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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番古い真珠姜さんの系図

真珠姜さんの先祖高句麗の名将姜移植

 

詩調姜移植将軍は

スナラと戦争時病魔元首として

 

598年栄養王の時, 幸運にめぐまれなさい問題(文帝)の 30万大軍を退けたという内容

 

 

 

 300年間の分裂局面を終熄させて統一した幸運にめぐまれなさい

 

300年ぶりに混乱局面を終熄させた数問題(文帝)は  自信感が空を突いて高句麗を挑発して 数問題(文帝)は 30万大軍で高句麗 侵入結果 姜移植将軍にかんな

 


高句麗に問題(文帝)は スナラの臣下でドルオロと言いながら挑発しよう
598年 3月 スナラの傲慢な文に 高句麗の 先制攻撃(1だけで朝陽にある領主総管攻撃)
598年 6月 30万大軍高句麗を攻撃 -> 姜移植将軍が導く 高句麗軍との戦闘で 30万大軍中 25万ほどが戦死かんな ->以後休戦 10余年間もどんな事が起こらない

 

 

高句麗と 類例がなかった 統一スナラとの 初戦闘

 

紀元 597年はすぐ煮こむね栄養王 8年であり, 獣医問題(文帝)持った(陳) を竝合されるかを統一してから 17年になる日だ数は伊豆音によく豊年になって軍事が豊かにしよう高句麗に対して雌雄を争おうと無望 (誣罔)がひどくて牌だけ(悖慢)夏期これをところない侮辱的な文を送ったが, そのだいたいはこのようだった.

 

“荷が千名を受けて来た天下を愛育(愛育)して王に海限りコーナーを任せることは教化(教化)を取り上げて飛ばして元老防止(円で方趾)でそれぞれその天性 (天性)をつくすようにするのだ, 王がメヤング謝絶を送って日ごとに朝貢 (朝貢)したら, (他の国が住んだ送ることを朝貢だと言うことは経って春秋時代以来の常例で彼らのヨックサチェックエナグロッゲ使っただけ対等一国に送る国書には書くことができなかったが, もう高句麗の怒りを激発させて一度争おうと故意に使ったことだ) たとえボンブ(藩附)だと称えることはするが真心が不十分だ. 王がもう荷の臣下だから荷の徳を模範とすることが正しいのに, 王は旺歪(靺鞨)を構築して文の中を閉じこめて王のシンチォブ (臣妾)をマンドッゴ荷に内助(来朝)することを阻んで善良な人が義を慕うことを憎く思ったらどうしてこのように解読がひどいか? 負けることのテブ(太府)に公認 (工人)が少なくないから王が使おうとするに申し上げればいくらでも送るはずだが, (富強することを誇張した言葉) 王がこの前にじっと財物を書いて小人を利用して軍事を育てて兵器を修理したらこれが何をしようと思うことがか.——-高句麗がたとえ地が狭くて民が書くがこれから王を追い出して必ず他の管理を送ることだとはいえ, 王がもし心を洗って行実を変えればすぐ荷物の良い臣下だからどうして必ず他に管理を置こうか. 王はよく考えなさい. 夭寿(遼水)が広いしても長江(長江 : 揚子江)とどうして比べて, 高句麗軍事が多いしても誠実な人(陳国)と比べようか. 荷がもし育てる思いを置かないで王の咎を本するに, 一将軍を送れば足下里だの何か大きい力がドルリャマはそれでも素直にたしなめて王が自ら新しくなるように願う.”三国史記には獣医問題がこの文を平原王(平原王) 32年(紀元 590 年)に送ったことに記録されていて, 水棲(隋書)には問題の概況(開皇) 17年に送ったことになっている. しかし平原王 32年は問題概況 17年このないから‘ 三国史記には軟調を過ち記録したし, 概況 17年は平原王が帰ってから 7年後だから, 水棲には王の台を過ち記録したのだ. 隣国帝王の死亡はメヤングその事実を報告して来た日に記録して, したがってその事実が発生した軟調を間違うように直して使うことはジナの春秋時代以来の習慣なので水棲にそういう誤った記録が生ずるようになったことだが, 三国史記は平原(平原) ・ 栄養(慶陽) 二つの本紀の連帯は肉(古記) を従ってお互いに係った事実はひたすら水棲で抜いて記録して水棲にこの文が平原王に送ったことだと言ったので買うのにその文を平原王 32年に移して記載して連帯を誤る同時に事実に係る人物まで過ち記録したのだ.

