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조약 강제의 실상과 문제점
◆ 무력(武力)의 지속적 개입
러일전쟁은 일본이 한반도를 독점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던진 승부수였다. 국권탈취 관련 조약은 이 전쟁의 승세(勝勢)에 따라 단계적으로 강요되었다. 그 조약들의 격식 위반이 많았던 것은 한국 측이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본으로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국제적 협조가 필요했다. 일본은 러시아의 남하를 경계하는 미국과 영국을 그 협조자로 이용하기로 전략을 세웠다. 그러나 이 나라들도 국제적 관례를 무시하면서까지 일본을 도울 나라들은 아니었다. 일본이 이들의 협조를 얻기 위해서는 필요한 절차를 국제관례에 따라 밟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한국 자체의 저항과 이 외양 갖추기 사이에 생길 간격을 메우기 위해 일본 정부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문서변조뿐이었다.
그러나 문서변조의 범죄행위를 행해서도 일본 정부가 획득한 것은 정식조약(正式條約)이 아니라 약식조약(略式條約)이었다. 그것도 군사력을 동원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가운데 가능했던 것이다. 이것은 결국 한국의 저항이 그만큼 컸거나 아니면 한국 병합이 당시의 국제사회 여건상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군사력 동원에 의한 위협, 그것은 국권침탈 관련 조약들의 여러 형태의 불법상을 낳은 근원이었다. 관련 5개 조약 강요시의 병력 동원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 표 6(생략)과 같다.
일본 정부는 1904년 2월 6일 개전(開戰)과 동시에 이미 편성해둔 한국 임시 파견대(韓國臨時派遣隊)를 정로군(征露軍)과 함께 출병시켰다. 임시 파견대(臨時派遣隊)는 제12사단 예하 보병 제14연대 제1대대, 제47연대 제2대대, 제24연대 제1대대, 제46연대 제2대대 등 4개 대대를 기간으로 하고, 원산에 주둔하는 보병 제37연대 제3대대와 제12사단 병참부 및 제47연대 제1대대도 이에 예속시켰다. 그리고 나중에 제45연대 일부를 부산에 파견하여 일본군이 한국 전역에 배치되는 상황이 형성되었다. 일본군은 한국 임시 파견대의 서울 진주 후에도 이 부대의 전력 보강과 정로북군(征露北軍)의 증파를 구실로 서울뿐 아니라 연일 전국 도처에 들어왔다. 특히 인천, 서울간은 일본군과 그들의 군수물자로 가득하였으며, 서울의 주요 건물들은 일본 침략군의 병영(兵營)이 되다시피 하였다. 의정서(議定書)는 이런 상황 아래서 주한 일본 공사를 통해 한국 정부에 일방적으로 제시되었으며, 이 공포 분위기에서 한국 정부가 저항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제1차 일한협약 때에도 상황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한국 임시 파견대는 3월 11일자로 한국 주차군(韓國駐箚軍)으로 개칭되어 상주(常駐) 병력화(兵力化)했다. 의정서의 제4조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기(臨機) 수용한다.”는 것에 근거한 것이다. 1905년 11월 제2차 일한협약 때는 한국 주차군을 증원하기 위해 “경성(京城) 주둔 목적으로 제국(帝國) 군대를 수송”하였다.{19} 1907년 7월의 제3차 일한협약은 황제 고종의 강제퇴위와 한국 군대 해산이 함께 이루어져야 할 사항이었으므로 군사력의 뒷받침이 더 필요하였다. 따라서 1개 여단 병력이 본국에서 따로 증파되었다.{20}
{19}▶註;『일본외교문서(日本外交文書)』38권 1책 사항 11. 259 한국보호권(韓國保護權) 확립보행(確立寶行)에 관한 각의법정(閣議法定)의 건(件)(제7항) 명치(明治) 38년 19월 27일.
{20}▶註;『일본외교문서(日本外交文書)』40권 1책. 사항(事項) 12. 일한협약체결일건(日韓協約締結一件), 509. 명치(明治) 40년 7월 21일 등.
