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日韓併合時代の真実 日本が朝鮮を近代国家にした

日本が、破産状態にあった朝鮮を建て直し、救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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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韓併合前、李朝末期の朝鮮の人々は、極貧の中にあ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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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年代併合前のソウル中心街南大門通り


Seoul中心街 通りに面した藁葺きの建物は商店10.jpg

併合前の朝鮮ソウル中心街の商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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併合前の朝鮮の住居と人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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併合前のソウルの朝鮮・韓国人の風景



併合前の韓国・朝鮮人の風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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併合前の韓国・朝鮮人の風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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併合前の韓国・朝鮮人の風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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併合前の韓国・朝鮮人の風景


併合前の朝鮮住居(藁葺土人の家)05.jpg

併合前の韓国・朝鮮人の住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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併合前の韓国・朝鮮人の風景 奥に見えるのは独立門

*1896年11月21日定礎、1897年11月20日完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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併合前の朝鮮・韓国の風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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併合前の韓国・朝鮮の風景 ソウル東大門通り














 かつて「日本は朝鮮の人々に対して、とてつもなく悪いことを繰り返してきた」ということが、よく言われてきました。
 これはもともと韓国の人々が叫んだものです。いわゆる「韓流歴史観」です。それに同調した日本国内のいわゆる「反日的日本人」もそう叫んできました。
 しかし、朝鮮半島の日本統治時代は、彼らが言っているほど悪いものだったのでしょうか。いいえ、もしあの日本統治の三六年間がなかったならば、今日の朝鮮半島、とりわけ韓国の繁栄は決してなかったでしょう。


破産状態にあった朝鮮
 一九世紀から二〇世紀前半にかけての世界は、弱肉強食の植民地化の時代でした。西欧の列強諸国はアジア各国を次々に植民地化し、アジアの国々から搾取して、自国を富むものとしていました。
 大東亜戦争(太平洋戦争)前には、アジアのほとんどの国は、西欧諸国の植民地となっていたほどです。そうした中、ただひとり、西欧諸国の植民地とはならずに、アジアで自主独立を保ち、近代的な国家を築き上げた国がありました。
 日本です。日本は必死な思いで明治維新を成し遂げ、西欧諸国と同じような力をつけようと努力し、それに成功していました。これによって日本は西欧の支配をまぬがれ、対等の立場で生き抜こうとしていたのです。
 そうした中、お隣の朝鮮は、国造りの面で非常にたち遅れていました。当時の朝鮮は、いわゆる李朝(りちょう)末期の時代で、混乱し、国としての体さえなしていない状態であり、崩壊寸前でした。防衛力もなく、財政は破綻し、国家的破産状態にあったのです。
 朝鮮の民衆はつねに、飢餓と、疫病と、重い税金にあえぎ、極貧の中を細々と命をつないでいました。支配者層は支配者層で、その貧しい民衆から搾り取ることしか考えてない独善的な人々でした。
 彼ら王族と「両班」(ヤンバン・官吏貴族)は、労働を蔑視する人々で、みずからは決して労働をしませんでした。そして、人口のほとんどを占める一般民衆を、生かさず殺さずの状態におき、そこから搾取していました。
 当時朝鮮にいたイギリス人旅行家、イザベラ・バードは書いています。
朝鮮には二つの階級しか存在しない。盗む側(王族・両班)と、盗まれる側(平民・奴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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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には二つの階級しか存在しない。盗む側(王族・両班)

と、盗まれる側(平民・奴隷)だ」(イザベラ・バード)



