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소개 Relationship

● 제3차 일한협약(1907.7.24.)

(1) 제2차 일한협약 무효화 운동

제2차 일한협약을 강제당한 한국 황제는 즉각 무효화 운동에 나섰다. 1905년 11월 6일, 미국인 렇버트(Homer B. Hulbert)를 통해 미국 정부에 이 조약이 무효란 것을 알리고, 같은 달 22~30일 사이에는 미국에 체류중인 알렌(Horace N. Allen) 한국 주재 미국 공사에게 밀지(密旨)와 어새(御璽)가 날인된 백지 위임장을 전달하고, 12월 11일에는 파리에 주재중인 민영찬(閔泳瓚) 프랑스 주재 공사에게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국무장관과 회담토록 하였다. 그러나 미국 정부를 상대로 한 이런 노력은 루스벨트 대통령 행정부가 이미 가쓰라-데프트 협약을 통해 일본을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통할 리 없었다. 그 협약은 비밀에 붙여져 있었기 대문에 한국 정부로서는 그 관계를 알 수가 없었다. 한국 황제는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제1조에 따라 미국 정부는 이를 조정(調整, good offices)해 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1906년 1월 29일 제2차 일한협약에 따라 통감부(統監府) 설치가 눈앞에 다가온 시점에 황제 고종은 영국 “트리뷴”지 기자인 스토리(Douglas Story)를 통해 서양 열국들이 5년간 공동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하는 뜻을 표했다. 당시로서는 다국(多國)에 의한 시근적(時根的) 보호국화(保護國化)가 일본에 의한 배타적(徘他的) 보호국화(保護國化)를 피하는 최선의 길로 판단했던 것이다. 1906년 6월 22일자로 수호통상조약 체결 9개국 원수에게 제2차 일한협약이 강제된 것이므로 공사를 다시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는 한편, 헐버트에게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서 조정을 받는 특별임무를 부여하는 것을 밝히는 친서를 보냈다. 이 제2차 만국평화회의는 본래 1906년 6월에 열릴 예정이었으나, 일본 측이 러시아 황제에 의한 초청과 조기 개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여 한 해 뒤로 연기되어 특별위원(special envoy) 헐버트는 임무를 수행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고종은 거듭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물러서지 않고 1907년 4월 20일 다시 6월에 개최될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李相卨) 등 3인의 특사를 파견하였다. 제3차 일한협약은 이 사실이 표면화된 것을 계기로 고종의 국제적 무효화 운동에 대한 응징으로 강요되었으며, 응징은 황제의 강제퇴위란 극단적인 방법을 취하였다.

(2) 황제 고종 강제퇴위와 군대 해산

일본 정부는 1907년 7월 12일자의 대한처리방침(對韓處理方針)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한 것을 제2차 일한협약에 대한 위반행위로 간주하여 황제 고종의 퇴위를 요구하기로 결정하였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본국 정부의 지시 아래 7월 16일에 한국 정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으로 하여금 주청(奏請)케 하였다. 이후 4일간 황제 옹호세력과 내각, 통감부 간에 사투가 벌어졌다. 황제는 일본 측이 요구하는 토위를 거부하고 황태자에게 정사(政事)를 대리(代理)시키는 것 이상 양보할 수 없다고 버텼다. 19일 통감부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등을 시켜 황제에게 진정한 양위의 뜻을 표하라고 강요하는 한편, 그날 밤에 태묘(太廟)에 칙사를 보내고, 20일 아침 7시에 환관들이 신황제(新皇帝), 구황제(舊皇帝)를 대역하는 양위식[權停禮)를 거행하였다.

