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재일한국인유학생회(在日朝鮮人留學會)는 1924년 1월 대표자 김건(金楗)의 명의로 “도쿄 지진 한국인 학살 보고서”를 작성했다. 보고서 중 학살내용의 일부를 발췌한다.



”하동(河東) 광장에 한인(韓人)을 다수 포함하여 기천기백인을 한꺼번에 난사하고 병영 또는 경찰서 구내에 기백기십인을 집합시켜 살해하였다. 더구나 노상에서 보는대로 병력 내지 경찰관이 총살한 것은 물론 보통의 살인수단이라고 할 수 없게 소위 자경단, 청년단 등은 “한국인!”이라고 외쳐 부르는 한마디에 백이응하여 낭(狼)의 군(群)과 같이 동서남북에서 몰려와 1명의 동포를 수십인이 달려들어 칼로 찌르고 총으로 쏘고 곤봉으로 때리고 발로 차서 쓰러뜨리고 그위에 죽은 사람의 목을 끌고 다니면서 능욕하였다. 몸을 전신주에 묶고 처음 눈알을 도려내고 코를 찔러 그 애통한 광경을 충분히 구경한 후에 배를 찔러 죽인 일도 있다.



동네 앞을 흐르는 것은 우리 동포의 선혈이고 이곳저곳에서 흐트러진 것은 우리 동포의 시체이다. 우리 동포의 시체가 퇴적하여 우전천은 유통도 막혀 동포의 피가 썩는 그 악취는 통행인의 호홉이 막힐 정도였다.”



일본 정부에서는 당시 외국인이 한국인 학살장면을 목격하지 못하도록 외국인을 각서에 집합시켜 감시하고 외출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그 주위에서 총을 쏘고 싸움을 하면서 “이 총성은 한국인들의 총성이며 이 싸움은 한국인들이 습격하는 소리다.”라고 기만하는 동시에 이곳저곳에서 한국인이 폭행하거나 습격하고 있다고 선전하였다.



조선총독은 동 6일 각 신문에 공포하여 “조사해본 결과 관동지방 한국인은 노동자 3천명, 학생 3천명, 합계 6천명 중 살해당한 자는 2명뿐이다.”라고 했다. 당시 일본에 살고 있던 한국인 중 5분의 1이 관동지방에 있었으니 그 수가 3만 이상에 달하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었다. 다수의 인명을 살육하면서 2명뿐이라고 발표한 것은 실로 수심(獸心)의 궤변이 아닐 수 없다.


● 나카타현 한국인 노동자 집단학살



우리는 흔히 일제(日帝)의 한국인 노동자 징용이 태평양전쟁 시기에만 있었던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실은 국권침탈과 더불어 일제는 값싸고 질좋은 노동력을 구하고자 조선의 많은 청장년을 각종 공사현장으로 끌고 갔다. 물론 처음부터 징용령 같은 인력수탈 제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나 친일지주들에게 땅을 배앗긴 농민들에게 많은 돈을 주겠다고 속여 일본으로 데려갔다. 대부분이 농토를 잃은 소작인이거나 이농 유랑민, 도시의 실업자들이었다.



이렇게 일본으로 건너간 동포는 해마다 늘어났다. 1913년도에 3600명이던 재일거류민은 18 연에 2만 2천명, 23년에 8만 6백명으로 증가하고 28년에 24만 3천명이던 거류민수가 33년에는 42만 6천명으로 늘어났다. 33년 6월말 현재 42만 6천명이던 재일거류민 중 33.1%인 14만 3천명이던 거류민수가 33년에는 42만 6천명으로 늘어났다. 나머지 10만의 고정직 노무자는 직공이거나 고용인이고 광산노무자가 세번째로 많았다. 이들에 대한 보수는 일본인 노무자의 70% 이하 정도였으며 반액 미만일 경우도 허다했다. 동포들은 이처럼 심한 차별을 받으면서도 배고픔을 면하기 위하여 일본으로 건너갔다. 1922년 8월에 크게 물의를 빚은 나카타현의 한국인 노동자 집단학살 사건도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저질러졌다.



1922년 초부터 시나노가와[信濃川]의 급류를 타고 흘러내리는 한국인 노무자들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처음에는 한두구의 시체가 흘러내리다가 차츰 여러구의 표류시체가 발견되고 이것이 일본의 신문에 보도됨으로써 사회문제가 되었다. 표류시체들은 시나노카와 댐 건설 공사장에 동원된 한국인 노무자들이 일본인 현장 공사 감독들에 의해 구타당해 죽은 시신이라는 사실도 알려졌다.