 また朝鮮では、学問は排他的な朱子学があるだけで、科学も、医学もありませんでした。学校も病院も治水施設等もほとんどなく、中国の文豪・魯迅からは「世界一貧しい国」とまで呼ばれた国が朝鮮でした。
 外国人は、ソウルを「世界有数の不潔な街」と評し、道で糞尿を踏まずに歩くのは不可能だったと述べています。街には鼻をつく悪臭が満ちていました。また当時の朝鮮にいた宣教師は、あまりに水がきたないので、風呂に入れば、入る前よりも汚れてしまうほどだったといいます。
 商売はいまだに物物交換が主流で、ろくな産業も道路もありませんでした。また人々は、冬の寒さをしのぐ薪とするために山の木をみな切ってしまうので、山がいたるところハゲ山と化していました。そのために泥水が流れだし、農業も壊滅状態にありました。
 しかし一番の問題は、そんな極貧の状態で、内乱が頻発していることでした。政治は混乱し、いまや李朝末期の朝鮮は崩壊寸前だったのです。国際連盟の事務局次長であった新渡戸稲造は、「枯死国朝鮮」と呼び、国家的な死に瀕したのが朝鮮だと述べました。
 また当時、朝鮮人の玄永燮は、
 「日韓併合前の朝鮮は地獄であったといってもよい」
 と述べています。


助け舟を出した日本

 そんな状態でしたから、朝鮮が西欧の植民地となるのは、もはや時間の問題だったのです。あるいは中国(清)の一部となるか、ロシアの一部となるか、といった状態でした。こうした朝鮮の実情を、「他国のこと」として放置しておくことは簡単なことだったでしょう。
 しかし日本には、これを放置しておくことのできない事情がありました。地図をみればわかりますが、ユーラシア大陸から日本列島に向かって、グィと突き出た形になっているのが、朝鮮半島です。
 この朝鮮半島に、もしロシア、中国(清)、または西欧の勢力がいすわってしまえば、日本はその侵略から自国を守る方法がなくなってしまいます。そうなれば、朝鮮は、いわば日本の喉元(のどもと)に突き出されたナイフのような役目を果たしてしまうでしょう。
 ですから日本にとっても、朝鮮半島の実情は決して無視できないものだったのです。朝鮮が自立的な独立国家として力をつけてくれない限り日本も危うい状態が続くでしょう。
 また朝鮮は、かつて古代の日本に、大陸の先進文明を伝えてくれた国です。いわばお世話になった国です。その国がいまや崩壊しようとしており、外国の餌食になっていく姿を、日本がじっと見ているわけにはいきません。
 これは、たとえば長屋に住んでいる人の場合にも似ています。お隣でボヤがあったり、ドロボウが入り込めば、決して無関心ではいられないでしょう。また、お隣の家族が病気であったり、極貧の状態におかれていれば、やはり何かしらしてあげようと思うのが人情というものです。
 それで明治の日本が願ったことは、朝鮮半島に、外国に侵されることのない、日本と同じ独立の気概と力を持った近代的国家が誕生することでした。そのために日本は、官民をあげて朝鮮の近代化運動を支援していきました。
 日本は、朝鮮に助け舟を出した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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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朝末期のソウル南大門


 それにはまず国交がなければなりません。日本は、朝鮮との間に対等な国交を求めました。友情を持っておつき合い出来れば、朝鮮の近代化を支援していくことも可能になるでしょう。それで日本は、外交官を朝鮮に派遣しました。
 ところが当時の李王朝(李氏朝鮮)の政府は、この申し出を冷たくあしらったのです。というのは、中国の属国であった朝鮮には、旧態依然とした唯我独尊的な思想が幅をきかせていたからです。
 朝鮮には「中華思想」というものが強く支配していました。これは、中国は世界文明の中心であり、そこから遠ざかる国ほど「野蛮で」「劣った国」であるという思想です。
 この思想を持った朝鮮からみると、中国から遠い日本は「野蛮な国」であり、「劣った国」です。彼らは、日本が西欧列強の支配から独立を守るために明治維新を成し遂げた意味がわかりません。
 朝鮮の人々は、洋服を着て西洋のマネをし始めた日本人を、「禽獣」にも等しい者とみなし、軽蔑して、日本の使節を追い返すことまでしました。


東亜のトラブルメーカーだった朝鮮
 日本と朝鮮の関係について書いたある中学生用の歴史教科書には、
「日本人の心の中には、朝鮮人を差別する間違った意識がありました」
 と書かれています。しかし、これは歴史の事実の半分しか述べていません。実際は、このように朝鮮人が、先に日本人を蔑視したのです。

