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은 1937년 중일전젱을 벌이면서 일본內 지원으로는 戰力을 강화하는데 한계가 있어
1938년 4월 1일 일본 점령지를 대상으로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하라 라는 국민총동원법을 공표하였다
이후 한반도에는 물적 인적 자원의 수탈 정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국가 총동원법에는 노무동원 병력동원 軍위안부 3가지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당시 동원된 대다수 한국인 노무자들은 강제적으로 끌려 갔고 賃金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밤낮으로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다
일본의 국가총동원법으로 강제 노동에 동원된 한국인의 규모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일본 정부가 공개한 조선총독부 통계에 따르면
한국인 동원 7.827.355명
●노무 동원
한반도 內 동원—5.782.581명
관알선— 422.397명
국민징용—303.824명
한반도 외 동원
국민징용—222.217명
할당 모집 관알선 823.743명
합계 : 7.554.764명
●군무동원
일본—7.231명 한국—15.112명 .만주—3.852명 . 중국 735명 ..남방 ..36.400명
합계 : 63.312명
● 군인동원
육군 특별 지원병—16.830명 .학도 지원병—3.893명 ..육군 징병—166.257명 해군 (지원 포함)—22.299명
합계 : 209.279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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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계 7.827.355명
강제 징용된 한국인은 782만 7355명이다 (중복으로 징용된 경우 포함)
당시 한반도 인구가 2630만명 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약 30%의 인구가 징용의 대상이었다
이 통계에서는 위안부는 포함되지 않았다
한국인들이 강제 노역한 지역은 광범위했다
한반도 일본 만주 중국 러시아 사할린 태평양 남양군도 동남아시아 등 일본이 점령한 지역에서는
한국인 노동자들이 있었다
왼쪽 부터
군함도 .한국인들의 탄광 노역 , 일본인 위한 사택
나가사키현 남서쪽 無人島 하시마 (端島)는 해상 군함을 닮았다고 하여 군함도 라고 부른다
이 군함도에는 한국인 500명~800명이 끌려 왔다
해저 1000m 탄광 갱도로 내려가 평균 45도가 넘는 고온 95% 습도 유독가스 속에 석탄을 채굴했다
한국인 노동자들은 하루 12시간~16시간 중노동을 하면서도
식량 부족으로 만주에서 콩기름을 만들고 남은 찌꺼기를 먹으며 끼니를 때웠다
그것마저 . 만주에서 일본 군함도로 오는 시간 때문에 콩기름의 찌꺼기가 썩기도 하였다
일본 헌병은 칼을 옆에 차고 한국인 노동자들을 감시하였다고 한다
1941년 부터 1945년 사이 태평양 전쟁으로 군함 .전투기. 어뢰 등 핵심 무기가 나가사키에서 생산되었다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 조사 “및 “국외 강제 동원 희생자 ” 등 위원회에서 조사한 것에 의하면
나가사키 조선소에서 군함을 만드는데 동원된 한국인은 4747명이다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던 날에도 한국인들은 조선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나가사키 조선소 전경 , 원폭 직후 , 원폭으로 사망한 한국인들
나가사키 오카 마사하루 기념 평화 자료관에 있는
하시마 (端島) 탄광의 희생자 한국인 명단이다
명단에는 이름 나이 고향 死因 등이 기록되어 있다
황옥수 경상남도 20세 익사
김용우 강원도 27세 외상에 의한 척추마비
노치선 황해도 16세 리졸 음독 등
10대 어린 소년도 징용되고 있었다
그런데 강제 징용이 없었다고?
