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1次裁判

1907年 10月 12日

日本外務省が大韓毎日新報振出人  ベセルの処罰を要求する  訴状 [告訴状]を提出した

ベセルが  起訴された理由は  日本軍の活躍を詳らかに公布したということだった

 

1097年 10月 14日

ベセルは

ソウル駐在イギリス総領事館に設置された再判定に出頭して 6ヶ月謹身しなさいという判決を受けた

 

2次裁判

 

1908年 5月 27日

統監府書記官Miura高炉 [三浦梧樓]がベセルを告訴[告訴]したことだ

上海高裁イギリス検事ワルキンスは 連書で訴状 [告訴状]を作成して韓国に来た

1908年 6月15日

午前 10時韓国では初めて国際裁判が開かれるようになったことだ

裁判を駐在する検事判事皆イギリス人だった

原稿  日本統監府Miura故では朝鮮痛感伊藤博文の権限を委任受けてベセルを 告訴たいてい

のだ

 

 

 

ワルキンス検事は原稿Miuraに審問した

 

検事 -韓国で義兵抗争の起きる原因は何だと思うか?

 

原稿Miura-大韓毎日新報が載せている論説のためだ

 

検事-また他の原因は?

 

三浦は証拠で大韓毎日新報論説 3件を例えた

1 -日本外交顧問アメリカ人スチーブンソンを狙い撃ちした韓国人張仁ファン田明雲を愛国志士でほめたたえる

社説

 

2-伊藤博文をオーストリア独裁者メッテルニッヒに比喩して  野蛮心を抱いて他国をのもうとする

者の結果は惨めだろうという暗示を書いた論説

3-咸興学生が指を切って血書きで書いて国権回復を誓ったという記事を書いて殊勝だと

評価したということ

 

当時は軍隊解散高宗退位ヘイグ密使事件など問題で混乱する時期だった韓国人たちの統監府に

大韓抵抗が激しく起きたが

 

日本外交顧問スチーブンソンは日本の韓国統治は韓国国民皆が望んでいてと妄言を言って

韓国人によって狙い撃ちにあった

 

原稿三浦は 告訴状でベセルの発行する新聞が現在の騷乱と無秩序を助長させている

と主張した

 

ギムチォルヤング証人 -シムウテックがベセルに高宗[高宗]が下賜した新聞社運営警備(経費)を伝達したと

証言こんにちはだった

1906年 高宗はベセルに新聞と通信の全権者で特に委任するという特別委任状を下げて 1000ウォン分

10000ウォンを下賜したと言う

 

3日間の裁判は終わって原稿と被告側の最後の弁論

 

弁護士-現在の韓国人の義兵抗争の責任は日本にあるのでベセルは無罪だ

検事 -韓国の治安状態の心細い理由は大韓毎日新報の煽動のためだ

ベセルは処罰を兔れることができない

 

ベセルは有罪判決を受けて[ 中国上海監獄で ]国外追放された  3週間禁固刑と 6ヶ月

謹愼だった

 

こんな裁判結果が知られて韓国人たちは大きく失望と怒った

 

駐日  イギリス大使マクドナルドは襲撃されるかも知れないから大使館周辺に予防措置を取ってくれと

日本大使館に要請するほどだった

 

 

 

ベセルの葬礼行列

 

上海から帰って来たベセルは一ホテルで心臓病に死亡した

 

当時ロンドンデイリーメール特派員だったメックケンジは後日この事件を次のように評価した

 

 

ベセルの裁判はどんな人々にはくだらなく見えるかも知れないがイギリスの言論の自由に対する

今 世代最悪の打撃だった

 

しかし裁判手続きが散漫だったせいにこの事件の深刻性を感じる人は誰もいなかった

 

 

ベセルは上海で禁固刑を服役した後ソウルに帰って来た 2次裁判直前に休刊した

[コリアデイリーニュース]を 1909年 1月 30日から続刊するなど活動を始めた

しかし 3ヶ月後 5月1日 36歳若い  年で急に死亡したが  死因は心臓まひだった

裁判と禁固刑による緊張と科でが大きい影響を及ぼした

 

ベセルの韓国愛と反日精神は非常に透徹してひととき

 

アメリカの [ワシントンポスト]は大韓毎日新報の統監府に対する攻撃を止めらせることができる方法はベセルを

暗殺するしかないと書いたりした

 

ベセルの葬式は東大門外零度社で数千名が集まった中に盛大に挙行されたし彼の死体は

陽画陣 [ソウル合井洞] 外国人墓地につけたし彼の功績を称える人々によって

1910年墓碑が立てられた

 

張志淵はベセルの碑文に次のように少なかった

 

私のかつて彼に会って日が漏れるように通音する時に悲憤慷慨してその意味が非常に激しかったのに

 

もう彼の功の畝のために引く使うようになったらいつわりでむなしい感じを勝つの  くぎし

もう命じて街だとはいえ  ドノブドだ  その意気で大事だなその気立てであ! この切れ石は後世に

照らして消えないことだな

 

韓日併合になると日製はベセルのミョビムンで張志淵が少なくて刻んだ碑文を剥いてしまった

現在剥いてしまった碑文の前にまた立てられた碑文は 1964年 4月編集委員会が中心になって

全国報道人たちが誠金をおさめて立てたことだ

 

姜ジュンマン  著書 [韓国近代散歩]から抜純

 

 

 

 