  とはいえ、朝鮮人による日本人への蔑視は、日本人にとって大きなこと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それは朝鮮人の自由として、ほっておくとしても、朝鮮がこのよ うな旧態依然とした体制でいる限り、いずれ朝鮮が崩壊し、そこに列強の勢力がいすわってしまうことは目に見えています。
 そこで、日本は朝鮮を、 強引なかたちでですが開国させます。それまで朝鮮は、かたくなに鎖国政策を続け、自分の中にこもっていたのですが、通商を始めさせ、外国に対して門戸を開 かせたのです。日本もかつて黒船のペリー提督によって無理矢理、開国させられました。しかしそれが結局は良かったということを、日本人は知っていたので す。
 朝鮮は、日本に対して開国すると、続けて西欧諸国に対しても開国しました。しかし、朝鮮の内部では、近代化を推し進めようとする人々と、それまでの旧態依然とした伝統にこもろうとする人々が対立し、内乱やクーデターが起きていました。
 こうした不安定な中、王族は「勢道(せいどう)政治」――すなわち王の一族が国を私物化し国政を欲しいままにする政治を続けていました。
 日本の大使館も二度襲われ、多くの日本人が虐殺される事件も起きました。しかし大使館を襲うことが、国際社会の中でどんな意味を持つかということも、朝鮮の支配者にはわかりません。
 また朝鮮の支配者は、あるときは近代化のために日本と手を組んだかと思うと、今度は自らの保身のために清国(中国)に媚びを売り、次にはロシアに媚びを売るというように、一貫性のない、行き当たりばったりの政治を行ないました。
 その無節操な行動に、日本だけでなく周辺の国々も振り回されていきます。当時の朝鮮は、世界から「東亜(東アジア)のトラブルメーカー」と思われていました。そして日本は、この朝鮮のために、日清・日露の二つの戦争を戦わざるを得なくなったのです。

久保有政



ソウルの路面電車、漢城電気株式会社


高宗は清涼里(現在のソウル特別市北部の地域)の洪陵に閔妃の墓所を築造し、よく礼拝に赴いていたが、従者を多く連れる行列での参拝は多額の費用を要していた。そのためアメリカの技術者が、墓所まで路面電車を敷設し、普段は民の移動手段とすることで、経費の削減と増収の一石二鳥を図れるとして、電車敷設を促した。それが受け入れられたため、王室とアメリカの技術者の共同出資で漢城電気(資本金150万円 ヘンリー・コールブラン(Henry Collbran)とハリー・ライス・ボストウィック(Harry Rice Bostwick)が75万円、王室が75万円、うち王室は15万円のみ払込)が1898年に設立され、電車の敷設を行う事にした。この時、一足早く電車の導入を開始していた日本京都電気鉄道1895年開業)に設計と工事を依頼している。

運行開始と路線の拡大

東大門の横に発電所が併設され、1899年4月8日に西大門-清涼里間に開業式を催し、単線未舗装ながらも電車の運行は始められた。途中、鍾路を 東西に貫くルートであった。この時の車両は当時のアメリカの路面電車に見られたオープン型のスタイルで、乗降用扉がなく、車体側面に設けられたステップか ら直接車内へ出入りするものであった。建設時の経緯から、一般車8両とともに当初より貴賓車1両が製造された。運転は京都電鉄から出向した日本人が担ったと言う。電圧は直流600V、軌間は1067mmであった。


当初は電車に対する物珍しさから乗客が殺到したが、後に子供を轢死させる事故が起こると暴動が発生し、電車が焼失する事態まで招いた。これに伴い日本人の運転士は身の危険を感じて全員が辞職し、代わってアメリカ人運転士が着任するまでの1週間、電車の運行は停止された。


光武4年5月18日午後9時頃、再度人身事故が起き、乗客は下車し、付近の群集が集まり、電車のガラス窓を破壊し、乗車券発売所の小屋も破壊された[2]この際、乗客の米国人が負傷を負ったため、多数の米国人が集まって、群集に向かって短銃を乱射した[2]その後、兵丁巡檢が派遣され、首謀者七名が護送された[2]