국민징용
아래 자료는 1944년에 매일신보사에서 발행한 조선 징용 문답서이다
징용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천황을 위해 국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징용자는 징용서를 받으면 공장을 선택할 수 없고 국가가 시키는 대로 따라야 한다
만약 가정에 사정이 있어 징용에 나갈 수 없는 사람의 경우는 어떻게 되느냐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징용은 戰時의 국가 긴급의 업무에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가정의 사정이나 일신상의 이해에 따라 주저할 때가 이니며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조선의 수치다 라고 답하고 있다
징용은 자발적이 아니라 강제적 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징용은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고 만약 거부하면 국민총동원법에 따라 1년 이하 징역 또는 1000엔 이하 벌금을 내어야 했다
이것은 1944년 매일신보사에서 발행한 조선징용 문답서이다
이 추모비는 뜻있는 일본인들이 기금을 모아 세운 추모비이다
한국인 희생에 비해 너무 작고 초라한 추모비다
나가사키 평화기념 공원의 한국인 원폭 희생자 추모비의 뒷면
강제연행 및 징용으로 중노동에 종사 중에 피폭사한 한국인과 그 가족을 위하여
1979 .8.9 라고 썼다
한국 정부와 재일본 대한민국 민단은
일본에 의해 강제 징용으로 끌려 온 한국인들이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고 원폭으로 사망한 영혼들을 위로하기 위해
나가사키에 한국인 위령비를 건립하는 사업을 추진했으나 나가사키市나 일본 정부가 허용하지 않고 있다
허용하지 않는 이유는
일본 시민단체 등이 나가사키에서 한국인 원폭 희생자가 생겨난 배경에 대한 해석을
문제 삼았기 때문이다
일본에 의한 한국인 강제 징용은 없었고 나가사키에서 한국인이 일본인에게
학대를 받거나 가혹한 노동을 강제 당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내용을 사실로 하고 한글로 비문에 쓴다는 것 때문이었다
증거가 있어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후지카와 카즈타카
나가사키 평화기원상 앞에서
나가사키현 본부 부대표 야마다 마사토와 나가사키에서 “올바른 역사 인식을 생각하는 모임 대표의 후지와키 카즈타카
위령비 저지를 위해 나가사키 시청을 방문하여
다가미 시장에게 위령비 건립 반대를 위한 5934필지의 서명과 진정서를 제출하였다고 한다
이 여성은 일본에 의한 한국인 강제 징용은 없었다고 주장하면서
한국인 원폭 희생자를 위한 위령비 건립을 반대하는 운동을 하고 있다
일본인들의 생각이 모두 같을 수 없지만
나가사키市나 일본 정부는
한국인 원폭 희생자의 위령비 건립을 반대하는 사람들 손을 들어 주고 있다
本は 1937年ズングイルゾンゼングをしながら日本内 支援では 戦力を強化するのに限界があって
1938年 4月 1日日本占領地を対象で人跡物的資源を動員しなさいという国民総掛かり法を露した
以後韓半島には物的人的資源の収奪政策が本格的に始まった
国家総掛かり法には労務動員兵力動員 軍慰安婦 3種の形態に進行された
当時動員された大多数韓国人労務者たちは強制的に引かれて行ったし 賃金をまともに受け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し日夜で苛酷な
労動に苦しんだ
日本の国家総動員法で強制労動に動員された韓国人の規模は正確にわからないが
日本政府が公開した朝鮮総督府統計によると
韓国人動員 7.827.355人
●労務動員
韓半島 内 動員 --5.782.581人
グァンアルでは-- 422.397人
国民徴用 --303.824人
韓半島外動員
国民徴用 --222.217人
割り当て募集グァンアルでは 823.743人
合計 : 7.554.764人
●群舞動員
日本 --7.231人韓国--15.112人 .満洲--3.852人 . 中国 735人 ..南方 ..36.400人
合計 : 63.312人
● 軍人動員
陸軍特別志願兵 --16.830人 .学徒志願兵--3.893人 ..陸軍徴兵--166.257人海軍 (サポート含み) --22.299人
合計 : 209.279人
.................................................................................................