한국 주차군(韓國駐箚軍)은 1907년 2월 만한주차부대파견요령(滿韓駐箚部隊派遣要領) 제정으로 병력배치에 변동이 생겼다. 이 규정에 따라 1910년 5월 현재 주력 제2사단이 여전히 용산에 본부를 두되, 한국 북부를 수비영구(守備營區)로 삼았다. 러일전쟁 후 한반도에 대한 배타적 지배가 확보되고 민주 진출이 꾀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910년 5월에는 한반도 남부지역의 의병 토벌을 목적으로 보병 2개 연대의 임시 한국 파견대가 대구에 사령부를 두고 발족하였다. 1910년 5월 일본 정부 각의(閣議)가 한국 병합의 방침을 결정한 뒤, 한국 주차군 사령부는 6월 26일부터 위성(衛成) 상태에 들어가 숫자 미상의 헌병과 나남, 대구 등지의 주차군 병력을 이동시켜 7월 9일까지 2600여명의 육군 병력이 서울에 집결되었다. 그리고 경성, 용산 위성지경비규정(衛成地警備規定)과 각 부대에 관한 세부규정에 따라 창덕궁, 덕수궁을 포함하여 서울 전역에 병력이 배치되었다.8월 22일 병합조약(倂合條約)은 이런 삼엄한 경비 속에서 강행되었던 것이다.
러일전쟁 후 한국에 대한 일본의 군사적 위협은 계획적이요 상시적이었다. 그것은 한국의 보호국화 또는 병합에 필요한 절차를 위해 전략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한국의 국권을 탈취하기 위한 조약들은 이처럼 무력(武力)을 배경으로 추진되었기 때문에, 그 조약들이 형식을 제대로 갖춘 것이라고 해도 군사강점으로 성격이 규정지어질 소지가 많은 것이었다. 하물며 그 조약들이 한국 정부의 여러 형태의 저항으로 많은 하자가 남겨진 상태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 대표 매수, 위협의 현장
종래 일본 측의 한국 대표에 대한 위협 강제의 문제는 주로 제2차 일한협약을 중심으로 거론되었다. 그러나 다른 조약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제2차 일한협약은 그 중요성 때문에 강도가 높았을 뿐이지 다른 경우도 대표 또는 그에 상당한 직위에 대한 위협은 상례적으로 가해졌다. 한국 주차군의 상주(常駐) 자체가 지속적인 위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관련 5개 조약에 가해진 위협의 실상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의정서
러시아, 일본 간의 전운(戰雲)은 1903년 후반기에 이미 감돌기 시작했다. 일본은 이때 한국과 특별한 유대관계를 확립할 것을 원했다. 러시아와의 전쟁이 벌어질 경우, 한국과 러시아의 밀착이 일본에게 짐이 될 것은 불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1903년 10월 고무라[小村] 외무대신은 하야시 주한 공사에게 한국과 비밀조약을 체결할 것을 지시하였다.{21}
{21}▶註; 최영희 저술『러일전쟁 전의 한일비밀조약에 대하여』백산학보 (1967년) 11장 469-476면 참조.