부당한 상황이 이렇게 급히 전개되자, 궁내부대신 박영효(朴泳孝)가 내각 측을 규탄하고 나서는 반격이 가해졌다. 그러나 22일 새벽 1시경, 궁내부대신과 내대신(內大臣) 이도재(李道宰), 그리고 일단의 시위대(侍衛隊) 장교가 체포됨으로써 상황은 다시 통감부 내각 측이 유리하게 바뀌었다. 궁내부 측과 시위대 장교들은 21~22일 사이에 내각 측의 중심인물들을 체포할 계획을 세우고 잇었는데, 통감부 측이 이를 미리 탐지하여 한국 주둔 일본군 사령부의 병력이 기습적으로 궁궐로 들어와 이들을 체포했던 것이다. 통감부는 7월 22일을 신, 구황제 교체일로 잡고 7월 24일 제3차 일한협약을 통과시켰던 것이다. 통감부는 8월 2일 새 황제의 연호를 정하기까지 하였지만, 황태자가 태묘(太廟)에 가서 선대왕(先代王)들의 위패 앞에서 제위(帝位)에 오를 것을 밝힌 것은 11월 18일이었다. 11월 15일 “구황제(고종)”가 태묘에 가서 이 강요된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선대왕들의 영전에 고하고 황태자에게 제위에 오를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제3차 일한협약의 추진에서 황제 고종의 강제퇴위는 일본의 한국 국권 탈취 과정에서 일어난 최대의 강박, 위협이었다. 제3차 일한협약이 강제된 1907년 7월 22일 한국 황제 측은 양위가 아니라 대리(代理)를 주장하고 잇었기 때문에 구황제의 제위가 신황제에게로 넘어갔다고 볼 수 없으며, 신황제도 이를 수락하지 않은 시점이었다. 황위(皇位)가 이렇게 불확실한 시점에서 조약을 위한 전권위원에 대한 황제의 위임이나 조약문에 대한 비준이란 것은 있을 수가 없었다. 그 혼돈 속에 일본군이 궁궐로 직접 들어가 반대세력(황제옹호세력)을 체포했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내대신(內大臣) 체포와 동시에 황제의 어새들을 강제 탈취한 것도 결정적인 강박, 위협의 행위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7월 31일 더 이상 저항세력이 준동치 못하게 하기 위해 군대 해산을 명령하는 한국 황제의 조칙문(詔勅文)을 자신이 직접 작성해 이에 근거해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런 모든 강박의 절차를 수행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7월 22일자로 1개 여단을 증파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3) 한국 병합 조약(1910.8.22.)

① 치밀한 사전준비 - “병합준비위원회(倂合準備委員會)”

일본 정치 지도자들 사이에 한국병합은 1907년 7월 “헤이그 밀사사건”에 대한 대책 수립에서 이미 거론되기 시작했다. 대책안 11개 검토사항 중 첫번째가 한국 황제가 일본 황제에게 양위(讓位)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다수가 “지금은 불가하다.”라는 의견이었다. 단, 준비중인 제3차 일한협약에 한국 황제가 동의하지 않을 때는 병합을 결심할 수 있다는 것이 마지막 안으로 올라 있었다.{25} 이 유보조건도 제3차 일한협약을 추진하면서 황제 고종을 강제퇴위시킴으로써 병합문제는 다시 거론되지 않았다.

{25}▶註;『일본외교문서(日本外交文書)』40권 1책 사항(事項) 12. 455-456. 일한협약체결(日韓協約締結)의 건(件) “한제(韓帝)의 말사파견에 관련한 모의(廟議) 결정의 대한처리방침(對韓處理方針) 통보의 건(件)” 명치(明治) 40년 7월 12일 참조.

그러나 고종 강제퇴위, 군대 해산 이후 한국 민중은 곳곳에서 의병항쟁(義兵抗爭)을 일으켜 치열한 항일투쟁(抗日鬪爭)을 벌였다. 이토 통감은 자치육성정책(自治育成政策)을 펴 한국인들을 회유하면서, 1919년 1월에는 황제 순종(純宗)을 전국 순행(巡幸)에 동원하였다. 그러나 이로써도 의병항쟁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이토 통감은 6월 자신의 회유정책의 실패를 인정하고 사표를 냈다. 바로 이어 일본 각의는 7월 6일에 “한국병합(韓國倂合)에 관한 건(件)”을 중심으로 한 “대한정책확정(對韓政策確定)의 건(件)”을 통과시켰다. 적당한 시기에 한국병합을 단행하며, 그 시기가 올 때가지 병합 방침에 근거하여 보호의 실권을 쥐고 힘써 실력을 부식한다는 방침을 정했다.{26}

{26}▶註;『일본외교문서(日本外交文書)』42권 1책 사항 7. 144. 대한정책확정(對韓政策確定)의 건(件) 명치(明治) 42년 3월 30일 수상에게 제출. 7월 6일 각의결정.