栄養王がこの侮辱的な文を受けて大きく怒って多くの臣下たちを集めて回答の文を送ることを議論したら, 姜移植(姜以式)が “このように傲慢で無礼な文は筆に回答するのではないです刀に回答するでしょう.” してすぐ開戦(開戦)するのを主張したら王が彼の言葉を従って姜移植で病魔元首(兵馬元帥)をして精兵 5のみを従えて林留官(臨愉関)で向けるようにして, 先に例 (〓 : 隋書の 靺鞨) 軍事 1だけで夭逝 (遼西)に侵入して獣医軍事を誘引するようにして文の中軍事数千人で海を渡って今の山東(山東)を打つようにしたらここに両国の一番目戦争が始まった. 三国史記には姜移植の名前が見えないからそれは水棲のみを抜いて記録したテムンイだが, 大同運して(大東韻海)には姜移植を撒水戦争(薩水戦争) 時の病魔桃源数(兵馬都元帥)だと言ったし, ソグァックザブロック(西郭雑録)には姜移植を林留官戦争の病魔元首と言って二つの本の記録が同じではない. しかし撒水戦争には王の弟ゴンム(建武)が海岸を引き受けて乙支文徳(乙支文徳)が陸地を引き受けたからどうして病魔桃源数姜移植があったものか? だからソグァックザブロックの記録を追う.

 

 

愉関(林留官) 戦争

翌年高句麗の軍事が夭逝に侵入して夭逝総管(遼西総管) ウィツング (韋沖)と合戦をしている途中偽り敗れて林留官から出たら, 獣医問題街 30万大軍を持ってハンワング(漢王) 洋洋(楊諒)で行軍大塚官(行軍大総管)をして林留官で出て, ズナフ(周羅喉)で水軍総管(水軍総 管)をして海に進むようにした. ズナフは平壌に向けるという話を言いふらしたが実は様式実はお腹を率いて了解(遼海)に入って来て洋洋の軍糧をまかなおうとハムだった. 姜移植が水軍を従えて海の中入って行ってこれを迎えて打ってお腹を撃破して, 群衆に零を下げて城柵を守って出て争わなくなさいと言ったら, 獣医グンサヌンヤングシックがないうえまた 6月の梅雨に会って飢えと伝染病に多い人が散り乱れて乱雑に死んで行って退軍し始めた. 姜移植がこれを追撃して全軍をほとんど殲滅して限りない軍旗を得て改善した.

水棲には “洋洋の軍事は梅雨に伝染病に会って, ズナフの軍事は風浪に会って退却したが , 死亡者が熱にアフブだった. ”と言って不可抗力(不可抗力)の自然の力に敗れたことで, 高句麗に敗れたのではないと記録したがこれは中国の体面のために恥辱を隠すあのらのいわゆる春秋筆法(春秋筆法)によることだから, 林留官けんかは勿論で次の章で言う撒水(薩水) けんかの記録にもそういうツーの記録この多い. とにかく林留官けんか以後に獣医問題が高句麗を恐れてまた軍事を起こすことができずに, お互い休戦条約を結んで商品の貿易をまた始めても国の間に 10余年間もどんな事がオブオッダ.

 

 


 

姜移植将軍の墓だから推定される所

現在バッがウンデ一人きり亀上だけ残っている.

