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과천출토 청주한씨 (果川出土 淸州韓氏)의 스란치마.

1550년대의 것으로 추정되며 중요민속자료 제114호로 지정

1550年代の物に推定されて重要民俗資料第114号と指定

 

葡萄童子紋緞金線緞大襴裳

치마 무릎부분에는 연화만초문단에 포도동자문(葡萄童子紋)이 두 줄 직금(織金)된 28㎝ 너비의 금선 스란단이 있고, 도련에는 보문이 직금된 6㎝ 너비의 가느다란 금선단이 장식되어, 조선 말기 스란치마의 문양과는 다른 독특한 조형성을 보인다.

果川出土清州韓氏 (果川出土 清州韓氏)のスランチマ.

葡萄童子紋緞金線緞大襴裳 

スカート膝部分には蓮花蔓草紋緞に葡萄童子紋が二つの竝びで織金になった 28㎝ 幅の金線スラン緞があって, チョゴリやツルマキ裾の端には普文が織金された 6㎝ 幅の細い金線緞が飾られて, 朝鮮末期スランチマの文様とは違う独特の造形性を見せる.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고양출토 나주정씨(羅州丁氏) 정응두(鄭應斗:1508∼1572)의 단령(團領)

 

 

 해평윤씨 남아(6세 추정)가 수의로 입고 있었던 포이다. 옷고름은 없어졌으나, 깃과 동정이 있고 소매는 착수이며 무가 달려 있다. 성인용 장의와 같은 모양이다. 색은 전반적으로 상색(緗色)으로 변하였으나 길과 깃, 소매, 무, 섶 등의 색상이 다르게 남아 있어서 조선 말기 오방장두루마기와 같은 구조를 연상할 수 있다.
海平尹氏男児(6歳推定)が壽衣に着ていた袍だ. 服の結び紐は消えたが, カラーと掛け襟があって袖は窄袖でMu(
上着の両わきの下につける別の幅)が当てている. 成人向け葬儀のようなみたいだ. 色は全般的に緗色に変わったが
服の各部分のの色相が違うように残っていて朝鮮末期五方將袍のような構造を連想することができる.
 

 

 

 

 

 문경평산신씨묘출토복식 (문경평산신씨묘출토복식.중요민속문화재 제254호.경북 문경시 문경읍 새재로 944, 엣길박물관 (상초리))

문경 평산 신씨묘는 조선 전기 여성의 단독묘로 2004년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다량의 복식류가 출토되었다. 출토유물은 저고리, 치마, 바지, 단령(團領-조선시대 관리들의 관복) 등 복식류를 비롯하여 습신, 악수, 현훈 등의 염습구 및 치관류 등 70여점에 이르며, 보수·보존 처리과정을 거쳐 현재 옛길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聞慶平山申氏墓 出土服飾 (重要民俗文化財第254号.慶北聞慶市聞慶邑鳥嶺路 944.エッギル博物館)
聞慶 平山 申氏墓は朝鮮前期女性の単独墓で 2004年墓を移葬する過程で多量の服飾類が出土された. 出土遺物はチョゴリ, スカート, ズボン, 團領(朝鮮時代役人たちの官服) など服飾類を含めてスブシン(葬礼で, 納棺の時, 屍身に履かせる紙の履物), 幄手, 玄纁などの殮襲具及び治棺類など 70点ぐらいに至って, 補修·保存処理過程を経って現在 エッギル博物館で所蔵している.
 

 

 

 김덕원(1634∼1704)묘출토의복 (金德遠墓出土衣服)  [ 보물  제672호 ]

 

 

 
의인박씨 묘에서 출토된 ‘호표흉배’
이는 여성이 관복과 흉배를 착용했다는 것은 기록에서만 전해오다가 실제 유물로 발견된 드문 사례로 매우 희귀한 유물이다.
懿仁朴氏墓で出土された “虎豹胸背”
 これは女性が官服と胸背を着したということは記録でば.かり伝えて来ている途中実際遺物で発見された珍しい事例で非常に稀な遺物だ.

 

 

 

 

 

 

1600년대 후반에 사망한 여성인 성산이씨의 묘(파주시 광탄면)에서 출토된 ‘화조문자수스란치마’는 6폭의 치마에 놓아진 자수 화조무늬가 일품이다.  

 

 

경기도박물관은 2008년 4월 파주시 박달산 자락에 위치한 경기도기념물 제137호 심지원(沈之源, 1593∼1662)일가 묘를 이전하기 위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중 심지원의 넷째 아들 익창의 아내 숙인성산이씨(淑人星山李氏, 1654-1671)의 묘에서 자수치마가 실물로는 처음 발견되었다.

 

치마의 직물은 연꽃무늬가 있는 비단을 사용하였고, 모두 6폭이 이어져 있다. 치마의 아랫단은 수를 놓아 부착하였다. 이처럼 아랫단을 장식한 치마를 ‘스란치마’라고 한다. 스란[膝襴]은 치마의 무릎부분 혹은 밑단에 금실로 무늬를 넣어 짜거나 금박을 하여 장식하는 것을 말한다.

