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한국에 철도를 놓아주고 공장을 지어주었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의 번영이 있었던 것일까? 일본이 한반도에 철도를 놓고 공장을 지었던 사실이 있다고 하더라도 당시 일본의 정책은 한국인에게 철도 놓는 방법을 절대로 가르쳐주지 않고 공장을 건설하는 방법을 절대로 교육하지 않는 것이었다.
일본이 한국을 강제로 병합하기 전에 이미 한국에는 5000여개의 사립학교가 있었다. 1895년 고종황제가 교육입국조서를 통해 교육에 적극 나설 것을 촉구한 이후 각지의 부유층을 중심으로 학교설립이 이어진 결과였다. 그러나 일본은 1908년 사립학교령을 제정하여 사립학교의 설립과 운영을 통제하였고 교과용도서검정규정을 공포하여 민족주의적 색채가 담긴 교과서는 강제로 폐지시켰다.
이후 4차에 걸친 조선교육령을 통해 사립학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여 1940년대 말에는 친일파가 운영하는 사립학교 800여개가 남았을 뿐이다. 일본은 적극적으로 관립학교를 설립하기 시작하지만 그 대부분은 초등교육기관으로서 그나마도 대한제국의 6년제 소학교는 일본의 통치하에서 4년제 普通학교로 대체된다. 중등교육기관은 각 道에 설치가 될 정도로 희귀하여 상급학교 진학을 원천적으로 막았고 대학은 완전히 폐지하여 없애버렸다.
1919년 3.1운동으로 한국인의 불만이 폭발하자 일본은 2차 조선교육령에서 민립대학 설립을 가능하도록 하지만 한국인들이 정말로 모금을 통해 대학을 설립하려고 하자 급히 경성제국대학을 설치하고는 “이미 대학이 있으니까”라는 이유로 민립대학설립운동을 탄압하여 파탄낸다.
그러나 경성제국대학은 비록 서울에 설치되었지만 신입생 모집은 주로 일본에서 이루어졌다. 실제로 1929년 경성제국대학의 1회 졸업생을 살펴보면 법문학부 졸업생 68명 가운데 한국인은 22명이었다. 의학부 1회 졸업생 55명 가운데 한국인은 12명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이 조선에서 실시한 유일한 고등교육인 경성제국대학의 실상이 이렇다. 한국인 홍사익이 일본군 장군이 된 경우가 단 한명 있지만 그 외에 한국인이 정치, 경제, 사회 분야에서 기관장이 된 사례는 전혀 없다.
다음은 권오기 씨의 <한국과 일본국>(권오기・와카미야 요시부미, 샘터, 2005)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과거 일본의 식민지정책 중에는 좋은 것도 있었다고 했지요.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극히 나쁜 식민지 통치였다는 증거가 해방후에 나왔습니다. 일본인이 모두 돌아간 뒤에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한국은행 총재가 될 만한 한국인은 없었습니다. …… 해방직후 한국에서는 그 어떤 기관도 한국인의 책임 아래서는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일본이 한국을 떠난 것입니다. 서양의 식민지였던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해방 후의 사죄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식민지 시대에 이미 식민지 이후의 통치를 염두에 두고 국가기관을 육성한 측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도의 간디와 네루는 영국과 싸웠지만, 그와 동시에 국민회의파 후보로 출마하여 의회 활동을 했습니다.(영국의 통치하에서 민주주의를 학습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는 것:註) …… 그러나 한국의 경우에는 일본이 물러가자 대학 총장조차 없었습니다.
왜 이런일이 발생했는지 알 수 있는 구절을 소개한다. <근대 일본의 사상가들> (가노 마사나오, 삼천리, 2009)에 보면 어느 한국인 유학생이 일본인 저자에게 이렇게 묻는다.
“일본은 무엇을 위해 우리를 교육하는가. 일본을 위해 우리를 교육하는 것인가?”
3차조선교육령에선 아예 조선어를 선택과목으로 바꾸면서 학교에서 조선어를 사용하면 벌금과 체벌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조선어를 선택과목으로 선택할 수 있는 대담한 학생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서는 “한국인 본위의 교육을 실시하라”라는 구호가 등장하는 것이다.
(광주학생운동은 광주의 통학기차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한국인 여학생을 성추행하는 것을 한국인 남학생들이 목격하고 싸움이 붙었는데 일본 경찰이 일본인 학생들은 훈방하고 한국인 학생들을 가혹하게 다루는 것에 격분하여 전국으로 항일항쟁으로 확대된 사건이다. )
일본이 철도를 놓고 공장을 지어주었으니 자랑스러운가? 그나마도 한국전쟁중에 대부분 파괴되어 미국의 원조를 받아 재건한 것이 지금의 한국이다.
