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 사이트에 의하면, 중국 역사서에 등장하는 최초의 왜인(수승등 )은, 제4대 이토쿠 천황
http://www.geocities.jp/mb1527/N3-17suishou.htm
제17절 야마토 국왕수승등
제1항 야마토 국왕수승등은 이토쿠 천황
야마토 조정이 지방에 전한 기술이라는 것은 어떻게 해 손에 넣은 것일까, 최초는 중앙인 기나이의 기술을 지방에 전하면 좋지만, 그러던 중 새로운 기술이 다해 버린다.중국에서 신기술을 손에 넣지 않으면 안 되게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후한서 동부지역 무사전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안제의 영 첫원년(107년), 야마토 국왕수승등은 이쿠치160명을 바쳐 황제의 배알을 신청했다.」
이 야마토 국왕수승등이란, 도대체 누군가라고 하는 곳(중)으로부터 생각해 보고 싶다.107년은, 야마토 조정이 성립해30년 정도 경과했을 무렵으로,160명의 사람들을 중국까지 옮기는 것은, 이만 저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구니로 할 수 리가 없다.또, 부장품으로부터 판단하고, 이 시기는 지방에 강력한 권력자가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다.게다가 야마토 국왕이라고 하는 이상, 적어도 야마토국을 대표하는 세력의 왕일 것으로, 지방의 오구니왕과는 생각할 수 없다.따라서, 이 야마토 국왕은, 천황 이외에는 생각할 수 없게 된다.「수승」만으로는 일본인다운 이름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 다음의 「등 」도 인명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시시트」있다 있어는, 「스시트」라고 읽을 수 있다.이것에 가까운 읽기를 하는 초기 천황은 두 명 있다.그것은, 제4대 이토쿠 천황(대일본언초우명·스키트모)과 제6대효 야스 천황(대일본족언국압인명·오시히트)이다.전에 말했던 대로, 이토쿠 천황의 추정 재위는107~110년경, 고 야스 천황의 추정 재위는144~170년경이며, 확실히 이토쿠 천황의 추정 재위년으로 일치한다.「수승등」이 된 것은, 원전에 「수승등 어머니」라고이기도 했는데, 저자가 「등 」을 표 의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어머니」가 결핍 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제2항 기술자 파견
이토쿠 천황은, 「고대 일본 마사시」에 의하면, 진무 덴노의 5남에 해당해, 제3대 안네이 천황의 남동생이다.전에 말했던 대로 수정·안녕·의덕의 3 천황은, 진무 덴노의 생전 즉위 하고 있다.그 재위 연수도 짧았던 것 같다.야마토 조정 초기는, 통일 국가의 기초 다지기로서 진무 덴노에게 있어서 해야 하는 것이 많아, 아이에게 양위 하고, 천황으로서의 통상 업무를 행하게 해 자신은 자유의 몸으로서 여러가지 활약한 것이라고 생각한다.이토쿠 천황은107년 당시 , 아직15세경으로 추정되어 후한에 조공 할 정도의 역량이 있었다고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아마,진무 덴노의 발안으로, 이토쿠 천황의 이름의 바탕으로, 조공이 행해졌다것은 아닐까.거기서, 이쿠치의 의미이지만, 이것을 기술자로 파악하고 싶다.대일본의 조정정은160명의 기술자를 중국에 파견하고 기술을 배우게 해 돌아온 기술자를 지방에 파견하고, 그 기술을 전한것이라고 생각한다.
조정 탄생전의 야마토국의 성공과 히노모트의 퇴조는 외국과의 교류의 차이에 있어, 조정에 있어서 외국으로부터의 신기술의 도입은 국내의 안정을 위해서 무슨 일이 있어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최우선 사항이었을 것이다.일본에서 첫 통일 국가 야마토 조정이 탄생했지만, 통일 국가의 운영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던 당시의 조정 사람들은, 통일 국가가 생겨서 안정했을 무렵, 당시의 선진국인 중국에, 국가 운영의 노하우를 배우러 가는 것을 계획했다.정치 체계·농업기술·치수 기술등 배워야 할 것은 많다.