 

‘花鳥紋刺繡膝襴裳’とともに展示遺物の中で除くことができないことは懿仁朴氏墓で出土された ‘虎豹胸背’が数えることができる. これは女性が官服と胸背を着したということは記録でば.かり伝えて来ている途中実際遺物で発見された珍しい事例で非常に稀な遺物だ.

 

京畿道博物館は 2008年 4月坡州市朴達山裾に位した京畿道記念物第137号沈之源( 1593~1662)一家墓を移転するための発掘調査を実施した. 調査の中で沈之源の四番目息子益昌の妻淑人星山李氏(1654-1671)の墓で刺繡スカートが実物では初めて発見された.

スカートの織物は蓮華柄がある絹を使ったし, 皆 6幅がつながっている. スカートの下の団は刺繍して附着した. このように下の団を飾ったスカートを 膝襴裳 (スランチマ)と言う. スランは[膝襴]はスカートの膝部分あるいは下の段に金糸で柄を入れて編んだり、金箔をして飾ることを言う.

 

世宗 19卷, 5年(1423 癸卯 / 명 영락(永樂) 21年) 1月 9日(辛卯)

禮曹啓: “嫁女之家, 衾褥服飾, 率用異土難繼之物, 拘於未備, 失時者頗多。 自今衾褥禁用綾錦段子, 新婦服飾, 亦不必純用紗羅綾段, 稱家有無, 以本土所産紬苧緜布, 隨宜用之。” 從之。

예조에서 계하기를,

“딸을 시집보내는 집에서 이불·요·복식(服飾)을 거개 다른 지방에서 생산되는 구하기 어려운 물건을 쓰게 되니, 준비가 되지 못한 데 구애(拘礙)되어 시기를 잃는 사람이 자못 많게 됩니다. 지금부터는 이불과 요는 능금 단자(綾錦段子)를 쓰는 것을 금지하고, 신부(新婦)의 복식(服飾)도 또한 반드시 사라 능단(紗羅綾段)을 쓰지 말고, 집의 재산이 있고 없는 것에 따라 본토(本土)에서 생산되는 명주[紬]·모시·면포(緜布)로 적당히 쓰게 할 것입니다.”

라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

 

世宗 54卷, 13年(1431 辛亥 / 명 선덕(宣德) 6年) 10月 19日(庚戌)

禮曹啓: “京畿、黃海、平安道, 使臣頭目支待衾枕鞍子, 斂於民戶, 實爲有弊。 請因已制之數, 每一道加造一百五十件, 如或破毁, 各以其道官物改造。” 從之。

예조에서 아뢰기를,

“경기·황해·평안도에서 사신의 두목을 접대하는 이부자리·베개·말안장을 민호에서 거두게 되니 실로 폐단이 있습니다. 청컨대, 이미 제정한 수효에 의하여 매 한 도(道)에 1백 50벌[件]을 더 만들게 하고, 혹시 부서지면 각기 그 도의 관청 물건으로써 고쳐 만들게 하소서.”

 

世宗 110卷, 27年(1445 乙丑 / 명 정통(正統) 10年) 10月 9日(庚戌)

司 憲府啓: “前縣監鄭瑀告: ‘今以行司正朴堧子自荊爲女壻。 自荊慊資裝不備, 且以女肥短, 托言失行棄之。’ 下義禁府鞫之, 久未得情。” 上曰: “大抵決獄, 以不失大綱爲主。 義禁府徒以自荊泥醉使酒等事爲主而欲決, 皆末也。 其女若眞失行, 則自荊其夜當卽棄去, 仍宿其家, 至朝嬭母來鄭家, 贈禮物送之, 婚禮可謂成矣。 自荊觀其衾褥衣服之不華,厭其貧寒, 托以失行而棄之, 明矣。” 義禁府更鞫, 果驗。 自荊坐誣, 杖六十徒一年, 復令完聚。