만약 일본이 도서관을 짓고 대학을 각 지역마다 설치하고 한국인 학자를 양성하고 한반도에 의회를 설치하여 한국인 스스로 정치를 하도록 도왔다면 나는 일본의 식민지배에 감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인이 자랑스러워하는 것을 보면 겨우 철도와 공장이다. 그나마 해방후 기차와 철도를 생산하는 기술을 가진 한국인은 없었다. 공장을 한국인이 스스로 만들고 운영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일본은 한국인에게 고급기술이 전달되는 것을 철저히 막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인도인들은 영국의 통치 아래에서 의회를 조직하고 선거를 실시하는 등 민주주의를 습득할 수 있었다. 일본인들은 겨우 자랑하는 것이 철도와 공장인가? 부끄럽지도 않은가?
당시 조선총독부 건물이 조선에서 가장 크고 훌륭하고 멋진 건물이라고 자랑하고 싶은가? 그 건물을 일본인들만으로는 도저히 지을 수 없어서 독일인 기술자를 초빙했다는 사실은 왜 말하지 않는가.
일본인들은 일본이 “세계 최초”였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형 문법이다. 현재의 일본을 돌아보라. 반도체, 조선산업, 가전, 플랜트, 문화컨텐츠, 스포츠에서 한국에 하나 둘씩 따라잡히고 있다. 앞으로 더 많은 부문에서 한국에 추월당할 것이다. 일본인들은 정신 똑바로 차려라. 엉성하게 사실에 부합하지도 않는 것들을 가지고 자랑하려 하지 말고 최소한 부끄럽지 않고 당당한 일본인이 돼라. 가뜩이나 피겨 스케이팅도 한국에 당해내지 못하는 일본인데 멸시와 경멸까지 당해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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フキハラ 는 전형적인 난독증 일본인인 것 같다. 일본은 식민지 조선에서 기초적인 초등교육만을 실시하고 중등교육 이상은 갖가지 장애물을 두어 고의적으로 막았다. 더구나 그 초등교육이라는 것이 벌레같은 인간 히로히토를 찬양하는 문장을 암기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고 한다. 3.1운동이라는 전국적인 저항이 발생한 후에야 일본은 고등교육을 아주 제한적으로 허용한다.
그럼 어떻게든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한 엘리트 한국인은? 채만식의 「레디메이디 인생」에 그 실상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최고 학부를 졸업하고도 한국인에게 주어지는 일은 하급 사무원이나 단순업무가 전부였다. 어렵게 동양척식주식회사나 경성부(서울시청)에 취직한 한국인도 있었지만 이들이 사장이나 시장이 되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권오기 씨의 말대로 일본인은 식민지 조선에서 한국인이 사회의 중추를 맡는 일을 철저히 막았던 것이다. 식민지 시대 조선의 지식인들은 기본적으로 좌절과 패배감을 안고 살아야 했다. 그들이 생존하는 길은 철저히 친일파의 길로 나아가던가, 고난이 가득찬 항일 독립운동의 길로 나아가던가 둘 중 하나뿐이었다.
철도와 공장을 세웠다고 한국을 근대화했다고 주장하는 일본인들이여. 그런 주장은 바로 너희 얼굴에 스스로 똥칠을 하는 것이다.
日本が韓国に鉄道を放してやって工場を建ててくれたから今日韓国の繁栄があったことだろう? 日本が韓半島に鉄道をおいて工場を建てた事実があると言っても当時日本の政策は韓国人に鉄道おく方法を絶対に教えてくれないで工場を建設する方法を絶対に教育しないのだった.
日本が韓国を強制で竝合する前にもう韓国には 5000余個の私学があった. 1895年高宗皇帝が教育入国調書を通じて教育に積極出ることを促した以後各地の富裕層を中心に学校設立がつながった結果だった. しかし日本は 1908年私学領を制定して私学の設立と運営を統制したしギョグァヨングドソゴムゾングギュゾングを公布して民族主義的色彩の盛られた教科書は強制で廃止させた.
以後 4次にわたった朝鮮教育領を通じて私学を弾圧し始めて 1940年代末には親日派が運営する私学 800余個が残っただけだ. 日本は積極的に官立学校を設立し始めるがその大部分は小教育機関としてそれさえもも 大韓帝国の 6年制小学校は日本の統治の下で 4年制 普通学校で代替になる. 中等教育機関は各 道に設置になるほどに稀で上級学校進学を基本的に阻んだし 大学は完全に廃止してつぶしてしまった.
1919年 3.1運動で朝鮮人の不満が爆発すると日本は 2次朝鮮教育領で民立大学設立ができるようにするが朝鮮人たちが本当に募金を通じて大学を設立しようとすると急に京城帝国大学を設置してからは “もう大学があるから”という理由で民立大学設立運動を弾圧してパタンネンダ.
しかし京城帝国大学はたとえソウルに設置されたが新入生募集は主に日本で成り立った. 実際に 1929年京城帝国大学の 1回卒業生をよく見れば 法文学部卒業生 68人の中朝鮮人は 22人だった. 医学部 1回卒業生 55人の中朝鮮人は 12人に過ぎない. 日本が朝鮮で実施した唯一の高等教育である京城帝国大学の実際がこのようだ. 朝鮮人洪私益が日本軍将軍になった場合がただ一人いるがその外に朝鮮人が政治, 経済, 社会分野で機関長になった事例は全然ない.
次は権五奇さんの <韓国と日本国>(権五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