제3항 농업 치수 기술의 혁신
이 시대의 다이와의 중심 유적은, 카라코·열쇠 유적이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초기 천황의 궁적은 이 지역에 존재하지 않는다.중심 유적으로부터 멀어진 곳에 존재하는 것이다.왜, 그런 곳에 궁을 만든 것일까.제4대 이토쿠 천황의 일본에서 부르는 이름이 「초우」, 제5대 타카아키 천황의 일본에서 부르는 이름이 「향식도」라고, 모두 벼농사에 관련한 이름이다.그리고, 타카아키 천황능은 나라현의 대표적인 농경 유적(카모도파 유적)의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고대의 왕묘는 마지막에 생활하고 있던 장소의 근처에 만들어지는 것이 많아, 이것은, 이러한 천황이, 농업기술의 진흥에 힘을 쏟은 증거라고 취할 수 있다.또, 오카야마현의 햐껜가와 유적에서, 2세기의 것이라고 볼 수 있는 모심기의 자취가 발견되고 있으므로, 요즘, 모심기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향식도」는 모심기를 의미한 이름같다.이 시기, 전국적으로 농업·치수 기술이 급속히 진보하고 있어, 이것들 천황이, 솔선하고, 넓힌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해퇴기에 해당하는 요즘은, 호수였다고 생각할 수 있는 다이와 분지의 물이 끌어들이어서 가 그 후의 비옥한 토지에 논을 개발하며 간 것은 아닐까.
제4항 초기 천황의 궁이동의 수수께끼
이 당시의 다이와의 중심 유적은, 카라코·열쇠 유적이다.카라코·열쇠 유적은 동지의 날에 미와산 산정으로부터 오르는 태양을 볼 수 있어 그 제례장으로서 번창했다고 생각된다.그런데 , 초기 천황의 궁적은 이 카라코·열쇠의 주변에 존재하지 않고, 멀게 떨어진 것에 존재하고 있다.이것은 어떻게 한 것일까.
일반적으로는, 고대는 전 천황의 궁적을 기피해 새로운 땅에 궁을 만들었기 때문에라고 해석되고 있지만, 외국에는 이와 같이 궁적이 전전한 예가 없고, 또, 국내에서도 지방의 호족에게 궁적이 전전하는 예를 볼 수 없다.이것은, 궁적이 이동한다고 하는 풍습이 외국에서 온 것도 아니고, 일반적으로 믿을 수 있고 있었다고 하는 것도 아닌 것을 의미하고 있다.아마 전 천황의 궁적을 기피한 것은 불교가 들어 오고 나서로, 그 이전은 다른 이유에 의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초기 야마토 조정에 있어서 기술 혁신은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논개발이나 치수 사업을 천황 자신이 솔선해 실시하기 위해서, 초기 천황의 궁이, 카라코·열쇠 유적으로부터 멀어진 것에 존재하고 있는이라고 생각한다.야마토 조정이 뇨속일존의 신아래에서 종교 통일되어 초기 천황은, 그 제사자였기 때문에, 뇨속일존의 신의 의지를 계승해, 궁을 논개발지의 근처에 만들어, 스스로 농사일에 종사한 것은 아닐까.현재에도, 신사의 제례나, 황실 행사에는, 농업과 관련한 것이 많지만, 이것이 기원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일이 생기는 것도, 야마토 조정이 종교 통일되고 있기 때문으로, 천황이 권력 위에 군림하고 있다면, 중심 유적의 한가운데에 궁적이 존재할 것이다.
시대는 흐르지만 다음과 같은 일례가 있다.