이런 끔찍한 사실이 전해지면서 당시 도쿄 등지에 거류하던 아나키스트 박열(朴烈)이 주도한 흑도회(黑道會) 간부들은 조사단을 구성하고 현장조사에 착수하여 일제의 참혹한 한국인 학살 만행을 폭로했다. 시나노가와 댐 공사장은 인가에서 30리, 철도 연변에서 1백리 이상 떨어진 외딴 공사장으로서 한국인 노무자들이 작업에 동원된 이래 “지옥의 계곡”이라 불리게 되었다. 산을 뚫고 산봉우리를 깎아서 댐을 만들어 발저냥 30만 킬로와트의 동양 최대 발전소를 건설한다는 것이 계획이었다. 댐 공사에 필요한 인부들을 일제는 주로 경남 일대에서 모집해갔다. 왕복 여비는 고용주가 부담하고 하루 8시간 노동제로 월 2일의 유급휴가와 고액의 임금을 준다는 감언이설(甘言利說)에 많은 조선 사람이 이곳으로 끌려왔다. 800여명의 한국인 노무자가 이 댐 공사에 동원되었다.



그러나 하루 14~15시간의 힘든 노동을 시킨 뒤 “한바”라 불리는 감옥과 같은 노무자 합숙소에 가둬놓고 저임금에 강제노역을 시켰다. 한바는 일제가 메이지시대 초기 북해도 개척을 시작한 이래 계속되고 있는 일본 특유의 합숙소였다. 당초 북해도의 반란군을 정벌한 메이지 정권이 이 죄수들을 철도공사에 동원하면서 죄수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감옥을 방불케 하는 특이한 구조로 합숙소를 지은 것이 한바의 유래였다. 시나노가와 댐 공사에는 한바를 그대로 살려 합숙소라는 이름의 감옥을 만들어 조선 노무자들을 수용하면서 노동력을 착취하고 살상을 밥먹듯이 저질렀다. 한국인 노무자들은 새벽에 현장으로 끌려나가 가장 위험한 공사에 동원되고 그나마 2~3중의 하청조에 임금의 태반을 배앗겼다. 견디다 못해 도망치면 하청조의 두목들이 권총으로 살해하거나 붙잡아 갖은 고문을 자행했다.



밀양 출신의 김갑철(金甲喆)은 19세의 소년 노무자였는데 도망가다 붙잡혀서 하청조 책임자가 하역할 때 쓰는 쇠갈고리로 맨살 10여군데를 찍혀 유혈이 낭자하였다. 그것도 모자라 나체(裸體)로 만들어 눈구덩이 속에 무려 3시간을 방치해 두었다. 우윤성(禹允成) 등 3인도 도망치다 붙잡혀 발가벗긴 채 벽돌을 찍는 틀속에 집어넣은 후 물과 모래, 시멘트를 섞어 굳어지게 하였다. 시간이 지나자 시멘트가 점차 굳어지면서 돌과 모래가 살속으로 파고드는 참혹한 고문을 당하였다. 이렇게 하여 사상자가 발생하면 강물에 던지거나 공사장에 매장시켰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는지 정확한 숫자조차 모른다. 그러나 박열과 김약수 등 흑도회 간부의 진상조사에 다르면 1백명 이상 사망하고 적지 않은 수가 억류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흑도회는 도쿄와 오사카 등에서 연설회를 갖고 일제의 야만적인 만행을 규탄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은 오스기 사카에 등 일본의 양심적인 학자들이 연사로 나서지 못하도록 하고 한국인 6명, 일본인 2명의 연사를 구속하여 이 사건이 사회에 알려지는 것을 막으려고 하였다. 일본의 내무성과 조선총독부도 사실을 은폐하고 책임회피에만 급급한 채 정확한 진상을 밝히려 하지 않았다

 

 

 

日敎組 “관동대학살 피해 한국인 6천6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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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연구집회서 수업사례 보고..초중고 교과서도 “6천명 이상”

(도쿄=연합뉴스) 최이락 특파원 = 일본이 적어도 지난해까지 “1923년 일본 간토(關東)지방에서 발생한 대지진 당시 한국인들에게 자행된 학살(관동대학살

)의 피해자는 6천600명”이라고 가르친 사례가 공개됐다.

이는 그동안 일본측이 주장해온 숫자의 3배에 달하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일본 야마가타(山形)현에서 24일 열린 일본교직원조합(일교조)의 교육연구 전국집회에서 공개됐다. 일교조의 전국집회는 연 1회 열리는 것으로 전년도 교육사례가 발표되는 자리다.