하야시 공사는 한국 황제가 오래 전부터 요구해 온 황후 시해 가담자로 일본에 망명한 한국인들을 소환하는 문제를 밀약(密約)의 반대급부로 제시했다. 12월 말 일본국법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이들을 송환할 용의가 있다는 것을 한국 정부에 비쳤고, 황제 고종은 이에 대해 반응을 보였다. 이지용(李址鏞), 민영철(閔泳喆), 이근택(李根澤) 등을 하야시 공사에게 파견했다. 하야시 공사는 밀약의 초안을 내보이는 동시에 궁중에 지지세력을 확보, 유지하는 데 돈이 필요하면 제공할 용의가 있다고 비췄다. 1904년 1월 외부대신서리가 된 이지용은 하야시 공사로부터 운동자금으로 1만원을 받고 궁중의 비밀을 낱낱이 그에게 보고하면서 밀약이 체결되도록 진력하였다.{22} 그러나 황제의 신임을 크게 받고 있던 이용익(李容翊)은 밀약 체결을 강경하게 반대하였고, 황제도 그의 의견을 따라 일본이 한국의 국외중립선언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밀약체결을 수락하겠다는 의사를 비쳤다. 1월 21일 국외중립이 실제로 선언될 때가지 일본은 이에 동조하지 않았고, 따라서 일본의 밀약계획은 한국 측의 불응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국외중립 선언에 대해 영국과 독일이 1월 22일, 프랑스가 25일, 이탈리아가 29일에 각각 승낙 회신을 보내왔다. 러시아는 방관적 태도를 보였고,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2월 6일에 러시아와 개전(開戰)하였다.
일본은 러시아와 개전함으로써 더 이상 한국을 유화정책(有和政策)의 대상으로 삼을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이제는 한반도에서의 군사행동을 합법화해 돌 필요가 있었으며 의정서는 곧 이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 때 육군 병력의 대부분이 부산에 상륙하여 조선 국내를 종횡으로 통행한 것이 구미 각국 정부로부터 국제공법 위반사항으로 몰릴 것을 우려했다. 이에 사후처방이기는 하나 조선 조정에 대해 1894년 8월 26일자로 대일본대조선양국맹약(大日本大朝鮮兩國盟約)을 강요하였다. 의정서 제4조에 “제3국의 침해로 말미암아 혹은 내란 때문에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영토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에는 (대일본제국은)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기 수용할 수 있다.”고 한 것은 이 10년 전의 맹약과 마찬가지로 국제적 지탄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개전과 동시에 한국에 별도로 파견된 한국 임시 파견대가 장기 주둔할 법적 근거를 얻기 위해서도 이 조항은 필요한 것이었다.
막강한 군사력의 위협 아래 의정서가 강요되면서 다음과 같은 한국 측 대표 신상에 가해진 문제점도 발견된다. 이에 서명한 한국 측 대표 학부대신 이지용은 밀약 추진 때 하야시 공사로부터 뇌물을 제공받은 자였다. 그리고 비밀협약의 추진을 반대했던 이용익(李容翊), 이학균(李學均), 현상건(玄尙建) 등은 일본군에 잡혀 군함에 강제로 실려 일본으로 압송된 상태였다. 따라서 비밀협약 추진 때 일본의 의도를 간파하여 일본과의 제휴를 반대하는 세력의 핵심을 제거한 상태에서 의정서가 강요되었던 것이다.
● 제1차 일한협약(1904.8.22.)
1904년 8월 22일의 제1차 일한협약은 두 단계로 나누어 처리되었다. 하야시 공사가 본국 정부로부터 전달받은 3개 항의 안을 먼저 한국 외부대신에게 제시했고 외부대신은 황제의 명에 따라 참정(參政)과 도지대신(度支大臣)에게 이를 보였다. 한국 정부의 외교사안에 관한 의정부관제(議政府官制)의 규정에 따른 처리였다.
일본 측의 요구는 한국의 외교와 재무에 일본이 직접 개입하겠다는 것이었다. 제1항과 제2항은 재무, 외교 양 분야에 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일본인으로 채용할 것을 요구하였고, 제3항은 외국과의 조약체결 등에 관해 “일본 정부의 대표자”와 협의할 것을 요구하였다. 제3항은 일본 정부가 한국의 외교권(外交權)을 직접 통제하겠다는 것으로, 한국 정부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하야시 공사의 보고에 따르면 한국 외부대신은 이에 대해 한국 정부 안에서 이의를 제기하는 자들이 많아 자신으로서는 결정하기 어려운 곤란한 처지에 바져 있다고 어려움을 표했다고 한다. 하야시 공사는 이 상황을 “황제 스스로 내심 이에 반대하여 엄격한 수단으로 그 속뜻을 모모 대신들에게 알려 의정부원(議政府員)들이 반대하게 만든 것이 확실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는 8월 22일 주차군 사령부의 사이토 중좌를 대동하고 궁중으로 들어가 황제를 알현하여 의정부회의 수석대신, 궁내부대신 등이 임석하기를 요구한 가운데 황제의 재가를 거듭 요청하였다. 주차군 사령부의 지휘관을 대동하고 황제를 알현한 것은 최종 결정자인 황제에 대한 명백한 군사적 위협행위였다. 일본 측의 이런 압박 속에 한국 정부는 부득이 “일본 정부의 대표자”란 구절에서 “대표자”를 배는 조건으로 동의해 주었다.
