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朝鮮총독부가 제작한 (朝鮮 풍속 풍경 사진첩)이 있다
이 사진첩에는 가슴을 완전히 노출한 여성 무기력하고 게으른 남성 죄수 등 인물 사진이나
낙후되고 더러운 장소 등이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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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사진과 동일 장소의 동일 여성이다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있던 장소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장소는 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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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화분이 있다
장소는 스튜디오
위에 사진과 동일 장소의 여성이다
장소는 스튜디오 내부
인위적으로 연출한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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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한국인
술병이 놓여 있는데 인위적으로 연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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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도 연출된 것이다
일본은 朝鮮의 사법제도가 전근대적 이라고 비난하고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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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진은 엽서로 제작되어 유럽 등 여러 나라에 팔려 나갔다고 한다
병합 前 朝鮮의 낙후된 모습과 병합 후 朝鮮의 근대화된 모습의 사진이라고
주장하며 일본에 의해 朝鮮이 근대화가 되었다는 증거라고 선전하였다
또한 日帝의 朝鮮 식민지 정책의 정당화로 활용하였다
日帝 총독부에 의해 제작된 사진 엽서 중에 여성에 대한 것은 그 날조가 더 심했고 악랄하였다
기생을 춤 노래 악기 연주 등 기예에 뛰어나고 학식을 갖춘 예술인이 아니라
매춘을 직업으로 하는 여성으로 날조했고
가슴을 완전히 노출하는 것은 朝鮮의 일반 여성의 문화라고 날조하였다
가슴 노출 여성은 일제강점기 당시 朝鮮에 와 있던 선교사 등 외국인들의 증언에도 있고 朝鮮시대 그림에도
있지만 가사 노동 중에 조금 보이는 정도였다
가슴을 노골적으로 완전히 노출하는 여성 사진은 日帝가 제작한 사진 엽서에만 등장하고 있다
이런 연출된 사진을 엽서로 제작하여 유럽 등 세계 여러 나라로 퍼뜨린 日帝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연구해야 한다
日帝의 의도는 한국인은 미개하다 라는 인식을 일본이나 세계에 심어 주려는 목적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잠깐 朝鮮의 笞刑에 대해 알아보자
朝鮮은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근대적 사법제도를 받아들여 재판소를 설치하여 민사 형사 등의 소송 절차가
점진적으로 마련되었다
갑오개혁 법령의 <제판소 구성법>의 공포와 검사 직제의 공포에 의하여 <한성 재판소>등 각급 재판소에
판사 검사를 임명하여 배치했고 또 판사 검사의 직업 법조인 양성을 위한 <법관 양성소>가 신설되어 재판 기관의
준비 작업이 진행되었다
1905년 2월 을사조약에 의해 서울에 日帝의 통감부가 설치되었고 이후 日帝는 朝鮮의 사법제도에 대해
내정간섭을 하기 시작했다
1906년 9월에는 朝鮮의 사법제도를 개혁한다는 명목으로 顧問政治를 재판소에 까지 확대하여 법무에 일본인 참여권과
보좌관을 두었다
1910년 강제 병합 이후에는 통감부는 폐지되고 총독부가 설치되었다
朝鮮총독부는 1910년 8월 부터 1912년 3월 까지 한국 일본 민족간에 적용 법규를 달리했다
한국인에게는 대한제국이 제정한 형사법 ,일본인에게는 일본의 형사법을 적용했다
朝鮮에서의 법체계에서는 朝鮮의 笞刑令 등 몇몇 제령을 제외하고 병합 당시 대한제국의 법령 및 일본 법령의
대부분은 朝鮮人과 일본인 (朝鮮거주 일본인)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그러니까 笞刑은 朝鮮人에게만 실행한 것이다
日帝 朝鮮총독부는 1912년 3월 18일 <朝鮮 笞刑 제13호 >를 공포하였다
이 시기 주목해야 할 것은 경찰서장의 권리로 정식 재판없이 즉결심판으로 처분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즉결심판의 주체는 日帝의 헌병 경찰이었다
제1조에 의하면 경찰서장이나 그 직무를 취급하는 者가 즉결심판을 할 수 있다 라고 하였다
즉결심판의 대상이 되는 행위에 대해 ,朝鮮 거주 일본인에게는 구류 또는 과료형 朝鮮人에게는 笞刑을
실행했던 것이다
태형을 실행할 수 있는 범위는 상당히 넓었다고 한다
제1조 -3월 이하 징역이나 구류에 처리해야 되는 者 상황에 따라 태형으로 다스린다
제2조 -100원 이하 벌금 또는 과료에 처해야 하는 者가 다음 號의 하나에 해당하는 경우에 상황에 따라 태형으로
다스린다
1, 일정한 주소가 없는 경우
2,자산이 없다고 인정된 경우
제11조 - 감옥 또는 즉결 관서에서 비밀리에 집행한다
제13조 - 100원 이하 벌금 또는 과료를 언도받은 者가 그 언도 확정 후 5일 이내 완납하지 않을 경우 검사 또는 즉결 관서의
상황에 따라 태형으로 대채할 수 있다