산케이(産經)신문은 25일 일교조의 교육연구 전국집회 중 사회과 교육분야 분과회의에서 일본이 지난해 이런 내용의 수업을 진행했다는 교육사례가 보고됐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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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에서 고교에 이르기는 교과서를 보면 상당수가 이 학살을 다루고는 있지만 “수천 명이라고 기술된 곳도 있는 등” 통일성이 결여돼 있습니다.

정부 차원에서 공식적인 진상 규명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朝鮮人日本留学生たちの ¥"東京地震韓国人虐殺報告書





在日朝鮮人乳学生会(在日朝鮮人留学会)は 1924年 1月代表者金Kun(金〓)の名医で ¥"東京地震韓国人虐殺報告書¥"を作成した. 見て中虐殺内容の一部を抜粹する.



¥"河東(河東) 広場に韓人(韓人)を多数含んで幾千気迫人をいっぺんに乱射して兵営または警察署構内に気迫幾十人を集合させて殺害した. その上に路上で見次第に兵力ないし警察官が銃殺したことはもちろん普通の殺人手段だと言えなくいわゆる自警団, 青年団などは ¥"朝鮮人!¥"と叫んで歌う一言にバックイウングしてナング(狼)義軍(群)と一緒に東西南北から群がって来て 1人の同胞を数十人が飛びかかって刀で突いて鉄砲でうって棍棒で殴って足で蹴って倒してさらに死んだ人の首を引きじて通いながら陵辱こんにちはだった. 身を電信柱に縛って初めて目の玉を抉って鼻を突いてその悲しくて痛い光景を充分に見物した後お腹を突いておかゆである事もある.



町内の前を流れることはうちの同胞の鮮血であっちこっちで崩れたことはうちの同胞の死骸だ. うちの同胞の死骸が堆積して右前天恩流通も支えて同胞の血が腐るその悪臭は通行人のホホブが支えるほどだった.¥"



日本政府では当時外国人が韓国人虐殺場面を目撃することができないように外国人を覚書きに集合させて見張って外出を禁止させた. そしてその周りで鉄砲をうって喧嘩をしながらこの銃声は韓国人たちの銃声でこのけんかは韓国人たちが襲う音だ.と欺瞞する同時にあっちこっちで韓国人が暴行をはたらくとか襲っていると宣伝した.



朝鮮総督は同 6日各新聞に公布して調査して見た結果関東地方朝鮮人は労動者 3千名, 学生 3千名, 合計 6千名の中で殺害された者は 2人だけだ.と言った. 当時日本に住んでいた朝鮮人の中で 5分の 1が関東地方にあったからその数価 3万以上に達することは三尺童子もすべて分かっていた. 多数の人名を殺戮しながら 2人だけだと発表したことは実に心配(獣心)の詭弁に違いない.


● 中田県朝鮮人労動者集団虐殺



私たちはよく日帝(日帝)の朝鮮人労動者徴用が太平洋戦争時期にだけあったことと間違えやすい. しかし事実は国権侵奪といっしょに日製は安っぽくて質のよい労動力を求めようと朝鮮の多くの青壮年を各種工事現場で連れて行った. もちろんはじめから徴用領みたいな人力収奪制度があったのではなかった. 東洋拓殖株式会社(東洋拓殖株式会社)や親日地主たちに地をベアッギン農民たちに多くのお金をくれると欺いて日本に連れて行った. 大部分が農土を失った小作人や離農流民, 都市の失業者たちだった.



こんなに日本に渡った同胞は毎年増えた. 1913年度に 3600人だった在日居留民は 18 年間に 2万 2千名, 23年に 8万 6百人で増加して 28年に 24万 3千名だった居留民需が 33年には 42万 6千名で増えた. 33年 6月末現在 42万 6千名だった在日居留民の中で 33.1%である 14万 3千名だった居留民需が 33年には 42万 6千名で増えた. 残り 10万の定職労務者は職工や雇用人で鉱山労務者が三番目で多かった. これらに対する補修は日本人労務者の 70% 以下位だったし半額未満の場合もあまたあった. 同胞たちはこのようにひどい差別を受けながらもひもじさを兔れるために日本に渡った. 1922年 8月に大きく物議をもたらした中田県の朝鮮人労動者集団虐殺事件もこのような状況でやらかされた.



1922年初からシナノ−がと[信濃川]の急流を沿って下がる朝鮮人労務者たちの死骸が発見された. 初めにはハンドグの死骸が下がっている途中徐々に多くの屍の漂流死骸が発見されてこれが日本の新聞に報道されることで社会問題になった. 漂流死骸たちはシナノ−カとダム建設工事現場に動員された朝鮮人労務者たちが日本人現場工事監督たちによって殴ぐられて死んだ死体という事実も知られた.