 

月というこんなに碑石があったが日帝時代を経りながらどこかに消えたと言う

 

 


고구려 수나라와의 첫 전쟁 명장 강이식

 

 

가장 오래된 진주 강씨의 족보

진주 강씨의 조상 고구려의 명장 강이식

 

시조 강이식장군은

수나라와 전쟁때 병마원수로서

 

598년 영양왕 때, 수나라 문제(文帝)의 30만 대군을 물리쳤다는 내용

 

 

 300년간의 분열국면을 종식 시키고 통일한 수나라

 

300년 만에 혼란 국면을 종식 시킨 수 문제(文帝)는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고 고구려를 도발하며 수 문제(文帝)는 30만 대군으로 고구려 침입 결과 강이식 장군에게 대패


고구려에게 문제(文帝)는 수나라의 신하로 들어로라며 도발하자
598년 3월 수나라의 오만한 글에 고구려의 선제 공격(1만으로 조양에 있는 영주총관 공격)
598년 6월 30만 대군 고구려를 공격 -> 강이식 장군이 이끄는 고구려군과의 전투에서 30만 대군중 25만 가량이 전사 대패 ->이후 휴전 10여 년 동안이나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고구려와 유례가 없었던 통일 수나라와의 첫 전투

 

기원 597년은 곧 고구려 영양왕 8년이요, 수의 문제(文帝)가 진(陳) 을 병합하여 지나를 통일한 지 17년되는 해이다 수는 이즈음에 자주 풍년이 들고 군사가 넉넉하자 고구려에 대해 자웅을 다투고자 무망 (誣罔)이 심하고 패만(悖慢)하기 이를 데 없는 모욕적인 글을 보내왔는데, 그 대강은 이러하였다.

“짐이 천명을 받아 온 천하를 애육(愛育)하여 왕에게 바다 한 귀퉁이를 맡기는 것은 교화(敎化)를 드날려서 원로방지(圓로方趾)로 각기 그 천성 (天性)을 다하게 함이라, 왕이 매양 사절을 보내 해 마다 조공 (朝貢)하니, (다른 나라가 사신 보내는 것을 조공이라고 함은 지나 춘추시대 이래의 상례로 그들의 역사책에나그렇게 썼을뿐 대등한나라에 보내는 국서에는 쓰지 못했는데, 이제 고구려의 노여움을 격발시켜 한 번 싸우고자 고의로 쓴 것이다) 비록 번부(藩附)라 일컫기는 하지마는 정성이 미흡하다. 왕이 이미 짐의 신하이니 짐의 덕을 본받음이 옳은데, 왕은 말갈(靺鞨)을 구축하고 글안을 가두어 왕의 신첩 (臣妾)을 만듣고 짐에게 내조(來朝)하는 것을 막아 착한 사람이 의를 사모함을 밉게 여기니 어찌 이같이 해독이 심하냐? 짐의 태부(太府)에 공인 (工人)이 적지 아니하니 왕이 쓰고자 할진대 아뢰면 얼마든지 보낼 것인데, (부강함을 과장한 말) 왕이 지난번에 가만히 재물을 써서 소인을 이용하여 군사를 기르고 병기를 수리하니 이것이 무엇을 하려 함이 냐.-----고구려가 비록 땅이 좁고 백성이 적지마는 이제 왕을 내쫓고 반드시 다른 관리를 보낼 것이로되, 왕이 만일 마음을 씻고 행실을 바 꾸면 곧 짐의 좋은 신하이니 어찌 반드시 달리 관리를 두랴. 왕은 잘 생각하라. 요수(遼水)가 넓다 한들 장강(長江 : 揚子江)과 어찌 비하 며, 고구려 군사가 많다 한들 진국(陳國)과 비하랴. 짐이 만일 기를 생각을 두지 않고 왕의 허물을 책할진대, 한 장군을 보내면 족하리니 무슨 큰 힘이 들랴마는 그래도 순순히 타일러서 왕이 스스로 새로워지기를 바란다.”삼국사기에는 수의 문제가 이 글을 평원왕(平原王) 32년(기원 590 년)에 보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수서(隋書)에는 문제의 개황(開皇) 17년에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평원왕 32년은 문제 개황 17년 이 아니니‘ 삼국사기에는 연조를 잘못 기록하였고, 개황 17년은 평원왕이 돌아간 지 7년 뒤이니, 수서에는 왕의 대를 잘못 기록한 것이다. 이웃나라 제왕의 별세는 매양 그 사실을 보고해온 해에 기록하고, 따라서 그 사실이 발생한 연조를 틀리게 고쳐 쓰는 것은 지나의 춘추시대 이래의 습관이므로 수서에 그러한 잘못된 기록이 생기게 된 것인데, 삼국사기는 평원(平原) · 영양(慶陽) 두 본기의 연대는 고기(古記) 를 좇고 서로 관계된 사실은 오로지 수서에서 뽑아 기록하여 수서에 이 글이 평원왕에게 보낸 것이라고 하였으므로 사기에 그 글을 평원왕 32년에 옮겨 기재하여 연대를 그르치는 동시에 사실에 관계된 인물까지 잘못 기록한 것이다.

