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조선의 인사는 일본을 야만스러운 나라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이것에 관해서는 이하의 세종의 중요한 발언이 참고가 된다.제1회째의 통신사(그가 일본에 파견한 4번째의 왕사)의 출발의 수개월 전(1428년), 군신의 앞에서 그는 그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일본에는 백편의 서경이 있다라고 (들)물은, 통신사에 구입시킬 필요가 있다.또 일본의 종이는 사 반드시 해 강하다.이 기술은 어떻게 해서든지 습등은 오지 않으면 안 된다(원문·문일본국유백편 서경가령통신사구래차 야마토지견인조작지법역의부습) 」
《세종 실록 제 41권》
서경과는 서경으로, 신빙성이 있다라고 말해지는 지금 문장 서경은 28편이지만, 원래는 백편이다고 하는 하나의 전승이 있었다.일본은 역사의 낡은 나라이니까, 태고의 문물이 남아 있어도 신기하다는 아니라고 하는 감각이 있던 것일 것이다.
또 세종은일본의 지제품을 실제로 손에 들고 있고, 그 질에 매료되고 있던 것을 알 수 있다.그가 왜 통신사외교를 시작했는지의 이유도 여기에 보이고 있다.로쿠다이 장군 아시카가의교의 습직 축하라고 하는 명목은 별도로 본심의 부분에서는, 일본의 조지의 기술 습득이, 최대의 목적인 것은 분명하다.
[세종 실록을 보면, 그는 제1회 통신사의 파견의 뒤도대마도에 사람을 파견해 「야마토저」를 가지고 넘게 해 조선의 각지에 야마토저의 재배를 지시하는 등, 가끔 조지를 위한 곧 생명을 발하고 있다.
그러한 세종의 집착 덕분에, 이 다음날 아침선의 종이(한지)는 국제적으로도 고평값을 얻도록(듯이) 되어 간다.]
1440년에는 세종이 조선 궁정에 있는 「국어」, 「음과뜻」이라고 하는 서적의 결함이나 주석의 미비를 보충하기 위해 일본으로부터, 상세한 주석과 간략한 것 2권과 그 외 3권을 주문했던 것이 기록되고 있다.일본은 조선에 있어서 한문 서적, 그 외 서기 문화의 소스의 하나였다.
아래로부터 있던, 그러한 일본관을 큰폭으로 바꾸고, 조선을 중화(문명국)로 해 일본을 미개인(비문명국)으로 한 도식은 결코, 피부 감각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자연발생적인 것은 아니다.이것을 변화시킨 것은, 과거의 제도를 수호해야 하는, 문인 계급의 위기감이었다.
「훈민정음」은 창제되고 나서 령 포까지 3년을 필요로 하고 있지만, 이 기간은, 관련하는 문서( 「동국정운」)의 제작등의 제준비 외에, 광범에 존재하는 언문(한글) 반대 세력에 대한 회유·타협을 위한 기간이기도 했다.실은 세종은 그들의 저항을 결코 경시할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를 떠안고 있었다.
그것은 명과의 사이의 비대칭의 관계였다.명제국은 「신민」인 조선의 독자적인 외교를 인정하는 체제는 아니었다.그 때문에 일본에 대한 조선왕사의 왕래는명에는 무단의 비밀 외교였던 것이다.
만약 반대파가 자폭 각오로 아키라 황제에 호소해 나왔다면, 세종에 대한 황제의 제재는 불가피일 것이다.그리고 실제로, 반대상소문 중(안)에서 최 만리들은 완곡 표현이지만, 당당히 세종을 위협하고 있다.
「
그들에 대한 회유·타협의 산물로서 세종은 무로마치 막부에의왕사는 더이상 파견하지 않는다라고 약속하게 되었다.최후가 된 세종의 3번째의 통신사가 조선에 돌아가 붙기 전에 어린 군주 아시카가 요시카쓰는 죽어 버렸지만, 상속자를 이은 의정이 6년 후 장군직에 종사했을 때, 그는 조선으로부터의 통신사의 파견을 바랬지만, 세종은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있다.
30년을 넘는 세종의 재위는 아시카가의지, 의량, 의교, 요시카쓰, 의정 5대의 장군과 겹치고 있지만 합계 7회의 왕사를 무로마치 막부에 파견해 쌍방의 수도의 사이를 왕래시키고 있다.대마도나 오오우치씨 전용등의 사자를 더하면,중단되는 일 없이 일본에 사신을 계속 파견한 왕이라고 해도 좋다.
한편 재직 25 젊은이의 의정의 경우는, 세종, 문종, 단 종, 세조, 예종, 성종의 6대의 조선왕과 시대를 공유하고 있다.이 시기, 일본과 조선과의 사이의 사람과 물건의 왕래는 활발하고, 반도에 정주하는 일본인(항 야마토)도 증가하고 갔다.대략적으로 말하면, 조선시대의 최성기라고도 하는 성종기에 이르는 동안,비교적 양호한 2국간 관계가 계속 되었다.그렇지만,막부가 아무리 바라보았다고 해도 쿄토까지 나가 한성에 돌아온 조선왕사는 결과적으로, 단순한 한번도 없었기 때문에 있다.