고종황제실록(高宗皇帝實錄)에는 일본 측의 요구로 이루어진 황제의 일본 외교관 또는 군사령관 접견사례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 문헌에 의하면 1905년 2월 이후 주한 공사 또는 통감보다도 주차군 사령관과의 알현 사례가 더 많이 나타난다. 1905년 2월은 일본군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대련전투(大連戰鬪) 승리 이후 승기를 굳힌 바로 그 시점이다. 전쟁의 승세를 배경으로 주차군 사령부가 직접 한국의 궁궐을 압박해 들어가고 있는 상황에 대한 명백한 증거이다.
● 제2차 일한협약(1905.11.17.)
(1) 황제에 대한 위협
대한제국 황제와 대신들에 대한 일본 측의 위협은 제2차 일한협약 때 더욱 고조되었다. 이때는 보호국화가 목표였기 때문에 황제가 위협의 첫번째 표적으로 바로 올랐다.
일본 정부는 일의 중대성을 감안하여 두 차례나 내각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특파대사(特派大使)로 임명하여 현지 지휘를 총괄하게 하였다. 그는 1905년 11월 5일 도쿄를 출발하여 9일 서울에 도착, 10일 황제 고종(高宗)을 알현하고 친서(親書)를 전달하였다. 이때부터 두사람 사이에는 날카로운 신경전이 벌어졌다.{22} 이토 특사가 11월 117일로 정해진 예정일에 모든 일을 끝내려 한 반면, 고종은 어떻게 해서라도 이 일을 지연시키려고 했다. 10일 오후 3시 대좌에서 고종은 지금 받은 친서를 펴 보더라도 상세한 것을 살피기 위해서는 이를 번역해야 할 것이고 번역된 것을 숙독한 다음에 직접 대답해야 할 것이므로 시간이 걸릴 일이라고 답하였다. 이토의 재알현이 이루어진 것은 15일이었다.
15일 오후 3시, 재알현에서 황제 고종은 “형식보존”, 즉 공사(公使) 교환의 제도를 유지하는 조건이라면 다른 내용에 대한 협상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대안을 제시했다. 황제는 열국(列國)과의 외교통로는 어떻게 해서라도 유지해서 일본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날 기회를 외교적으로 해결해 볼 것을 기대했던 것이다. 고종은 당시 1906년 6월로 예정된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대한제국이 정식 회원으로 참가할 것을 요청하는 초대장을 주최측(초청자는 재1차 만국평화회의 제안자인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으로부터 받아놓고 있는 상황이었다. 황제의 “형식보존” 대안에는 이 회의 참석을 통한 상황 극복에 대한 기대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22}▶註;『일본외교문서(日本外交文書)』38권 1책 사항(事項) 10. 249 이등특파대사(伊藤特派大使) 귀국(歸國)의 건(件) 제1장 제1호 이등대사내알현시말(伊藤大使謁見始末) 명치(明治) 38년 11월 29일 참조.