朝鮮총독부는 독립운동가 반일 사상가 뿐 아니라 민간의 사소한 일에도 가혹한 태형으로 다스렸다
1919년 3월 만세 시위에 많은 한국인들이 참여하였다 日帝 경찰은 만세 시위로 체포한 많은 한국인들을
모두 감옥에 넣을 수 없게 되자
한국인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 한국인을 십자가에 묶어 엉덩이를 치는 태형을 실행하였다
당시 한국에 와 있던 선교사 등 외국인들이 이런 日帝 경찰의 非人道的이고 전근대적인 형벌을 세계의
신문에 고발하였다
결국 日帝 총독부는 1920년 4월 1일 朝鮮 笞刑令을 폐지하였다
1911年 朝鮮総督府が製作した (朝鮮 風俗風景写真帖)がある
が写真帖には胸を完全に露出した女性無気力で怠けな男性罪囚など人物写真や
立ち後れされて汚い場所などが収録され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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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に写真と同一場所の同一女性だ
ムルドングイを頭に載せていた場所で食事をしている
場所はスタジ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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下の植木鉢がある
場所はスタジオ
上に写真と同一場所の女性だ
場所はスタジオ内部
人為的に演出したのが明らか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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眠る韓国人
酒ビンが置かれているのに人為的に演出したこと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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が写真も演出されたことだ
日本は 朝鮮の司法制度が前近代的にしなさいと責めていたと言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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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のような写真ははがきに製作されてヨーロッパなど多くの国に売れて行ったと言う
併合 前 朝鮮の立ち後れされた姿と併合後 朝鮮の近代化された姿の写真だと
主張して日本によって 朝鮮が近代化になったという証と宣伝した
また 日帝の 朝鮮 植民地政策の正当化で活用した
日帝 総督府によって製作された写真はがきの中に女性に対することはその捏造がもっとひどかったし悪辣だった
芸者を踊り歌楽器演奏など伎芸にすぐれて学識を取り揃えた芸術人ではなく
売春を職業にする女性で捏造したし
胸を完全に露出することは 朝鮮の一般女性の文化と捏造した
胸露出女性は日帝強制占領期間当時 朝鮮に来ていた宣教師など外国人たちの証言にもあって 朝鮮時代絵にも
あるが家事労動の中に少し見える位だった
胸を露骨的に完全に露出する女性写真は 日帝が製作した写真はがきにだけ登場している
こんな演出された写真をはがきで製作してヨーロッパなど世界多くの国でまき散らした 日帝の意図が何だったのか研究しなければならない
日帝の意図は韓国人は未開だという認識を日本や世界に植えてくれようとする目的にあったと考えられる
ここでちょっと 朝鮮の 笞刑に対して調べよう
朝鮮は 1894年甲午改革以後近代的司法制度を受け入れて裁判所を設置して民事刑事などの訴訟手続きが
漸進的に用意された
甲午改革法令の <製版所構成法>の恐怖と検事職制の公布によって <漢城裁判所>など各裁判所に
判事検事を任命して配置したしまた判事検事の職業法曹人養成のための <法官養成所>が新設されて裁判機関の
準備作業が進行された
1905年 2月乙巳條約によってソウルに 日帝の統監府が設置されたし以後 日帝は 朝鮮の司法制度に対して
内政干渉をし始めた
1906年 9月には 朝鮮の司法制度を改革するという名目で 顧問政治を裁判所にまで拡大して法務に日本人参加圏と
補佐官を置いた
1910年強制併合以後には統監府は廃止されて総督府が設置された
朝鮮総督府は 1910年 8月から 1912年 3月まで 韓国日本民族間に適用法規を異にした
韓国人には大韓帝国が制定した刑事法 ,日本人には日本の刑事法を適用した
朝鮮での法体係では 朝鮮の 笞刑令 などいくつかの制令を除いて併合当時大韓帝国の法令及び日本法令の
大部分は 朝鮮人と日本人 (朝鮮居住日本人)に等しく適用された
だから 笞刑は 朝鮮人にだけ行ったことだ
日帝 朝鮮総督府は 1912年 3月 18日 <朝鮮 笞刑 第13号 >を公布した
が時期注目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は警察署長の権利で正式裁判なしに即決審判で処分す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したということだ
即決審判の主体は 日帝の憲兵警察だった
第1条によると警察署長やその職務を扱う 者が即決審判ができると言った
即決審判の対象になる行為に対して ,朝鮮 居住日本人には拘留または科料型 朝鮮人には 笞刑を
行ったことだ
苔刑を行うことができる範囲はよほど広かったと言う
第1条 -3月以下懲役や拘留に処理しなければならない 者 状況によって苔刑で治める
第2条-100ウォン以下罰金または科料に処しなければならない 者が次の 号の一つにあたる場合に状況によって苔刑で
治める
1, 決まった住所がない場合
2,資産がないと認められた場合
第11条 - 監獄または即決関西で秘密裡に執行する
第13条 - 100ウォン以下罰金または科料を言い渡し受けた 者がその言い渡し確定後 5日以内完納しない場合検事または即決関西の
状況によって苔刑にデチェすることができる
朝鮮総督府は独立運動家反日思想家のみならず民間のささいなことにも苛酷な苔刑で治めた
1919年 3月万歳デモに多い韓国人たちが参加した 日帝 警察は万歳デモで逮捕した多くの韓国人たちを
皆監獄に入れることができなくなろう
韓国人たちに脅かすために韓国人を十字架に縛って尻を打つ苔刑を行った
当時韓国へ来ていた宣教師など外国人たちがこんな 日帝 警察の 非人道的で前近代的な刑罰を世界の
新聞に告発した
結局 日帝 総督府は 1920年 4月 1日 朝鮮 笞刑令を廃止し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