その後、路線の拡張を計画する。南大門、旧龍山方面への延伸がなされ、車両も増備した。また、電気事業も好調で電車事業とともに拡張工事が必要となり、それに必要な資金を調達するため、漢城電気は米国信託会社に会社を売却し、資金を調達。韓美電気(社長ヘンリー・コールブラン、本社アメリカ)が事業を引き継いだ。

しかし韓美電気は、日本渋沢栄一商社へ会社ごと1909年に売却したため[3]、路面電
車と電力ガス事業は日系の日韓瓦斯電気の管轄になった。なお、1910年には日韓併合がなされた。



이조 말기의 조선

한일합방 시대의 진실 일본이 조선을 근대국가로 한

일본이, 파산 상태에 있던 조선을 재건해, 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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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합방전, 이조 말기의 조선의 사람들은, 극빈안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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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대 병합전의 서울 중심가 남대문 거리


Seoul중심가 대로에 접한 고즙 나무의 건물은 상점10.jpg

병합전의 조선 서울 중심가의 상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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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합전의 조선의 주거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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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합전의 서울의 조선・한국인의 풍경



병합전의 한국・한국인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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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합전의 한국・한국인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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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합전의 한국・한국인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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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합전의 한국・한국인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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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합전의 한국・한국인의 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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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합전의 한국・한국인의 풍경안쪽으로 보이는 것은 독립문

*1896년 11월 21일 정초, 1897년 11월 20일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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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합전의 조선・한국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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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합전의 한국・조선의 풍경 서울 동대문 거리














 일찌기「일본은 조선의 사람들에 대해서, 터무니없고 나쁜 것을 반복해 온」라고 하는 것이, 잘 말해져 왔습니다.
 이것은 원래 한국의 사람들이 외친 것입니다.이른바 「한류역사관」입니다.거기에 동조한 일본내의 이른바 「반일적 일본인」도 그렇게 외쳐 왔습니다.
 그러나, 한반도의 일본 통치 시대는, 그들이 말할 만큼 나쁜 것이었을까.아니오,만약 그 일본 통치의 36년간이 없었으면, 오늘의 한반도, 특히 한국의 번영은 결코 없었다지요.


파산 상태에 있던 조선
 19 세기부터 2〇세기 전반에 걸친 세계는, 약육강식의 식민지화의 시대였습니다.서구의 열강 제국은 아시아 각국을 차례차례로 식민지화해, 아시아의 나라들로부터 착취하고, 자국을 풍부하는 것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 전에는, 아시아의 대부분의 나라는, 서구 제국의 식민지가 되고 있었을 정도입니다.그러한 가운데, 단 한명, 서구 제국의 식민지는 되지 않고 , 아시아에서 자주 독립을 유지해, 근대적인 국가를 구축한 나라가 있었습니다.
 일본입니다.일본은 필사적인 생각으로 메이지 유신을 완수하고 서구 제국과 같은 힘을 기르려고 노력해, 거기에 성공하고 있었습니다.이것에 의해서 일본은 서구의 지배를 면해 대등의 입장에서 살아 남으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근처의 조선은, 나라 만들기의 면에서 매우 끊어 늦었습니다.당시의 조선은, 이른바 이조(나비)말기의 시대로,혼란해, 나라로서의 몸마저 이루지 않은 상태이며, 붕괴 직전이었습니다.방위력도 없고, 재정은 파탄해, 국가적 파산 상태에 있었다것입니다.
 조선의 민중은 항상, 기아와 역병과 무거운 세금에 허덕여, 극빈안을 세들과 생명을 잇고 있었습니다.지배자층은 지배자층에서, 그 궁핍한 민중으로부터 짜 취할 수 밖에 생각하지 않은 독선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왕족과「양반」(얀 밴・관리 귀족)는, 노동을 멸시 하는 사람들로, 스스로는 결코 노동을 하지 않았습니다.그리고,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반 민중을, 살리지 않고 죽이지 않고 상태에 일어나 거기로부터 착취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에 있던 영국인 여행가, 이자베라・버드는 쓰고 있습니다.
조선에는 두 개의 계급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훔치는 측(왕족・양반)과 도둑맞는 측(평민・노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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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는 두 개의 계급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훔치는 측(왕족・양반)

