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장식의 문화에 대해 그 기원(起源)을
누군가 꽃을 꺾어 그릇에 담았거나 병에 꽂은 일 부터 찾는다면 이런 일은 이 지구에 인간이 살고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자연발생적으로 있었던 것으로 기원(起源)이 큰 의미가 없을지 모릅니다
꽃 자체의 아름다움을 즐기고 감상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서
꽃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인간의 이념이나 정신을 담아 자연을 표현하는 꽃 장식의 문화로
발전하게 됩니다
한국의 꽃꽂이 예술의 역사
한국의 꽃꽂이의 양식은
식물을 神이 내린 영적인 존재로 보고 그 숭배하는 대상에게 꽃을 바치는 무속신앙에서
연유한 것이 있고
또 불교 전래 이후에 부처님께 꽃을 공양하는 불전공화 (佛前供花)를 수용함으로써 불교의
供花와 함께 발전한 것이 있다
한국의 현대 꽃꽂이의 형태는 불교의 供花에서 연유한 점이 많다고 하는데 불교 供花와 함께
발전한 꽃꽂이의 한 양식은 1세기 무렵 중국에서 백제로 전래되었다고 한다
불교가 전래되어 불교가 보편화되어 불교의 供花가 꽃 장식의 문화로서 일상생활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삼국시대
삼국시대 꽃 장식의 예술은 종교의식의 한계에서 벗어나 이 땅의 독특한 꽃꽂이 문화로
자리 잡고 있었던 것으로 알 수 있다
고구려 쌍영총 주실 북벽의 벽화
고구려 벽화 꽃을 그릇에 담고 뿌리는 여인
고려시대
고려불화 觀經變相圖의 일부 꽃꽂이 불교의 供花
고려 觀經變相圖
興國寺의 대웅전 꽃꽂이 벽화
興國寺는 1195년 (고려 명종25년)에 보도국사 지눌이 창건했고 현재의 대웅전은 1624년
조선 인조 2년)에 계특대사가 복원한 것을 1690년 통일 스님이 확대 중창하였다
修德寺 벽화 野花圖
修德寺는 백제 위덕왕 (재위 554년~597년)에 고승 智命이 창건했고 고려 공민왕 당시
나옹이 중수하였고 조선시대 1865년 (고종 2년)에 중창하였다
이 벽화는 1937년 수덕사 (修德寺) 대웅전 해체 공사 중에 발견되었다 당시 묵서명에 의해
1308년 고려 충렬왕때 그린 것으로 밝혀졌고 1528년 (조선 중종 23년)에 채색 보수가
있었다고 한다
1937년 대웅전 해체 수리 공사 중에 발견된 실물은 6.25 당시 파손되었는데
당시 (1937년)에 林泉이 그린 모사도의 일부가 국립 중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모란 작약 맨드라미 치자 들국화가 수반에 가득 담긴 꽃꽂이 그림
해인사 (海印寺
신라 40대 애장왕 3년 (802년)에 창건하였다
해인사 대적광전 (大寂光殿)에 꽃꽂이 관련 벽화 (모사도)
고려시대 벽화로 알려져 있는데 확실한 근거는 없고
신라시대 창건 당시 주 건물이 비로전 이라는 2층 건물이었는데 1488년 (조선 성종 19년)에
學祖가 중창되면서 대적광전 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런 사실로 조선시대 벽화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시대
조선후기 민화 병풍
조선후기 민화 책가도
조선시대 병풍 그림
고려시대 꽃꽂이는 옆으로 누운 타원형인데 비해 조선시대에 와서 꽃꽂이는 세운 것이 많이
발견된다
조선시대는 꽃꽂이 문화가 획기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꽃꽂이에 대한 전문 내용이 있는 서적이 나온다
서유구 (1764년 ~1845년)
저술한 林圓十六志 에 의하면
꽃을 꺾는 방법
꽃가지를 꺾는데 반드시 그 가지의 모양을 가려서 꺾어야 한다 위가 부풀고 아래가 마른것
왼쪽이 높고 오른족이 낮은 것
꽃꽂이에 쓰는 꽃을 따는 방법은 2개가 있는데 연한 꽃가지는 손으로 꺾고 단단한 몸 꽃가지는 가위로
자르는 것이 좋다
꺾어온 꽃가지는 반드시 빨리 주둥이가 작은 병에 꽂고 병 주둥이를 빽빽하게 막아 속 기운이
빠져 나가지 않게 해야 한다
꽃의 선택
만일 한 종류의 꽃을 꺾으려면 반드시 꽃가지가 기이하고 굴곡있고 비스듬히 자빠진 것이어야
한다
곧은 꽃가지나 쑥대가리 같이 더부룩하게 꽃이 뭉친 것은 좋지 않다