카와치 호수는 죠몽 시대는 오사카 만과 일대가 된 바다만에서 만났지만, 점차 사주가 발달해 막을 수 있어 고분 시대가 되고 나서 담수의 호수가 되어 있었다.그 때문에, 그 주변이 자주 홍수에 휩쓸리고 있었다.일본 서기에 의하면 닌토쿠 천황11년에 사주를 열어 「나니와의 호리에」를 쌓아 올렸다고 있다.이 공사는 난공사이며, 생각나자마자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상당 장기간의 준비가 필요하고, 그것을 위한 신기술도 외국으로부터 도입해야 한다.닌토쿠 천황의 궁적은 이 공사 현장의 곧 근처에 있어, 인덕제는 이 공사를 위해서 이 땅에 도를 옮긴 것은 아닐까.
이것을 봐도, 기술개발을 위해서 궁을 이동시키고 있는 것이 안다.초기 천황은 농지 개발을 위해서 궁을 움직이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以下サイトによると、中国歴史書に登場する最初の倭人(帥升等)は、第四代懿徳天皇
http://www.geocities.jp/mb1527/N3-17suishou.htm
第17節 倭国王帥升等
第一項 倭国王帥升等は懿徳天皇
大和朝廷が地方へ伝えた技術というものはどのようにして手に入れたのであろうか,最初の方は中央である畿内の技術を地方へ伝えればよいが,そのうちに新しい技術が尽きてしまう。中国から新技術を手に入れなければならなくなると考えられる。後漢書東夷伝に次のような記事がある。
「安帝の永初元年(107年),倭国王帥升等は生口160人を献じ,皇帝の拝謁を申し出た。」
この倭国王帥升等とは,いったい誰かというところから考えてみたいと思う。107年は,大和朝廷が成立して30年ほどたった頃で,160人もの人々を中国まで運ぶのは,並大抵のことでできるものではなく,小国にできるはずがない。また,副葬品から判断して,この時期は地方に強力な権力者がいなかったものと考えられている。さらに,倭国王という以上,少なくとも倭国を代表する勢力の王のはずで,地方の小国王とは考えられない。よって,この倭国王は,天皇以外には考えられないことになる。「帥升」だけでは日本人らしい名前にならないので,その次の「等」も人名の一部と考えると「シシト」あるいは,「スシト」と読める。これに近い読みをする初期天皇は二人いる。それは,第四代懿徳天皇(大日本彦鍬友命・スキトモ)と第六代孝安天皇(大日本足彦国押人命・オシヒト)である。前に述べたとおり、懿徳天皇の推定在位は107~110年頃、考安天皇の推定在位は144~170年頃であり、まさに懿徳天皇の推定在位年と一致する。「帥升等」となったのは,原典に「帥升等母」とでもあったところ,著者が「等」を表意的に解釈したため,「母」が欠落したとも考えられる。
第二項 技術者派遣
懿徳天皇は,「古代日本正史」によると,神武天皇の五男にあたり,第三代安寧天皇の弟である。前に述べたとおり綏靖・安寧・懿徳の三天皇は,神武天皇の在世中即位している。その在位年数も短かったようである。大和朝廷初期は,統一国家の基礎固めとして,神武天皇にとって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が多く,子に譲位して,天皇としての通常業務をおこなわせ,自分は自由の身として,いろいろと活躍したものと考える。懿徳天皇は107年当時,まだ15歳頃と推定され,後漢に朝貢するほどの力量があったとも考えられないので,おそらく,神武天皇の発案で,懿徳天皇の名の元に,朝貢がおこなわれたのではないだろうか。そこで,生口の意味であるが,これを技術者ととらえたい。大和朝廷は160人もの技術者を中国に派遣して技術を学ばせ,戻ってきた技術者を地方に派遣して,その技術を伝えたものと考える。