사헌부(司憲府)에서 아뢰기를,
“전 현감(縣監)    정우(鄭瑀)가 고하기를, ‘지금 행 사정(行司正)    박연(朴堧)의 아들 박자형(朴自荊)으로 사위를 삼았는데, 자형이 자장(資裝)3960) 을 갖추지 못한 것을 불만족하게 여기고, 또 여자가 뚱뚱하고 키가 작으므로, 실행(失行)하였다고 칭탁하여 말하고 버립니다.’ 하므로, 의금부(義禁府)에 내려 이를 국문하고 있으나 오래도록 정상(情狀)을 얻지 못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 저 옥(獄)을 결단(決斷)하는 데는 대강(大綱)을 잃지 않는 것으로 주장을 삼아야 한다. 의금부에서 한갓 자형(自荊)이 술에 만취하여 술주정을 한 것 등의 일로써 판결을 하려고 하니 모두 끝이다. 그 여자가 만일 참으로 실행을 하였다면, 자형이 그날 밤에 당연히 곧 버리고 갔을 것이다. 그대로 그 집에서 자고 아침이 되어 유모(乳母)가 정가(鄭家)에 오매, 예물(禮物)을 주어 보냈으니, 혼례는 이루어진 것이다. 자형이 이불·요와 의복이 화려하지 못한 것을 보고, 빈한(貧寒)한 것을 싫어하여 실행(失行)하였다고 칭탁하여 버리는 것이 분명하다.”
하였다. 의금부에서 다시 국문하니 과연 그대로 맞았다. 자형이 무고(誣告)에 좌죄(坐罪)되어 장(杖) 60에, 도(徒) 1년에 처하고 다시 완취(完聚)하게 하였다.   

 

中宗 26卷, 11年(1516 丙子 / 명 정덕(正德) 11年) 11月 8日(乙酉)

諭八道觀察使曰: “近來中外競尙奢靡, 積成弊風, 衣服、飮食、第宅、鋪陳、器皿, 務爲侈美, 以相誇耀, 傷財敗德, 莫此爲甚。 至以紗羅綾段爲枕、帳、茵、褥, 器用磁畫、朱漆, 饌品極水陸珍奇, 盛以大器, 羅列案卓, 用以要譽賓客

팔도 관찰사에게 유시하였다.
“요 사이 중외(中外)에 서로 사치를 숭상하는 폐풍이 쌓여, 음식·의복·제택(第宅)·포진(鋪陳)·기명(器皿)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하여 서로 자랑하고 빛내기를 힘쓰니, 재물을 손상하고 덕을 해침이 이보다 심함이 없다. 심지어 사라 능단(紗羅綾緞)으로 베개·휘장·요·이불을 만들고, 그릇은 그림 그린 자기와 붉은 칠기(漆器)를 쓰며 음식은 수륙(水陸)의 진기한 것을 다 갖추되, 큰 그릇에 담아 큰 탁자에 늘어 놓고 손님들이 추어주기를 바란다.

 

성현(成俔, 1439〜1504)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따르면, 그가 살았던 15세기 말에는 물가가 크게 올랐는데, 특히 염색하는 집에서 값을 크게 올려서 일반 사람들은 그 가격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지만, 도리어 부자들은 사치를 일삼아 값을 다투지 않아 염색하는 값만 더 올랐다고 하였다. 이익(李瀷, 1681〜1763)이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옷 한 벌을 염색하려면 그 남(藍)을 심는 밭이 네 식구가 한 달 먹을 곡식이 나는 땅을 버리는 것이 되니, 국내 전체를 계산한다면 손실이 매우 많다.”고 했을 정도로 염색은 비용이 든다. 때문에 너무 가난하다면, 염색 옷을 입기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成俔(1439~1504)の 慵齋叢話によれば, 彼が住んだ 15世紀末には物価が大きく上がったが, 特に染色する家で値段を大きくあげて一般人々はその価格を手におえにくい位になったが, 返って金持ちは贅沢を事として値段を争わなくて染色する値段だけもっと上がったと言った. 李瀷( 1681~1763)が 星湖僿說で “服一着を染色しようとすればその藍を植える畑が四人の家族がいっかげつ食べる穀食が生える地を捨てるのがなったら, 国内全体を計算したら損失が非常に多い.”そのした位に染め付けは費用が入る. だからとても貧しければ, 染め付け服を着にくいことは事実だ. 

 




中宗 97卷, 36年(1541 辛丑 / 명 가정(嘉靖) 20年) 12月 29日(庚辰)

 新婦謁舅姑時, 俗尙須着靑紅金線衫, 故貧家未易得辦, 奔走求備, 弊亦不貲。 今後稱家有無, 服着, 而靑紅金線衫則一禁, 如有犯禁, 不徒治罪婚家, 首母幷爲推考科罪。
신부가 시부모를 뵐 적에 청홍 금선삼(靑紅金線衫)20002) 을 입는 것을 세속에서 숭상하기 때문에 가난한 가정에서는 쉽사리 마련하지 못하여 분주하게 구득하느라 폐단이 또한 적지 않습니다. 앞으로는 가정의 형편에 맞추어 입게 하고 청홍 금선삼은 일체 금단하되, 만약에 금법을 범하면 혼가(婚家)의 죄를 다스릴 뿐만 아니라 수모(首母)20003) 도 아울러 추고하여 죄를 과해야 합니다.

청홍 금선삼(靑紅金線衫) : 푸르고 붉은 천에 금선을 넣어서 만든 화려한 옷. 신부(新婦)들이 입었다.
靑紅金線衫 : 青くて赤い布地に金線を入れて作った派手な服. 新婦らが着た.


조선시대-의복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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