11월 15일의 알현은 3시간 반 이상을 소요하였고, 두 사람의 대화는 팽팽하게 맞선 가운데 이토 특사의 위협 발언이 연발하였다. 황제는 공사 교환의 외교형식이 없어지면 일본에 대한 한국의 관계는 오스트리아에 병합된 헝가리나 서양 열국에 대한 아프리카 소국들과 같게 되지 않느냐고 탄식하면서 이를 시정해 줄 것을 거듭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 이토 특사는 이 협정이 체결되어도 한국의 군주는 그대로 독립을 유지하고 존속하니 이런 예에 비견하는 것은 지나친 망상이며, 일본의 뜻은 동양의 화란(禍亂)을 근절하기 위해 외교를 위임받고자 하는 것으로 내치(內治)는 한국 정부의 자치(自治)에 맡기는 것이므로 국체상 아무런 변동이 없는 것이라고 변명하였다. 이에 고종은 다시 “형식보존”설로서 다소의 변통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였으며, 이에 대해 이토 특사는 “오늘의 요체는 폐하의 결심 여하에 달린 것으로, 승락을 하든지 거부를 하든지 마음대로 하시더라도 만약 거부를 하면 일본 제국 정부는 이미 결심한 바 있어 귀국의 지위는 이 조약을 체결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곤란에 처하게 되어 한층 불리하게 되는 결과를 각오해야만 할 것입니다.”라고 위협했다.
이에 대해 황제가 다시 “일이 너무나 중대하여 짐이 혼자 이를 결정할 수 없고 정부 신료에게 자순(諮詢)하고 또 일반 인민의 의향도 살필 필요가 있소.”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이토 특사는 “군주전제 국가에서 정부 신료에게 자순을 구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으며, 일반 인민의 의향을 살핀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인민을 선동하여 일본의 제안에 반항을 시도하려는 생각이 아니십니까?”라고 몰아붙였다. 그는 황제와의 대담에 진전이 없자, 황제와 정부가 서로 책임을 돌리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귀국을 위해서 손해는 되어도 이로운 바는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오.”라고 협박하였다. 그리고 끝으로 “일이 늦어지는 것은 사정이 허락하지 않는 바이니 오늘밤 바로 외부대신을 부르셔서 하야시 공사의 제안을 근거해서 협의를 시작하여 조인이 되도록 일을 추진해야 한다는 요지의 칙령(勅令)을 내리십시오.”라고 강요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외부대신에게는 교섭 타협의 길로 힘써야 한다는 전지(傳旨)가 갈 것이오.”라고 하면서 칙령을 보장하는 발언은 끝내 하지 않았다. 요컨대 황제 고종은 대한제국의 의정부관제(議政府官制)와 중추원관제(中樞院官制)에 따라 처리될 것이란 점을 시종 일관되게 이토 특사에게 알렸던 것이며, 이토 특사는 이 제도적 규정을 무시하고 황제가 직접 외부대신에게 지시해 처리하도록 할 것을 강요했던 것이다.
(2) 정부 대신들에 대한 강박과 위협
이튿날 11월 16일부터는 정부 대신들에 대한 강박과 위협이 시작되었다. 이토 특사는 16일 하야시 특명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로 하여금 한국 정부에 정식으로 협약안을 제출하여 외무 당국자와 협상을 개시하게 하는 한편, 자신은 다른 의정대신(議政大臣)들을 숙소로 불러 협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 대신들은 한결같이 찬성할 수 없다는 뜻을 표했다. 대신들은 같은 날 황제가 부른 자리에서도 내일 일본 공사관에 가서도 오늘의 답으로 일관할 것을 다짐하였다.{23}
{22}▶註;『고종황제실록(高宗皇帝實錄)』권 46. 광무(光武) 9년 12월 16일자 의정대신 임신서리 학부대신 이완용 등 5인 상소문 참조.