1910년 5월에 일본 황제는 육군대신(陸軍大臣)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를 한국 총감(總監)으로 겸임 발령하였다. 한국병합을 본격적으로 실행할 조치였다. 이에 6월 3일에는 병합 후의 한국에 대한 시정방침(施政方針)을 결정하였다. 병합 후에 한국에 내헌법(內憲法)을 시행하고 일본 황제에 직속하는 총독(總督)을 두어 조선에서의 일체의 정무를 통할하는 권한을 부여한다는 것을 정하였다. 그리고 이를 실천하는 위원회로 병합준비위원회(倂合準備委員會)를 곧 설치하였다.

병합준비위원회의 주요 검토사항은 한국 황실의 대우 한국 원효대신(元孝大臣)의 처우, 한국 인민에 대한 통치방침, 병합 실행에 필요한 경비, 병합 후의 국호(國號), 한국인의 법적 지위, 한국에서의 각국의 조약상의 권리, 수출입품에 대한 과세, 한국의 체권, 채무의 계승문제, 병합시에 공포될 제칙령안(諸勅令案) 등 총 21항에 달했다. 위원회의 결정은 7월 7일에 완료되어 8일 각의에서 병합실행방법세목(倂合實行方法細目)으로 승인을 받았다. 이날 각의(閣議)에서는 “병합의 조약체결의 형식에 의하지 않는 경우의 조치도 공포”했다고 한다. 즉 병합조약 조인이 불가능할 때는 일본 측이 일방적 선언을 행하는 것으로 병합을 강행하는 방안도 검토했다는 것이다. 이웃한 나라를 병합하기 위해 준비를 치밀하게 하는 것은 필요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용도는 상대와의 합의(合意)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준비된 사안들은 현지에서 일방적 요구로 실행에 옮겨지고 있었다.

② 일본 측의 일방적인 진행.

한국 현지에서의 “병합(倂合)” 실행 과정은 1910년 11월 7일자로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본국 내각총리대신 가쓰라 다로[桂太郞]에게 올린 “조선총감보고한국병합시말(朝鮮總監報告韓國倂合始末)”에 자세하게 정리되어 있다. 이 보고서가 밝히는 현지 상황은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통감 데라우치는 8월 16일 한국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통감관저로 초청해 “두 나라가 합혀 하나로 하여 정치기관을 통일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병합의 일은 고금(古今)의 역사에 비추어 보건데 그 예가 적지 아니하며 혹은 위압으로써 이를 단행하거나 선언서를 공포하여 협약을 사용하지 않기도 하지만, 일.한은 지금가지의 관계를 되돌아보고 또 금후 양 국민의 친목을 도모함에서 이 같은 수단에 호소하는 것은 심히 좋지 않기 때문에 (중략) 그 형식은 합리적 조약으로서 상호의 의사를 표시하는 것을 타당하다고 인식하는 것에 의한다.”고 하였다. 요컨대 병합조약만은 “합의적 조약”의 형식을 구한다는 것을 밝혔다. 그런 다음 그 대요(大要)를 열거하면서 이에 동의하는 각서(覺書)를 요구하였다. 각서는 조약이 “합의적”인 것이 되도록 하기 위해 한국 황제가 “통치권을 일본 천황에게 양여(讓與)시키는” 형식을 취하고 이에 대한 대가로 한국의 황제, 태황제, 황태자, 기타 황족의 강녕과 한민족 상하의 복리(福利)에 관계되는 조항들을 둔다는 원칙을 제시하였다. 요컨대 일본 측이 말한 합의란 일본이 준비한 모든 방침에 대한 한국 황제 측의 동의로서, 그것은 동의가 아니라 엄연한 강요였다.

이어 데라우치 총독은 조약체결의 순서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은 일방적 지시를 통지하였다. 즉 총리대신은 먼저 각의를 거친 다음에 한국 황제에게 위와 같은 취지를 아뢰고 조약체결을 위한 전권위원의 임명을 황제에게 주청하여야 하는데, 총리대신이 전권위원이 될 것을 요구하라고 하였다.