과 도둑맞는 측(평민・노예)이다」(이자베라・버드)



 또 조선에서는, 학문은 배타적인 주자학이 있는 것만으로, 과학도, 의학도 없었습니다.학교나 병원도 치수 시설등도 거의 없고, 중국의 문호・노신에서는「세계 제일 궁핍한 나라」와까지 불린 나라가 조선이었습니다.
 외국인은, 서울을「세계 유수한 불결한 거리 」라고 평가해, 길에서 분뇨를 밟지 않고 걷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거리에는 코를 찌르는 악취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또 당시의 조선에 있던 선교사는, 너무나 물이 더럽기 때문에, 목욕하면, 들어가는 전보다도 더러워져 버릴 만큼이었다고 합니다.
 장사는 아직껏 물물교환이 주류로, 변변한 산업도 도로도 없었습니다.또 사람들은, 겨울의 추위를 견디는 신과 하기 위해서 산의 나무를 모두 잘라 버리므로, 산이 도처에 민둥산화하고 있었습니다.그 때문에(위해) 흙탕물이 흐름이고, 농업도 괴멸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일의 문제는, 그런 극빈 상태로, 내란이 빈발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정치는 혼란해, 지금 이조 말기의 조선은 붕괴 직전이었습니다.국제연맹의 사무국 차장인 니토베 이나조는, 「고사국 조선」라고 불러, 국가적인 죽어 직면했던 것이 조선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당시 , 한국인의 현영섭은,
 「한일합방전의 조선은 지옥에서 만났다고 해도 괜찮은 」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도움배를 낸 일본

 그런 상태였기 때문에, 조선이 서구의 식민지가 되는 것은, 이미 시간의 문제였습니다.혹은 중국(청)의 일부가 되는지, 러시아의 일부가 되는지, 라고 하는 상태였습니다.이러한 조선의 실정을, 「타국」로서 방치해 두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다지요.
 그러나 일본에는, 이것을 방치해 둘 수 없는 사정이 있었습니다.지도를 보면 압니다만, 유라시아 대륙에서 일본 열도로 향하고, 그와 뚫고 나온 형태가 되어 있는 것이, 한반도입니다.
 이 한반도에, 만약 러시아, 중국(청), 또는 서구의 세력이 눌러 앉아 버리면, 일본은 그 침략으로부터 자국을 지키는 방법이 없어져 버립니다.그렇게 되면, 조선은, 말하자면 일본의 목구멍 맨 안쪽(목도와)에 쑥 내밀어진 나이프와 같이 책임을 다해 버리겠지요.
 그러니까 일본에 있어서도, 한반도의 실정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조선이자립적인 독립국가로서 힘을 길러 주지 않는 한,일본도 위험한 상태가 계속 되겠지요.
 또 조선은, 일찌기 고대의 일본에, 대륙의 선진 문명을 전해 준 나라입니다.말하자면 신세를 진 나라입니다.그 나라가 지금 붕괴하려고 하고 있어 외국의 먹이가 되어 가는 모습을, 일본이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예를 들어 연립 주택에 살고 있는 사람의 경우에도 닮았습니다.근처에서 작은 불이 있거나 드로보우가 비집고 들어가면, 결코 무관심한 것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또, 근처의 가족이 병이거나 극빈 상태에 있어 있으면, 역시 무엇인가 해 주려고 하는 것이 인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메이지의 일본이 바란 것은, 한반도에, 외국에 침범될리가 없는, 일본과 같은 독립의 기개와 힘을 가진 근대적 국가가 탄생하는 것이었습니다.그 때문에(위해) 일본은, 관민을 주어 조선의 근대화 운동을 지원해 나갔습니다.
 일본은, 조선에 도움배를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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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말기의 서울 남대문