17일 정오 한국 대신들은 하야시 일본 공사의 요청으로 일본 공사관에 모였다. 여기서 하야시 공사가 대신들에게 결정을 내려줄 것을 요구하자, 대신들은 절차상 아직 외부(外部)로부터 제의를 받지 못했으므로 지금 의결할 수 없으며, 또 중추원(中樞院)의 신규(新規)에 따라 의견을 널리 모아야 한다고 부정적으로 응대하였다. 대신들도 전날 황제가 한 것과 마찬가지로 외국과의 중요 조약에 대한 의정부관제(議政府官制)나 중추원관제(中樞院官制)의 규정에 따른 절차를 분명하게 밝힌 것이다. 그러나 하야시 공사는 한국이 군주 전제 정치의 나라인데 대중 합의가 무슨 말이냐고 소리질렀다. 15일에 이토 특사가 황제에게 한 것과 똑같은 언사였다. 하야시 공사는 이어 궁내대신(宮內大臣)에게 전화로 황제 알현을 직접 청했으니 대신들도 함께 궁중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몰아붙였다. 대신들은 이를 거부했으나 듣지 않아 부득이 황궁 안 정부내직소(政府內直所)에 와서 기다렸다. 일본 공사가 공사관원들을 거느리고 뒤따라와 휴게소에서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대신들은 수옥헌(漱玉軒)에 가서 황제에게 각기의 의견을 진술하는 기회를 가졌다.
이때 궁궐 안팎에 하세가와 대장이 거느리는 완전무장 차림의 일본 군사들이 몇 겹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이토 특사가 입궐하였을때, 하세가와 사령관은 선발된 헌병 50명을 대동하였다. 군신(君臣) 간의 의견교환에서 누구 하나 조약의 체결에 찬성하는 자가 없어 일본 측의 요구를 거절하기로 합의까지 되었다. 오후 8시가 되어 각 대신들이 돌아가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자, 이토 특사는 대신들을 강제로 모이게 하여 회의를 열고 황제에게 알현을 다시 요구하였다. 황제가 몸이 불편한 것을 이유로 들어주지 않자, 50여명의 헌병들이 둘러싼 가운데 대신들의 개별 의견을 신문조(訊問條)로 물었다.
수석대신인 참정대신(參政大臣) 한규설(韓圭卨)과 법부대신(法部大臣) 이하영(李夏榮),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 민영기(閔泳綺) 등이 반대하였다. 이때 이 자리에 동석한 하세가와 사령관은 참정대신과 외부대신을 가리키면서 헌병대장에게 뭔가 명령하자 일본어를 이해하는 대신들은 그 말을 듣고 전율하였다.{23} 다음 차례에서 외부대신(外部大臣) 박제순(朴齊純)이 반대의견 아래 조약문을 다시 작성하여 자구를 조금 바꾸면 인준한다고 각주로 덧붙였다. 하세가와 사령관의 위협 발언 직후에 차례가 된 주무대신인 박제순이 이렇게 조건부 찬성 의견을 표했다는 것은 그 발언이 얼마나 위협적이었던가를 짐작케 한다. 그의 조건부 의견이 나오자 이토 특사는 “한국이 부강(富强)할 때까지”란 단서를 전문(前文)에 넣고 제5조를 신설하여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의 유지를 보장한다.”는 문구를 손수 썼다. 그런 다음에 즉시 다시 의논을 계속하게 하여 나머지 세 대신도 찬성의사를 표시했다. 대신들에 대한 위협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23}▶註; 임권조(林權助) 회고록『나의 칠십평생(七十平生)을 말한다.』참조.
일본 측의 위협 속에 사세가 부당하게 돌아가는 것을 보고 한규설은 몸을 일으켜 황제를 직접 알현코자 내전(內殿)으로 뒤어들었다. 그러나 내전의 문이 닫혀 들어가지 못하고 협실에 들어가 있는데, 통감부 서기와 헌병, 순사 등이 와서 그를 끌어내 수옥헌 앞 건물의 좁은 방에 집어넣고 일본군 병사들과 조장(組將), 사관(士官) 등이 좌우에서 붙들고 지켰다. 이런 가운데 이토 특사가 들어와 여러 수단으로 간청, 위협, 공갈, 감언, 유혹 등을 펼쳤다. 이때 이토 특사가 옆 사람들을 보고 “너무 어리광을 부리면 죽여 버리라”는 말까지 하였다.{24} 이런 가운데도 한규설은 순국할 각오가 되어 있다고 항변하였다. 이에 이토 특사는 그의 동의(同意) 날인을 받는 것을 포기하고, 외부로 가서 외부대신 직인을 가져오게 하여 이 직인 날인만으로 가결된 것으로 전격 처리하였다.