일제의 대한매일신보의 베델을 추방하라

1차 재판

1907년 10월 12일

일본 외무성이 대한매일신보 발행인  베델의 처벌을 요구하는  고소장 [告訴狀]을 제출하였다

베델이  기소된 이유는  일본군의 활약을 소상하게 공포했다는 것이었다

 

1097년 10월 14일

베델은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관에 설치된 재판정에 출두하여 6개월 근신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2차 재판

 

1908년 5월 27일

통감부 서기관 미우라 고로 [三浦梧樓]가 베델을 고소[告訴]한 것이다

상하이 고등법원 영국 검사 월킨스는 連書로 고소장 [告訴狀]을 작성하여 한국으로 왔다

1908년 6월15일

오전 10시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국제 재판이 열리게 된 것이다

재판을 주재하는 검사 판사 모두 영국인이었다

원고  일본 통감부 미우라 고로는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권한을 위임 받아 베델을 告訴한

것이다

 

 

 

월킨스 검사는 원고 미우라에게 심문하였다

 

검사 -한국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나는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원고 미우라-대한매일신보가 게재하고 있는 논설 때문이다

 

검사-또 다른 원인은?

 

미우라는 증거로 대한매일신보 논설 3건을 예를 들었다

1 -일본 외교 고문 미국인 스티븐슨을 저격한 한국인 장인환 전명운을 애국지사로 찬양하는

사설

 

2-이토 히로부미를 오스트리아 독재자 메테르니히에 비유하고  야만심을 품고 타국을 삼키려는

者의 결과는 비참할 것이라는 암시를 쓴 논설

3-함흥 학생이 손가락을 끊어 혈서로 쓰며 국권회복을 맹세했다는 기사를 쓰고 장하다고

평가하였다는 것

 

당시는 군대해산 고종 퇴위 헤이그 밀사 사건 등 문제로 혼란한 시기였다 한국인들의 통감부에

대한 저항이 격렬하게 일어났는데

일본외교 고문 스티븐슨은 일본의 한국 통치는 한국 국민 모두가 바라고 있다 라고 망언을 하여

한국인에 의해 저격을 당하였다

 

원고 미우라는 告訴狀에서 베델이 발행하는 신문이 현재의 소란과 무질서를 조장시키고 있다

라고 주장하였다

 

김철영 증인 -심우택이 베델에게 고종[高宗]이 하사한 신문사 운영 경비를 전달했다 라고

증언하였다

1906년 高宗은 베델에게 신문과 통신의 전권자로 특히 위임한다는 특별 위임장을 내리고 1000원씩

10000원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3일간의 재판은 끝나고 원고와 피고측의 마지막 변론

 

변호사-현재의 한국인의 의병항쟁의 책임은 일본에 있으므로 베델은 무죄다

검사 -한국의 치안 상태가 불안한 이유는 대한매일신보의 선동때문이다

베델은 처벌을 면할 수 없다

 

베델은 유죄판결을 받고[ 중국 상하이 감옥으로 ]국외 추방되었다  3주간 금고형과 6개월

근신이었다

이런 재판 결과가 알려지고 한국인들은 크게 실망하고 분노하였다

 

주일  영국대사 맥도날드는 습격당할지 모르니 대사관 주변에 예방조치를 취해 달라고

일본 대사관에 요청할 정도였다

 

 

 

베델의 장례 행렬

 

상하이에서 돌아왔던 베델은 한 호텔에서 심장병으로 사망하였다

 

당시 런던 데일리 메일 특파원이었던 맥켄지는 후일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베델의 재판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시시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영국의 언론의 자유에 대한

今 세대 최악의 타격이었다

 

그러나 재판 절차가 산만했던 탓으로 이 사건의 심각성을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베델은 상하이에서 금고형을 복역한 후 서울로 돌아왔다 2차 재판 직전에 휴간했던

[코리아 데일리 뉴스]를 1909년 1월 30일 부터 속간하는 등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3개월 후 5월1일 36세 젊은  나이로 갑자기 사망하였는데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재판과 금고형에 따른 긴장과 과로가 큰 영향을 미쳤다

 

베델의 한국사랑과 반일정신은 매우 투철해 한때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는 대한매일신보의 통감부에 대한 공격을 중지시킬 수 있는 방법은 베델을

암살하는 길 밖에 없다 라고 쓰기도 했다

 

베델의 장례식은 동대문 밖 영도사에서 수천명이 모인 가운데 성대하게 거행되었으며 그의 시신은

양화진 [서울 합정동] 외국인 묘지에 묻혔고 그의 공적을 기리는 사람들에 의해

1910년 묘비가 세워졌다

 

장지연은 베델의 비문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내 일찍이 그를 만나 날이 새도록 통음할 적에 비분강개하여 그 뜻이 매우 격렬하더니

이제 그의 공의 묘를 위하여 그을 쓰게 되니 허망한 느낌을 이기지  못하겠도다

이제 명하여 가로되  드높도다  그 기개여 귀하도다 그 마음씨여 아! 이 조각돌은 후세에

비추어 꺼지지 않을 것이로다

 

한일합방이 되자 일제는 베델의 묘비문에서 장지연이 적어서 새긴 비문을 깍아 버렸다

현재 깍아 버린 비문 앞에 다시 세워진 비문은 1964년 4월 편집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전국 언론인들이 성금을 거두어 세운 것이다

 

강준만  저서 [한국 근대 산책]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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