영양왕이 이 모욕적인 글을 받고 크게 노하여 여러 신하들을 모아 회답의 글을 보낼 것을 의논하니, 강이식(姜以式)이 “이같이 오만하고 무례한 글은 붓으로 회답할 것이 아니요 칼로 회답할 것입니다.” 하고 곧 개전(開戰)하기를 주장하니 왕이 그의 말을 좇아 강이식으로 병마원수(兵馬元帥)를 삼아서 정병 5만을 거느리고 임유관(臨愉關)으로 향하게 하고, 먼저 예 (濊 : 隋書의 靺鞨) 군사 1만으로 요서 (遼西)에 침입하여 수의 군사를 유인하게 하고 글안 군사 수천 명으로 바다를 건너가 지금의 산동(山東)을 치게 하니 이에 두 나라의 첫 번째 전쟁이 시작되었다. 삼국사기에는 강이식의 이름이 보이지 아니하니 그것은 수서만을 뽑아 기록하였기 때문이거니와, 대동운해(大東韻海)에는 강이식을 살수전쟁(薩水戰爭) 때의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라 하였고, 서곽잡록(西郭雜錄)에는 강이식을 임유관 전쟁의 병마원수라고 하여 두 책의 기록이 같지 아니하다. 그러나 살수전쟁에는 왕의 아우 건무(建武)가 해안을 맡고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육지를 맡았으니 어찌 병마도원수 강이식이 있었으랴? 그러므로 서곽잡록의 기록을 쫓는다.

 

愉關(임유관) 전쟁

이듬해 고구려의 군사가 요서에 침입하여 요서총관(遼西總管) 위충 (韋沖)과 접전을 벌이다가 거짓 패하여 임유관에서 나오니, 수의 문제 가 30만 대군을 들어 한왕(漢王) 양양(楊諒)으로 행군대총관(行軍大總管)을 삼아 임유관으로 나오고, 주나후(周羅喉)로 수군총관(水軍總 管)을 삼아서 바다로 나아가게 하였다. 주나후는 평양으로 향한다는 말을 퍼뜨렸으나 실은 양식 실은 배를 인솔하여 요해(遼海)로 들어와 양양의 군량을 대주려 함이었다. 강이식이 수군을 거느리고 바다 가운데 들어가 이를 맞아 쳐서 배를 격파하고, 군중에 영을 내려 성책을 지키고 나가 싸우지 말라하니, 수의 군사는양식이 없는데다가 또한 6월의 장마를 만나 굶주림과 전염병에 숱한 사람이 낭자하게 죽어가 퇴군하기 시작하였다. 강이식이 이를 추격하여 전군을 거의 섬멸하고 무수한 군기를 얻어 개선하였다.

수서에는 “양양의 군사는 장마에 전염병을 만나고, 주나후의 군사는 풍랑을 만나 퇴각하였는데 , 죽은 자가 열에 아흡이었다. ”고 하여 불가항력(不可抗力)의 자연의 힘에 패한 것이고, 고구려에게 패한 것이 아니라고 기록하였으나 이는 중국의 체면을 위해 치욕을 숨기는 저 들의 이른바 춘추필법(春秋筆法)에 의한 것이니, 임유관 싸움은 물론이고 다음 장에서 말할 살수(薩水) 싸움의 기록에도 그러한 투의 기록 이 많다. 아무튼 임유관 싸움 이후에 수의 문제가 고구려를 두려워하여 다시 군사를 일으키지 못하고, 피차 휴전 조약을 맺고 상품의 무역 을 다시 시작하여 두 나라 사이에 10여 년 동안이나 아무 일이 없 었다.

 

 


 

강이식 장군의 무덤이라 추정되는 곳

현재 밭가운데 홀로 거북이 상만 남아 있다.

 

월래 이렇게 비석이 있었지만 일제 시대를 거치면서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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