일본의 모르는 사이에 조선의 지배층의 일본에 대한 사상적, 정치적 태도가 변화 사제문어가 여기에 반영하고 있다.
もともと朝鮮の人士は日本を野蛮な国とは考えていなかった。
これに関しては以下の世宗の重要な発言が参考になる。第1回目の通信使(彼が日本に派遣した4回目の王使)の出発の数か月前(1428年)、群臣の前で彼はその目的を次のように宣言した。
「日本には百篇の尚書があると聞いた、通信使に購入させる必要がある。また日本の紙はしゃきっとして強い。この技術はなんとしても習らってこなければならない(原文・聞日本國有百篇尚書可令通信使購來且倭紙堅靭造作之法亦宜傅習) 」
《世宗実録 第41巻》
尚書とは書経のことで、信憑性があると言われる今文尚書は二十八編であるが、もともとは百篇であるというひとつの伝承があった。日本は歴史の古い国だから、太古の文物が残っていても不思議ではないという感覚があったものであろう。
また世宗は日本の紙製品を実際に手に取っていて、その質に魅了されていたことがわかる。彼がなぜ通信使外交を始めたのかの理由もここにみえている。六代将軍足利義教の襲職祝賀という名目は別として本音の部分では、日本の造紙の技術習得が、最大の目的であったことは明らかである。
[世宗実録をみると、彼は第1回通信使の派遣の後も対馬に人を派遣して「倭楮」をもってこさせ、朝鮮の各地に倭楮の栽培を指示するなど、たびたび造紙のための直命を発している。
そのような世宗の執着のおかげで、この後朝鮮の紙(韓紙)は国際的にも高評価を得るようになっていく。]
1440年には世宗が朝鮮宮廷にある「国語」、「音義」という典籍の欠陥や注釈の不備を補うため日本から、詳細な注釈と簡略なもの2冊とその他3巻をとりよせたことが記録されている。日本は朝鮮にとって漢籍、その他書記文化のソースのひとつであった。
もとからあった、そのような日本観を大幅に変えて、朝鮮を中華(文明国)とし日本を夷狄(非文明国)とした図式はけっして、皮膚感覚から来たものではなく、自然発生的なものではない。これを変えさせたものは、科挙の制度を護持しなければならない、文人階級の危機感であった。
「訓民正音」は創製されてから領布まで3年を要しているが、この期間は、関連する文書(「東国正韻」)の作製などの諸準備の他に、広汎に存在する諺文(ハングル)反対勢力に対する懐柔・妥協のための期間でもあった。実は世宗は彼らの抵抗をけっして軽視できない構造的な問題を抱えていた。
それは明との間の非対称の関係であった。明帝国は「臣民」である朝鮮の独自の外交を認めるような体制ではなかった。そのため日本に対する朝鮮王使の往来は明には無断の秘密外交であったのだ。
もし反対派が自爆覚悟で明皇帝に訴え出たならば、世宗にたいする皇帝の制裁は不可避であろう。そして実際に、反対上疏文の中で崔万里たちは婉曲表現ではあるが、堂々と世宗を脅している。
「若し中国に流れ、或は之を非議する者有らば、豈に事大・慕華に愧ずること有らざらんや」--東洋文庫『訓民正音』
彼らに対する懐柔・妥協の産物として、世宗は室町幕府への王使はもう派遣しないと約束することとなった。最後となった世宗の3回目の通信使が朝鮮に帰りつく前に幼君足利義勝は死んでしまったが、家督を継いだ義政が6年後将軍職に就いた際、彼は朝鮮からの通信使の派遣を望んだものの、世宗は応えなかったのである。
30年を超える世宗の在位は足利義持、義量、義教、義勝、義政5代の将軍と重なっているが計7回の王使を室町幕府に派遣し双方の国都の間を往来させている。対馬や大内氏向けなどの使者を加えれば、途切れることなく日本に使臣を派遣し続けた王といってよい。
一方在職25年弱の義政の場合は、世宗、文宗、端宗、世祖、睿宗、成宗の6代の朝鮮王と時代を共有している。この時期、日本と朝鮮との間の人とモノの往来は活発であり、半島に定住する日本人(恒倭)も増えていった。大まかにいえば、朝鮮時代の最盛期ともいわれる成宗期に至る間、比較的良好な二国間関係が続いた。しかしながら、幕府がいくら望んだとしても京都まで出向き漢城にもどった朝鮮王使は結果として、ただの一度もなかったのである。
日本の知らないうちに朝鮮の支配層の日本に対する思想的、政治的態度が変化していったことがここに反映してい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