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re:板海苔

이 글은 김의 기원에 대해서 논쟁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쓴 것이 아니다.
글 내용중 나와 있듯 일본인들은 항상 망상을 즐기고 있으므로 교육 차원에서 올리는 것임을 다시 말한다.
この文はのりの起源に対して論争しようとする意図を持つ使ったのではない.
文内容中出るあるように日本人たちはいつも妄想を楽しむあるので教育次元であげることなのを言い換える.

 

元禄年間(1688~1704年)には、海の中で海苔を付けるための枝である粗朶を立てる養殖が行われており、これを幕府が奨励していたことも確認されている。その約100年後の1787年に、不完全ながらも板海苔を使った海苔巻きが、考案された記録が残っている。やがて、東京湾で採れた海苔を和紙の製紙技術を用いて、紙のように薄く漉いて乾燥させた板海苔が完成する。海苔は世界中で採取され食されているが、養殖や板海苔に加工することを考案したのは日本だけである.
겐로쿠 연간(1688~1704년)에는, 바다 속으로 김을 붙이기 위한 가지인 섶나무를 세우는 양식을 하고 있어 이것을 막부가 장려하고 있던 것도 확인되고 있다.그 약 100년 후의 1787년에, 불완전하면서도 판김을 사용한 김말이 스시나무가, 고안 된 기록이 남아 있다.이윽고, 도쿄만에서 얻은 김을 일본 종이의 제지 기술을 이용하고, 종이와 같이 얇게 떠 건조시킨 판김이 완성한다.김은 온 세상에서 채취되어 음식 되고 있지만, 양식이나 판김에 가공하는 것을 고안 한 것은 일본 뿐이다.

江戸の代表的な海苔に浅草海苔があるが、これも何時からそのように呼ばれたか判っていない。岡村金太郎著「浅草海苔」によると、長禄年間(1457~1459年)の頃ではないかと推測されているが、定かな記録は残されていない。1800年代になって養殖された海苔が、浅草で板海苔に加工され、幕府御用商も浅草にあり、産業として繁栄していたことが記録に残っている。この頃から江戸の名物として、浅草海苔の名が全国に知れ渡った。
에도의 대표적인 김에 浅草김이 있지만, 이것도 언제 부터 그처럼 불렸는지 확실치 않다.오카무라 킹타로우 저「浅草海苔」에 의하면, 장녹연간(1457~1459년)의 무렵은 아닐까 추측되고 있지만, 확실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1800년대가 되어 양식된 김이, 아사쿠사에서 판김으로 가공되어 막부 용무상도 아사쿠사에 있어, 산업으로서 번영하고 있었던 것이 기록에 남아 있다.이무렵 부터 에도의 명물로서 浅草海苔의 이름이 전국에 널리 알려졌다.

 


世宗 48卷, 12年(1430 庚戌 )
上率王世子及百官, 拜謝恩表箋
왕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사은 표전을 배송하다
禮物: 白細苧布ㆍ黑細麻布各二十匹, 滿花席雜彩花席各一十張, 人蔘五十觔, 松子一百觔, 雜色馬四匹。 文貴幷齎文魚二百四十首、鰒魚二百觔、紫蝦鮓一十壜、昆布五百觔、早海菜二百觔、海衣一百五十觔、海菜三百觔以行, 賜貴、益精等衣笠靴。
예물로는 백세저포·흑세마포 각 20필, 만화석·잡채 화석 각 10장, 인삼 50근, 잣 1백 근, 잡색말 4필이었다. 문귀(文貴)가 문어 2백 40마리, 전복 2백 근, 붉은 새우젓[紫蝦鮓] 10항아리[壜], 곤포(昆布) 5백 근, 조해채(早海菜) 2백 근, 김[海衣] 1백 50근, 해채(海菜) 3백 근을 함께 가지고 갔다. 귀와 익정 등에게 옷·갓[笠]·신을 하사하였다.


世祖 47卷, 14年(1468 戊子)
命宦官申雲, 齎燒酒四十甁、鹿尾四百箇、乾獐二十口
乾獐二十口、乾雉四百首、乾大口魚二百尾、片脯四百箇、海菜八十束、海衣四百貼、乾大蝦二百束、昆布一百束
강옥과 김보에게 소주, 녹미, 마른 노루 등을 나누어 주다
소주(燒酒) 40병(甁)·녹미(鹿尾) 4백 개·마른 노루[乾獐] 20구(口)·마른 꿩[乾雉] 4백 수(首)·마른 대구어[乾大口魚] 2백 미(尾)·편포(片脯) 4백 개·해채(海菜) 80속(束)·해의(海衣) 4백 첩(貼)·마른 대하[乾大蝦] 2백 속·곤포(昆布) 1백 속


海苔(海衣)을 세는 단위로 10매를 첩(貼)이라고 말한다.
1430년 해초의 세는 단위가 1468년 근에서 첩(貼)이나 속(束)으로 바뀌고 있다.
10첩(貼)은 1속(束)이다.
金(海衣)を数える単位で 10枚を貼と言う.
1430年海草の数える単位が 1468年 觔で貼や束に変わるある.
10貼は 1束だ.