総計 7.827.355人
強制徴用された韓国人は 782万 7355名だ (重複に徴用された場合含み)
当時韓半島人口が 2630万名というのを勘案すれば約 30%の人口が徴用の対象だった
が統計では慰安婦は含まれなかった
韓国人たちが強制労役した地域は手広かった
韓半島日本満洲中国ロシアサハリン太平洋南洋君も東南アジアなど日本が占領した地域では
韓国人労動者たちがあった
左側から
軍艦も .韓国人たちの炭鉱労役 , 日本人のための私宅
長崎県南西の方 無人島 なさるよ (端島)は海上軍艦に似ていたと言って軍艦もと呼ぶ
が軍艦島には韓国人 500人‾800人がひかれて来た
海底 1000m 炭鉱坑道に降りて平均 45度が越す高温 95% 湿度有毒ガスの中に石炭を採掘した
韓国人労動者たちは一日 12時間‾16時間重労動をしながらも
食糧不足で満洲でコングギルムを作り終わることは残物を食べて食事を済ました
それさえ . 満洲で日本軍艦島に来る時間のためコングギルムの残物が腐ったりした
日本憲兵は刀を横にガレージ韓国人労動者たちを見張ったと言う
1941年から 1945年の間太平洋戦争で軍艦 .戦闘機. 魚雷など核心武器が長崎で生産された
“対日抗争期強制動員被害の調査 “及び “国外強制動員犠牲者 ” など委員会で調査したことによれば
長崎造船所で軍艦を作るのに動員された韓国人は 4747名だ
1945年 8月 9日長崎にアトミックボムが投下された日にも韓国人たちは造船所で働いていた
長崎造船所全景 , 原爆直後 , 原爆で死亡した韓国人たち
長崎オカマーサ一日記念平和資料官にある
なさるよ (端島) 炭鉱の犠牲者韓国人名簿だ
名簿には名前年故郷 死因 などが記録されている
黄玉数慶尚南道 20歳溺死
金庸愚江原道 27歳帳付けによる脊椎麻痺
老歯船黄海道 16歳リゾール音読など
10台幼い少年も徴用されていた
ところで強制徴用がなかったと?
国民徴用
下の資料は 1944年に毎日新報社で発行した朝鮮徴用問答書だ
徴用が何やらという質問に対して天皇のために国家の命令に従わなければならない
徴用者は徴用書を受ければ工場を選択することができないし国家が言うとおりに従わなければならない
もし家庭に事情があって徴用に出ることができない人の場合はどうなるのかという質問に対しては
徴用は 戦時の国家緊急の業務に出ることだから家庭の事情や一身上の理解によってためらう時がイニであり
そんな考えを持った人は朝鮮の数値だと返事している
徴用は自発的ではなく強制的というのを見せてくれている
徴用は 拒否することができないことだったしもし拒否すれば国民総掛かり法によって 1年以下懲役または 1000円以下罰金を出さ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これは 1944年毎日新報社で発行した朝鮮徴用問答書だ
が追慕碑は意のある日本人たちが基金を集めて立てた追慕碑だ
韓国人犠牲に比べて小さすぎて見窄らしい追慕碑だ
長崎平和記念公園の韓国人原爆犠牲者追慕碑の裏
強制連行及び徴用で重労動に従事の中に被爆社した韓国人とその家族のために
1979 .8.9 と書いた
韓国政府と在日本大韓民国民団は
日本によって強制徴用でひかれて来た韓国人たちが苛酷な労動に苦しんだし原爆で死亡した魂たちを慰めるため
長崎に韓国人慰霊碑を建立する事業を推進したが長崎市や日本政府が許容していない
許容しない理由は
日本市民団体などが長崎で韓国人原爆犠牲者ができた背景に対する解釈を
問題視したからだ
日本による韓国人強制徴用はなかったし長崎で韓国人が日本人に
虐待を受けるとか苛酷な労動を強制あわなかったが
このような内容を事実にしてハングルで碑文に書くというののためだった
証拠があっても否定していることだ
フジカとカズタカ
長崎平和祈願上の前で
長崎県本部副代表YamadaMasatoと長崎で “正しい歴史認識を思う集まり代表のフジワキカズタカ
慰霊碑阻止のために長崎市役所を訪問して
ダがミ市長に慰霊碑建立反対のための 5934筆の署名と陳情書を提出したと言う
が女性は日本による韓国人強制徴用はなかったと主張しながら
韓国人原爆犠牲者のための慰霊碑建立を反対する運動をしている
日本人たちの考えが皆同じではないが
長崎市や日本政府は
韓国人原爆犠牲者の慰霊碑建立を反対する人々手をあげてくれ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