭園は変わらない. 誰も入って行くことができないしどれも変わらない. 留守にされているが見えない透明な物体がこの空間にいっぱい敷かれているようだ. ビウムという話題は同じだがそれが現われる方式では韓国と差がある.

 

 

 

 

 韓国の韓屋庭先と比較をして見ればよく分かる. 韓屋の庭先は 普通白い土が敷かれているだけ 留守にされた状態で残っているだけ前庭を過度に構えない. こんな留守にされている韓屋の庭先はその中で宴をしても良くて労動をしても関係ない. 遊び版をすることもできて祭礼の意識を行うこともできる. しかしそのすべてのものが終わればまた留守にすることで変わる. そしてまるで演劇が終わった舞台のようにすべての森羅万象を含んだように静かになる. 空の器にどれを盛るのかによってその器の性格が規定されてまた再構成される. リョアンジの留守にすることが確定的で静寂な空間なら韓屋の庭先は不確定的で生動する空間であることだ.

 

 

 

 

 大概の韓国の昔の建築はこの宝物みたいな空間である ¥"庭先¥"を持っている. その中でも不確定的性格を一番劇的に現わしている昔の建築を指折ればドマルなくて霊山癌だ.

 

 

 

 

 羽化樓(雨花樓)という懸板がかかった長長しい 樓床が長い歳月の重みを盛りながらしなって前を塞いだ姿を見ればこの建築がたやすく外人にその内部を開かないということを感じるようになる. 閉鎖的な見掛けに内部で通じる通路は小さな門一人だけだ. 出入りのための 樓床下の門は高さが大人男性の背よりちょっと低くて 頭を下げなければ入って行くことができないようにした. したがって視線は 樓床下をパスするまで自ずから下に向かってトンネルみたいな門をパスして石段の前へ来て初めて頭をあげれば急激に明るくなりながら一筋高く上に日ざし一杯な庭先がある.

 

 

 

 

 しかし, そうしてこの庭先に上がれば格好悪い庵の姿に多い人々はたちところにがっかりすることもできる. 実際に営繕癌の建築するが一つは別に恰好がない. 使った不在もくだらなくてその結句方法もまあまあだ. 空間を見られない人々には無駄な時間のむだであるでしょう. しかしそのしまりがない建物が集合して作る空間の構成は, 空間を見られる人には形言しにくい感情を催すようにして限りない冥想の世界へ導く.

 

 

 

 霊山癌は 6軒の家で構成されている. たいてい韓国のお寺 建築は法堂を正面に残して左, 右側にはファインプレーと僧房が置かれて先方には樓閣形式の建物が置かれて中には四角形の整然としている庭先が生ずるものと決まっている. 霊山癌では庭先を中置いて先方と左, 右側には 3個の建物(1,2,3 建物)が結合し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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