こんな無惨な事実が伝わりながら当時東京等地に居留したアナーキスト朴烈(朴烈)が主導した黒道回(黒道会) 幹部たちは調査団を構成して現場調査に取り掛かって日製の血なまぐさい朝鮮人虐殺蛮行を暴露した. シナノ−がとダム工事現場は認可で 30里, 鉄道辺で 1白里以上離れた人里離れた工事現場として朝鮮人労務者たちが作業に動員された以来 ¥"地獄の谷¥"と呼ばれるようになった. 山をくぐって峰を削ってダムを作ってバルゾニャング 30万キロワットの東洋最大発電所を建設するということが計画だった. ダム工事に必要な人足たちを日製は主に慶南一帯で募集して行った. 往復旅費は雇い主が負担して一日 8時間労動制で月 2日の有給休暇と高額の賃金を与えるという口車(甘言利説)に多い朝鮮人がこちらでひかれて来た. 800人余りの朝鮮人労務者がこのダム工事に動員された.



しかし一日 14‾15時間の大変な労動をさせた後 ¥"したところ¥"だと呼ばれる監獄のような労務者飯場に閉じこめておいて低賃金に強制労役をさせた. ハンバは日製が明治時代初期北海道開拓を始めた以来続いている日本特有の飯場だった. 最初北海道の叛軍を征伐した明治政権がこの罪囚たちを鉄道工事に動員しながら罪囚たちが逃げることができないように監獄を彷彿させる珍しい構造で飯場を作ったことがハンバの来由だった. シナノ−がとダム工事にはハンバをそのままいかして飯場という名前の監獄を作って朝鮮労務者たちを収容しながら労動力を搾取して殺傷を食事するようにやらかした. 朝鮮人労務者たちは夜明けに現場でひかれて行って一番危ない工事に動員されてそれさえも 2‾3中の下請組に賃金の胎盤をベアッギョッダ. 耐えれなくなり逃げれば下請組の親分たちがピストルで殺害するとかつかまえていた顧問をほしいままにした.



密陽出身の金甲鉄(金甲〓)は 19歳の少年労務者だったが逃げだしてつかまって下請組責任者が荷役する時使うスェッガルゴリで素肌 10あまりの所をチック舌流血が散り乱れて乱雑だった. それも足りなくて羅体(裸体)で作ってヌングドングが中におおよそ 3時間を捨ておいた. ウユンソング(禹允成) など 3人も逃げるつかまって裸にしたまま煙瓦を取るバウンダリーに入れた後水と砂, セメントを交ぜて固まるようにした. 時間が経つとセメントが徐徐に固まりながら石と砂がサルソックで掘り下げる血なまぐさい拷問にあった. このようにして死傷者が発生すれば川水に投げるとか工事現場に売場させたからどれだけ多い人が犠牲されたのか正確な数字さえ分からない. しかし朴烈と金薬水など黒道回幹部の真相調査に違えば 1百人以上死亡して少なくない数価抑留されたことで現われた. 黒道回は東京と大阪などで演説会を持って日製の野蛮的な蛮行を糾弾した. しかし日本警察はオスギ坂になど日本の良心的な学者たちが撚糸に出ることができaようにするずに朝鮮人 6人, 日本人 2人の撚糸を拘束してこの事件が社会に知られることを阻もうと思った. 日本の内務省と朝鮮総督府も事実を隠蔽して責任逃れにだけ汲汲しているまだ正確な真相を極めようと思わなかった

 

 

 

日教組 関東大虐殺被害朝鮮人 6千600人

 


教育研究集会で授業事例報告..小中高教科書も 6千名以上

(東京=連合ニュース) 催利落特派員 = 日本が少なくとも去年まで 1923年日本関東(関東)地方で発生した大震災当時朝鮮人たちに恣行された虐殺(関東大虐殺)の被害者は 6千600人だと教えた事例が公開された.

これはその間日本側が主張して来た数字の 3倍に達するのだ.

のような事実は日本山形(山形)現で 24日開かれた日本教職員組合(イルギョゾ)の教育研究全国集会で公開された. イルギョゾの全国集会は年間 1回開かれることで前年度教育事例が発表される席だ.

産経(産経)新聞は 25日イルギョゾの教育研究全国集会の中で社会科教育分野分科会議で日本が去年こんな内容の授業を進行したという教育事例が報告されたと伝えた.
 











小学校で高校に至ることは教科書を見ればかなり多い数がこの虐殺を扱ってからはあるが ¥"数千人だと記述された所もあるなど¥" 統一性が欠けています.

政府次元で公式的な真相糾明が成り立たなかったから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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