 거기에는 우선 국교가 없으면 안됩니다.일본은, 조선과의 사이에 대등한 국교를 요구했습니다.우정을 가져 수행원 맞아 할 수 있으면, 조선의 근대화를 지원해 나가는 것도 가능하게 되겠지요.그래서 일본은, 외교관을 조선에 파견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이 왕조(이씨 조선)의 정부는, 이 제의(신청)을 차갑게 다루었습니다.그렇다고 하는 것은, 중국의 속국인 조선에는, 구태 의연으로 한 유아독존적인 사상이 폭을 (듣)묻게 하고 있었기 때문에입니다.
 조선에는「중화사상 」라는 것이 강하게 지배하고 있었습니다.이것은, 중국은 세계 문명의 중심이며, 거기로부터 멀어지는 나라만큼「야만스럽고」「뒤떨어진 나라」이다고 하는 사상입니다.
 이 사상을 가진 조선에서 보면, 중국에서 먼 일본은「야만스러운 나라」여, 「뒤떨어진 나라」입니다.그들은, 일본이 서구 열강의 지배로부터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 메이지 유신을 완수한 의미를 모릅니다.
 조선의 사람들은, 양복을 입어 서양의 흉내를 하기 시작한 일본인을, 「금수」에도 동일한 사람으로 간주해, 경멸하고, 일본의 사절을 되돌려 보내는 것까지 했습니다.


동아의 트러블 메이커였던 조선
 일본과 조선의 관계에 대해 쓴 어느 중학생용의 역사 교과서에는,
「일본인의 마음 속에는, 한국인을 차별하는 잘못된 의식이 있었던 」
 (이)라고 쓰여져 있습니다.그러나, 이것은 역사의 사실의 반 밖에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실제는, 이와 같이한국인이, 먼저 일본인을 멸시 했다것입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한국인에 의한 일본인에게의 멸시는, 일본인에 있어서 큰 일이 아니었습니다.그것은 한국인의 자유로서, 는 둔다고 해도, 조선이 이 인 구태 의연으로 한 체제로 있는 한, 머지않아 조선이 붕괴해, 거기에 열강의 세력이 눌러 앉아 버리는 것은 눈에 보이고 있습니다.
 거기서, 일본은 조선을, 무리한 모습으로입니다만 개국시킵니다.그것까지 조선은, 완고하게 쇄국 정책을 계속해 자신중에 틀어박여 있었습니다만, 통상을 시작하게 해 외국에 대해서 문을 개 빌려줄 수 있었습니다.일본도 일찌기 외국 함선의 페리 제독에 의해서 무리하게, 개국 당했습니다.그러나 그것이 결국은 좋았다고 하는 것을, 일본인은 알고 있었으므로 .
 조선은, 일본에 대해서 개국하면, 계속해 서구 제국에 대해서도 개국했습니다.그러나, 조선의 내부에서는, 근대화를 추진하려고 하는 사람들과 지금까지의 구태 의연으로 한 전통에 가득차려고 하는 사람들이 대립해, 내란이나 쿠데타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불안정한 안, 왕족은 「세도(성당)정치」――즉왕의 일족이 나라를 사물화해,국정을 갖고 싶은 채로 하는 정치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의 대사관도 두 번 습격당해 많은 일본인이 학살되는 사건도 일어났습니다.그러나 대사관을 덮치는 것이, 국제사회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일도, 조선의 지배자에게는 모릅니다.
 또 조선의 지배자는, 있을 때는 근대화를 위해서 일본과 손을 잡았는지라고 생각하면, 이번은 스스로의 보신을 위해서 청나라(중국)에 아첨해를 팔아, 다음에는 러시아에 아첨해를 판다고 하는 것처럼, 일관성이 없는, 되어가는 대로 하는 정치를 행했습니다.
 그 무절조인 행동에, 일본 뿐만이 아니라 주변의 나라들도 좌지우지되어서 갑니다.당시의 조선은, 세계로부터「동아(동아시아)의 트러블 메이커 」라고 생각되고 있었습니다.그리고 일본은, 이 조선을 위해서, 일청・일러의 두 개의 전쟁을 싸우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쿠보유정