꽃을 꽂는 방법
꽃꽂이에서 만일 꽃가지와 잎이 서로 맞서거나 붉고 흰 빛이 서로 짝을 이룬다면 그것은 마치
관청 뜰에 심은 나무나 무덤 앞에 세운 망주석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리고 2종류의 꽃을 꽂으려면 반드시 높고 낮은 것은 구분하여 꽂는데 2종류의 꽃이 마치
하나의 꽃가지에서 나온 것처럼 꽂아야 한다
만일 2종류의 꽃가지가 서로 마주 보게 하려면 먼저 삼끈으로 묶어서 마치 한 꽃가지에서
피어난 것처럼
보이게 만든 다음 꽂아야 한다
花飾りの文化に対してその祈願(起源)を
誰か花を折って器に盛ったとか病気にさした事から捜したらこんな事はこの地球に人間が住んで
ある所であればどこででも 自然発生的にあったことで祈願(起源)の大きい意味がないかも知れないです
花自らの美しさを楽しんで鑑賞することで一歩進んで
花に意味を付与して人間の理念や精神を盛り込んで自然を表現する花飾りの文化で
発展するようになります
韓国の生け花芸術の歴史
韓国の生け花の様式は
植物を 神が下った霊蹟な存在で見てその崇拜する対象に花を捧げる巫俗信仰で
縁由したことがあって
また仏教伝来以後に仏様に花を供養する仏典共和 (仏前供花)を収容することで仏教の
供花とともに発展したのがある
韓国の現代生け花の形態は仏教の 供花で縁由した点が多いと言うのに仏教 供花とともに
発展した生け花の一様式は 1世紀頃中国で百済に伝来されたと言う
仏教が伝来されて仏教が普遍化されて仏教の 供花が花飾りの文化として日常生活中に
染みこんでいたと言える
三国時代
三国時代花飾りの芸術は宗教意識の限界から脱してこの地の独特の生け花文化で
位置づいていたことで 分かる
高句麗 サングヤングチォング主室北壁の壁画
高句麗壁画花を器に盛って振り撤く女人
高麗時代
高麗仏画 観経変相図の一部生け花仏教の 供花
高麗 観経変相図
興国寺の大雄殿生け花壁画
興国寺は 1195年 (高麗明宗25年)に報道国史ジヌルが創建したし現在の大雄殿は 1624年
朝鮮仁祖 2年)にギェトックデサが修復したことを 1690年統一お坊さんが拡大重唱こんにちはだった
修徳寺 壁画 野花図
修徳寺は百済威徳王 (在位 554年‾597年)に上人 智命が創建したし高麗恭愍王当時
ナオンが修理したし朝鮮時代 1865年 (高宗 2年)に重唱こんにちはだった
が壁画は 1937年修徳寺 (修徳寺) 大雄殿解体工事の中に発見された当時ムックソミョングによって
1308年高麗忠烈王時グリーンので明かされたし 1528年 (朝鮮中宗 23年)に彩色補修が
あったと言う
1937年大雄殿解体修理工事の中に発見された実物は 6.25 当時破損されたが
当時 (1937年)に 林泉がグリーン毛糸島の一部が国立中央博物館に保管されている
牡丹 シャクヤク鶏頭梔子野菊が隋伴に いっぱい 盛られた生け花絵
海印寺 (海印寺
新羅 40大愛蔵王 3年 (802年)に創建こんにちはだった
海印寺対敵光電 (大寂光殿)に生け花関連壁画 (毛糸も)
高麗時代壁画で知られているのに確かな根拠はなくて
新羅時代創建当時株建物がビロ殿でありなさいという 2階建物だったが 1488年 (朝鮮成宗 19年)に
学祖が重唱されながら対敵光電という名前に変わったと言うこんな事実で朝鮮時代壁画で
推正している
朝鮮時代
朝鮮後期民画屏風
朝鮮後期民画冊価も
朝鮮時代屏風絵
高麗時代生け花は横になった卵円形なのに比べて朝鮮時代に来て生け花は立てたのがたくさん
発見される
朝鮮時代は生け花文化が画期的に発展するようになる
生け花に対する専門 内容のある書籍が出る
恕宥で (1764年 ‾1845年)
著わした 林円十六志 によれば
花を折る方法
花枝を折るのに必ずその種の模様を選り分けて折らなければならない上が脹れて下が乾いたこと
左側が高くてオルンゾックが低いこと
生け花に使う花を取る方法は 2個があるのに年限 花枝は手で折って堅い身花枝ははさみで
切った方が良い
折って来た花枝は必ず早くくちばしが小さな本にさして病気くちばしをきちきちに阻んで続機運が
抜けないようにしなければならない
花の選択
もし一種類の花を折ろうとすれば必ず 花枝が奇妙で屈曲あってななめに転がったことだと
する
真っ直ぐな花種もスックデがリ一緒にもたれ気味に花が団結したことは良くない
花をさす方法
生け花でもし花枝と葉がお互いに対立するとか赤くて白い光がお互いに 相棒を成したらそれはまるで
官庁庭に植えた木や墓の前に建てた望柱石と何が違うのか
そして 2種類の花をさそうとすれば必ず高くて低いことは区分してさすのに 2種類の花がまるで
一つの 花枝から出たようにささなければならない
もし 2種類の 花枝がお互いに見合わせるようにするためには 先にサムクンで縛ってまるで一花枝で
咲き始めたように
見えるようにした後ささなければならな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