{23}▶註; 西四什公堯 大佐『韓末外交秘話』참조.
제2차 일한협약문은 실제로 한국 측의 의사표시는 외부대신 박제순의 기명 날인뿐이다. 일본 측의 강압대로 이 자리가 정부대신회의의 형식을 취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문서에는 의정대신의 기명 날인이 함께 있어야 황제에게 품신될 수 있는 조건을 비로소 갖추게 된다. 이렇게 소정의 절차도 밟지 않은 문서에 일본 측 대표로 하야시 공사가 기명 날인에 합의된 조약문으로 간주하여 조약의 성립을 일방적으로 선언하였던 것이다. 양측의 서명 날인이 끝났을 때는 11월 18일 새벽 2시경이었다. 헌병대는 대신들의 신변보호를 명분으로 조약 강제 후 이토 특사나 하세가와 사령관이 퇴거한 후에도 계속 잔류하고 있었고, 이에 대해 고종이 너무 분기하여 몇 번 퇴거명령을 내렸으나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고 한다.{24}
{24}▶註; “이등공래한(伊藤公來韓)에 부쳐”. 제6회 보고.『주한일본공사관(駐韓日本公使館) 기록』25. 378면 참조.
결론적으로 제2차 일한협약은 황제와 의결권을 갖고 있는 대신들에 대한 위협과 강박 속에 진행되었던 것이다. 일본군 헌병대가 궁중이나 회의장가지 침입하여 대신들이 생명의 위기를 느낄 정도로 노골적인 위협행위를 가했던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주무대신인 박제순의 조건부 승낙이 하세가와 사령관의 위협 발언에 직접 영향받아 나오게 된 것을 증명해 주는 나카이 기타로[中井喜太郞]의 증언은 아주 중요하다. 그런데 이런 위협행위는 국제법상 금지되어 있는 것이란 점만으로도 중대시할 만한 것이지만, 대한제국 국법상 중요 조약에 대한 의결권을 가진 의정대신들과 승인권을 가진 황제에게 모두 위협이 가해졌다는 사실은 더 크게 부각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위협행위가 중요 조약에 대한 국내법이 정하는 절차를 무시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도 무효 내지 불성립 사유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의정부관제의 조약체결 절차에 관한 규정에 의하면, 이 협약은 일본 공사가 한국 외부대신에게 새로운 조약체결을 제안하는 첫 단계밖에 진행된 것이 없는 상태에서, 의정대신들에 대한 개별 의견진술이 무력(武力) 위협 아래 강요되었던 것이다. 이 점은 황제 고종이 1906년 6월 22일자로 9개 수교국 원수에게 보낸 친서에서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지적되기도 하였다.
”첫째, 우리 정부대신(政府大臣)이 조인(調印)하였다고 운운하는 것은 진실로 정당한 것이 아니며 위협을 받아 강제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둘째, 짐은 정부에 조인을 허가한 적이 없습니다. 셋째, 정부회의(政府會議) 운운하나 국법(國法)에 의거하지 않고 회의를 한 것이며, 일본인들이 대신들 강제로 가둔 채 회의한 것입니다. 상황이 그런즉 이른바 조약이 성립되었다고 일컫는 것은 (만국)공법(公法)을 위반한 것이므로 의당 무효입니다.”
출처; 서울대학교 출판부 編 “한국 병합의 불법성 연구” (2003년)
해설; 이태진(李泰鎭) 서울대학교 인문학부 교수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