 

中宗 19卷, 9年(1514 甲戌)

其所書簇子, 以海衣爲紙, 以樺皮鎪刻爲字。

그 글씨를 써서 건 족자는 해태(海苔)로 종이를 만들고 벚나무 껍질로 조각하여 글자를 만들었으며


중종 19권, 9년(1514 갑술)
내농작(內農作)의 모든 기구를 후원에 배설하였는데, 왼편은 경회지(慶會池) 북쪽 첫 섬돌로부터 북쪽 담장 소문(小門) 안까지 이르렀고, 오른편은 충순당(忠順堂) 앞 섬돌로부터 취로당(翠露堂) 앞까지 이르렀다. 모두 《빈풍(豳風)》 《칠월편(七月篇)》을 모방하여 오른편에는 주공(周公)이 《무일편(無逸篇)》5081) 을 드리는 형상을 만들고, 왼편에는 주공이 《칠월편(七月篇)》을 드리는 형상을 만들었으며, 그 글씨를 써서 건 족자는 해태(海苔)로 종이를 만들고 벚나무 껍질로 조각하여 글자를 만들었으며, 기산(岐山) 사시의 경치를 만들었는데, 모든 기화(奇花)·이초(異草)·충어(蟲魚)·금수(禽獸)·인물(人物)이 구비되지 않은 것이 없다. 상이 중사(中使)5082) 에게 명하여 승지(承旨) 및 감조관(監造官) 등에게 선온(宣醞)하였다.


김을 세는 단위가  근에서 첩으로 바뀐 이유는 1514 중종실록에 기록된 海衣爲紙을 미루어 볼 때
오늘날의 판김 형태가 1468년 이전에 갖추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板海苔を数える単位が 觔で貼に変わった理由は 1514 中宗実録に記録された 海衣為紙を推し量れば
今日の板海苔の形態が 1468年以前に揃ったからだ思うことはできる.

 


宣祖 136卷, 34年(1601 辛丑)
慶尙道暗行御史趙守翼, 書啓
東海一帶, 村落蕭條, 居民不念國事之大, 頗以孝敬殿海衣進上爲苦, 係是民情, 故惶恐敢啓
선조 136권, 34년(1601 신축)
동해(東海) 일대의 촌락은 쓸쓸한데, 그곳에 거주하는 백성들은 국사의 중대함은 생각하지 않고 효경전(孝敬殿)에 해의(海衣)를 진상하는 것에 대해 매우 고통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孝宗 3卷, 1年(1650 庚寅)

聖上軫念民隱至此, 孰不感激? 臣請因是以陳之。 古語曰: ‘節用而愛民。’ 臣往南方時聞之, 御供海衣一貼, 價至木綿二十匹云矣

효종 3권, 1년(1650 경인)
“성상께서 백성의 고통을 이토록 깊이 염려하시니 누군들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신은 이를 인하여 아뢰고자 합니다. 옛말에 ‘절약하여 백성을 사랑한다.’고 하였는데, 신이 남쪽 지방에 갔을 적에 들으니, 어공(御供)하는 해의(海衣) 1첩 값이 목면 20필까지 간다고 하였습니다.”


궁중에서 김은 아주 인기있는 식재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에 수차례에 걸쳐 김의 공납에 대해 백성의 어려움을 상소하고 있다.
특히 효종에 이르러 김의 가격이 옷감의 가격을 추월하고 있을 정도로 귀중한 것이 되었다.
이 무렵 자연적으로 김의 양식에 대한 욕구가 생겨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宮の中で板海苔は人気ある食材で見える.
朝鮮王朝実録に何回にかける板海苔の貢納に対して民の難しさを上訴するある.
特に孝宗に至る板海苔の価格が布の価格を追い越すあるほどに貴重なのがなった.
この頃自然的にのりの様式に対する欲求ができたことは極めて当たり前の事だする.

 

대산등 참판공 묘비문 등초(大山嶝參判公墓碑文謄抄)는 광양이 해태시식지임을 말해주는 처음 문헌사료로써 이 비문 등초(원본에서 옮겨 베껴 쓴 글)는 이 비의 주인공인 김여익(金汝瀷)의 5대손인 태혁(太爀)의 수기(手記)에서 발견하여 그 수기를 발췌한 것으로 비는 어느 땐가 없어지고 비문만이 남아있다.
이 비문은 1713년 3월~1714년 9월(숙종39년~40년)사이에 광양현감을 지낸 허심(許)이 김여익(金汝瀷)을 기려 쓴 것으로 김여익(金汝瀷)은 1606~1660년 사이에 생존한 인물이므로 위 비문은 그가 이미 죽은 후에
이곳에 도임한 허심(許鐔)이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大山嶝参判公墓碑文謄抄は光陽がのりの試食誌なのを言い表す初めて文献史料としてこの碑文謄抄(原本で移す書き写した文)はこの碑の主人公である金汝瀷の 5代孫である太爀の手記で見つけてその手記を抜粹したことで碑はある時であるか消える碑文だけが残っている.
この碑文は 1713年 3月~1714年 9月(肅宗39年~40年)の間に光陽県監を執り行なった許鐔が金汝瀷を称える使ったことで金汝瀷は 1606~1660年の間に生存した人物なので上の碑文は彼がもう死んだ後にこちらに到任した許鐔が使ったことなのを分かる.


大山嶝參判公墓碑文謄抄
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知義禁府事金公墓表公諱汝瀷

長興冬栢洞數年後公獨浮海而
庚辰春遂隱遯于本縣仁湖伴鷗寓樂始殖海衣
김여익(金汝瀷)은 병자호란 때 의병을 거느리고 청주에 이르렀으나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말을 듣고 돌아
온 뒤 고향을 떠나 장흥 동백동을 거쳐 인조 18.년(1640)에 광양 태인도(인호도)에 와서 은신하여 20년간 독서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는데 그동안 그는 해의(海衣)의 양식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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