데라우치 통감은 어전회의(御前會議) 당일 22일 오전 10시를 기해 궁내부대신 민병배(閔丙裵)와 시종원경 윤두영(尹德榮)을 관저로 불러 내각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이 전권위원(全權委員)에 임명되도록 하는 데 적극 협조할 것을 요구하는 동시에 이 뜻을 미리 황제에게 아뢰는 임무를 부여하면서 준비한 “전권위임(全權委任)에 관한 칙서안(勅書案)”을 건네주었다. 칙서안은 당일에 한국 황제에게 제시되었고, 황제는 두세 시간을 끌던 끝에 이름자 서명을 해주고 국새(國璽)를 날인하였다.

한국 황제에게는 저항할 만한 아무런 수단도 없었기 때문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군대가 해산당하고 경찰권(警察權)도 일본군 헌병대가 대행하고, 모든 권력이 통감부로 넘어가 있는 상태에서 황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두세 시간 시간을 끌여보는 것분이었다. 앞에서 서술했듯이 서울 일원은 든 한달 전부터 계엄령이 내려진 상태였기 때문에 민중의 저항도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③ 일방적 진행 속에 남겨진 순종(純宗)의 거부의사

한국병합조약(韓國倂合條約)은 정식조약의 요건 중 하나인 전권위원위임칙서(全權委員委任勅書)는 갖추었다. 그러나 다른 하나의 요건인 비준절차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본 조약이 정식조약으 요건을 갖추고자 했다면, 조약문에 우선 비준(批准)에 관한 조항을 두었어야 했다. 그러나 이에 관한 조항 대신에 조항의 효력에 대해 제8조에 “본 조약은 한국 황제 폐하 및 일본국 황제 폐하의 재가를 거친 것이니 공포일로부터 이를 시행함”이라고 규정하였다. 사전승인이라는 특이한 형식을 취한 것이다. “시말(始末)”은 한국 황제의 승인 과정에 대해 “황제는 오후 2시에 내전(內殿)에 나시어 먼저 통치권 양여의 요지를 선시(宣示)한 다음, 조액체결의 전권위임장에 친히 서명하고 국새를 찍어 이를 내각총리대신에게 내렸다.”고 하였는데, 이에서 통치권 양여의 요지를 선시한 것이 곧 사전재가의 과정에 해당한다.

운노 후쿠주[海野福壽]는 이 사실에 근거해 사전승인설을 정식으로 주장하였다. 그는 이렇게 사전승인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조약에는 비준조항이 없으며 외교행위로서의 비준서 교환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27} 그러나 이런 형태의 사전승인의 예는 국제조약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것으로, 이 이례성에 대해서는 운노 교수도 인정하였다.

{27}▶註; 운노 후쿠주[海野福壽] 저술『한국병합불성립론(韓國倂合不成立論)의 재검토와 한국 학계의 인식』”세카이[世界]” 1999년 10월호 참조.

일본 측 주장대로라면 사전승인을 해준 주체는 한국 황제 순종(純宗)이다. 그런데 그가 “병합조약”이 강제되었다는 것을 직접 밝힌 사실이 최근 확인되었다. 순종은 1926년 4월 26일 붕어(崩御)하기 직전에 자신의 곁을 지키고 있던 궁내대신(宮內大臣) 조정구(趙鼎九)에게 구술로써 자신은 병합을 인준해 준 적이 없다는 내용의 유조(遺詔)를 남겼고, 그것은 2개월 뒤 미국 샌프란시스코 한국 교민들이 발행하는 신한민보(新韓民報) 1926년 7월 8일자에 보도되었다. 황제 순종은 유조를 남기는 목적을 “병합 인준(認准)의 사건을 파기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 날의 병합 인준은 강린(强隣; 日本)이 역신(逆臣)의 무리와 더불어 제멋대로 해서 제멋대로 선포한 것이요, 다 짐의 한 바가 아니라”고 절실한 심경으로 밝혔다. 일본 측이 자신을 비원(秘苑) 깊숙한 곳에 유폐시켜 놓고 바깥과 접촉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이 사실을 지금까지 알릴 수가 없었던 점도 함께 밝혔다.