朝廷誕生前の倭国の成功とヒノモトの退潮は外国との交流の差にあり、朝廷にとって外国からの新技術の導入は国内の安定のために何がなんでもやらなければならない最優先事項であったはずである。日本で初めての統一国家大和朝廷が誕生したが,統一国家の運営について,何も分かっていなかった当時の朝廷人たちは,統一国家ができて落ちついた頃,当時の先進国である中国に,国家運営のノウハウを学びに行くことを計画した。政治体系・農業技術・治水技術など学ぶべきものは多い。
第三項 農業治水技術の革新
この時代の大和の中心遺跡は,唐古・鍵遺跡であると考えられるが,初期天皇の宮跡はこの地域に存在しない。中心遺跡から離れた所に存在するのである。なぜ,そんな所に宮を造ったのだろうか。第四代懿徳天皇の和名が「鍬友」,第五代孝昭天皇の和名が「香殖稲」と,いずれも稲作に関連した名である。そして,孝昭天皇陵は奈良県の代表的な農耕遺跡(鴨都波遺跡)の隣に位置している。古代の王墓は最後に生活していた場所の近くに造られることが多く,これは,これらの天皇が,農業技術の振興に力を注いだ証ととれる。また,岡山県の百間川遺跡で,二世紀のものと見られる田植えの跡が発見されているので,この頃,田植えが始まったと考えられる。「香殖稲」は田植えを意味した名のようである。この時期,全国的に農業・治水技術が急速に進歩しており,これら天皇が,率先して,広めたものと考えられる。海退期にあたるこの頃は,湖だったと考えられる大和盆地の水が引いていき,その後の肥沃な土地に水田を開発していったのではあるまいか。
第四項 初期天皇の宮移動の謎
この当時の大和の中心遺跡は,唐古・鍵遺跡である。唐古・鍵遺跡は冬至の日に三輪山山頂からのぼる太陽を見ることができ,その祭礼場として栄えたと思われる。ところが,初期天皇の宮跡はこの唐古・鍵の周辺に存在せず,遠く離れたところに存在している。これはどうしたことであろうか。
一般には,古代は前天皇の宮跡を忌み嫌い新しい地に宮を作ったためと解釈されているが,外国にはこのように宮跡が転々とした例がなく,また,国内でも地方の豪族に宮跡が転々とする例が見られない。これは,宮跡が移動するといった風習が外国から来たものでもなく,一般に信じられていたというわけでもないことを意味している。おそらく前天皇の宮跡を忌み嫌ったのは仏教が入ってきてからのことで,それ以前は別の理由によるものと考えられる。
初期大和朝廷にとって技術革新は最も重要なことであった。水田開発や治水事業を天皇自身が率先して行うために,初期天皇の宮が,唐古・鍵遺跡から離れたところに存在していると考える。大和朝廷が饒速日尊の神の下で宗教統一され,初期天皇は,その祭祀者であったため,饒速日尊の神の意志を受け継ぎ,宮を水田開発地の近くに造り,自ら農作業に従事したのではあるまいか。現在でも,神社の祭礼や,皇室行事には,農業と関連したものが多いが,これが起源と考える。
このようなことができるのも,大和朝廷が宗教統一されているからで,天皇が権力の上に君臨しているのなら,中心遺跡のど真ん中に宮跡が存在するはずである。
時代は下がるが次のような一例がある。
河内湖は縄文時代は大阪湾と一帯となった海湾であったが,次第に砂州が発達してせき止められ,古墳時代になってから淡水の湖になっていた。そのため,その周辺がしばしば洪水に見舞われていた。日本書紀によると仁徳天皇11年に砂州を切り開いて「難波の堀江」を築いたとある。この工事は難工事であり,思い立ってすぐにできるものではなく,相当長期間の準備が必要で,そのための新技術も外国から導入しなければならない。仁徳天皇の宮跡はこの工事現場のすぐ近くにあり,仁徳帝はこの工事のためにこの地に都を移したのではあるまいか。
これを見ても、技術開発のために宮を移動させている事がわかる。初期天皇は農地開発のために宮を動かしていたと考えられ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