서울의 노면 전차,한성전기 주식회사


고종은 청량리(현재의 서울 특별시 북부의 지역)의 홍릉에 민비의 묘소를 축조 해, 자주(잘) 예배로 향해 가고 있었지만, 종자를 대부분 따르는 행렬로의 참배는 고액의 비용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그 때문에미국의 기술자가, 묘소까지 노면 전차를 부설해, 평상시는 백성의 이동 수단으로 하는 것으로, 경비의 삭감과 증수의 일석이조를 도모할 수 있다고 하여, 전철 부설을 재촉했다.그것이 받아 들여졌기 때문에,왕실과 미국의 기술자의 공동출자로한성전기(자본금 150만엔 헨리-・콜 브랑(Henry Collbran)과 하리・라이스・보스트위크(Harry Rice Bostwick)가 75만엔,왕실이 75만엔, 집왕실은 15만엔만 불입)가1898년에 설립되어전철의 부설을 실시하는 일로 했다.이 때, 한 발 앞서 전철의 도입을 개시하고 있던일본쿄토 전기 철도(1895년개업)에 설계와 공사를 의뢰하고 있다.

운행 개시와 노선의 확대

동대문의 옆에발전소가 병설되어1899년4월 8일에 서대문-청량리간에 개업식을 개최해,단선미포장이면서도 전철의 운행은 시작할 수 있었다.도중 ,종로를 동서로 관철하는 루트였다.이 때의 차량은 당시의 미국의 노면 전차로 보여진 오픈형의 스타일로, 승강용문이 없고, 차체 측면으로 설치된 스텝인가 들 직접 차내에 출입하는 것이었다.건설시의 경위로부터, 일반차 8량과 함께 당초보다 귀빈차 1량이 제조되었다.운전은 쿄토 전철로부터 출향한일본인이 담당했다고 한다.전압은직류 600 V,궤간은1067 mm였다.


당초는 전철에 대한 진기함으로부터 승객이 쇄도했지만, 후에 아이를력사 시키는 사고가 일어나면폭동이 발생해, 전철이 소실하는 사태까지 불렀다.이것에 수반해 일본인의 운전기사는 신변의 위험을 느껴 전원이 사직해, 대신해 미국인 운전기사가 착임 할 때까지의 1주간, 전철의 운행은 정지되었다.


광무 4년 5월 18일 오후 9 시경, 재차 사상사고가 일어나 승객은 하차해, 부근의 군집이 모여, 전철의 유리창을 파괴해, 승차권 발매소의 오두막도 파괴되었다[2].이 때, 승객의 미국인이 부상을 입었기 때문에, 다수의 미국인이 모이고, 군집으로 향해 단총을 난사한[2].그 후, 병정순검이 파견되어 주모자 7명이 호송된[2].


그 후, 노선의 확장을 계획한다.남대문, 구용산 방면에의 연신이 이루어져 차량도 증비 했다.또, 전기사업도 호조로 전철 사업과 함께 확장 공사가 필요해, 거기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때문에), 한성전기는 미국 신탁회사에 회사를 매각해, 자금을 조달.한미 전기(사장 헨리-・콜 브랑, 본사 미국)가 사업을 계승했다.

그러나 한미 전기는,일본시부사와 에이이치상사에 회사마다1909년에 매각했기 때문에[3], 노면전
차와 전력 가스 사업은 일본계의일한 가스 전기의 관할이 되었다.덧붙여 1910년에는한일합방이 되었다.




TOTAL: 8976

番号 タイトル ライター 参照 推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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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戸時代日本と 明治時代 日本 roffkfk1 2013-12-08 3308 0
4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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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世紀末の日本 トルチョック制裁 2013-12-08 3374 0
4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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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窮の朝鮮 KJ野郎 2013-12-07 295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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