통감부는 1910년 9월 8일자로 “한국병합” 관련 공식 문서집으로 조서조약내법령(詔書條約乃法令)이란 책자를 출간하였다. 여기에는 “병합(倂合)을 알리는 일본천황(日本天皇)의 조서(詔書)”, “한국 황제가 총리대신 이완용을 전권위원으로 위임하는 조칙(詔勅)”, “병합을 알리는 한국 황제의 칙유(勅諭)” 등 관련 중요 문건 6종이 실렸다. 그런데 양국 황제들의 이름으로 내려진 조서들은 모두 황제들이 이름자 서명을 하고 날인한 것으로, 이 책자는 해당 부분을 “어명(御名)”, “어새(御璽)”라고 표기하였다. 그런데 “병합을 알리는 한국 황제의 조칙”은 어새만 표시되고 어명은 없다. 동일한 문서의 원본으로 한국 황제의 “조칙(詔勅)”집에 철해져 있는 것이나,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홍보용으로 따로 만들어 보급한 것도 마찬가지로 어명은 빠져 있다.

문제의 이 조칙이 만들어진 경로는 다음과 같다. 8월 22일 한국 총리대신 이완용은 황제로부터 “전권위원 위임 칙서(勅書)”를 받아들고 통감 관저로 갔다. 거기서 데라우치 통감과 함께 준비된 조약문에 기명 날인하였다. 이때 데라우치 통감은 이완용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도 다른 한장의 각서(覺書)를 제시하고 이에 서명할 것을 요구하였다. 즉 “병합조약 및 양국 황제 폐하의 조직은 모두 쌍방이 합의하여 동시에 공포하며, 이 조약 및 조칙은 언제라도 공포할 수 있도록 바로 필요한 수속을 해둔다.”라는 내용이 적힌 각서였다. 여기서 말한 조칙이 바로 위 “병합을 알리는 양국 황제의 조칙”으로, 데라우치 통감은 이것을 미리 준비해 가지고 있다가 이 자리에서 이완용에게 보여주고 각서에 서명토록 했던 것이다. 병합조약은 사전승인 형태를 취했지만, 양국 국민들에게 알리는 절차는 생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각서가 따로 준비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양국 황제들의 조칙 중 한국 황제의 것에 황제의 이름자 서명이 빠져 있는 것은 한국 황제가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28} 만약 그렇다면 이는 중대한 사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사실은 서명권자인 황제 순종이 죽기 직전에 유조(遺詔)로 밝힌 사실, 즉 병합조약은 일본이 역신(逆臣)의 무리와 더불어 제멋대로 해서 선포한 것이라고 밝힌 것과 꼭 일치한다. 이 사실은 황제가 “병합”의 최종 절차에서 반대의사를 표시한 물증이 되기에 충분하다. 각서에 근거한 병합을 알리는 조칙에 사용된 어새[勅命之寶]는 “전권위원 위임 칙서”에 사용된 국새[大韓國璽]와는 다른 일반행정 결재용으로, 1907년 7월 고종 강제퇴위 사건 이후로 통감부가 관장하고 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국 황제의 공포 칙유에 찍힌 어새는 병합조약 강요 당시 황제의 관할 밖에 있던 것으로 그 날인은 황제의 의사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

{28}▶註; 이태진(李泰鎭) 저술『공포칙유(公布勅諭)가 날조된 한국병합조약(韓國倂合條約)』”일본의 대한제국 강점” 까치 1995. 205-209면 참조.

일본 정부와 총독부(1910년 9월 29일 발족)는 “병합” 사실을 널리 홍보할 때, 사전승인의 중요한 근거인 “전권위원 위임 칙서”보다도 “병합을 알리는 조칙”을 더 많이 사용하였다. 이 점도 후자가 사실상 비준서(批准書)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직접 뒷받침한다. 비준이란 상대국뿐만 아니라 자국 국민에게 조약체결의 사실을 알리는 목적을 함께 갖고 있는 것이므로, 후자가 기능적으로 이에 더 가까운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일본 정부가 “합의적 조약”으로서 요건을 모두 갖추고자 했던 병합조약조차도 한국 황제의 “합의”가 표시된 비준(批准)의 확실한 물증을 확보하지 못했던 것이다.

출처; 서울대학교 출판부 編 “한국 병합의 불법성 연구” (2003년)

해설; 이태진(李泰鎭) 서울대학교 인문학부 교수

{계속}


1904‾1910年韓国国権侵奪条約たちの手続上不法性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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