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조선일보 황교익氏의 칼럼을 소개하겠습니다
요약하면
옛날 예법에는 남자는 운두가 높은 鉢을 밥 그릇으로 사용하고 여자는 운두가 낮은 盒을 밥 그릇으로
사용하였다
운두는 그릇의 둘레나 둘레의 높이를 말한다
위는 스테인리스 스틸 空器이고
아래 왼쪽 부터 空器 鉢 盒이다
서울 인사동에 가면 위에 스테인리스 스틸 空器가 관광 상품으로 팔리고 있는데
포장지에 대한민국 korea라고 쓰고 있어 한국의 밥 그릇이라고 확실하게 보여준다
한국의 식당에서 밥을 먹는 외국인들이 신기해 한다는 것을 알고 상인들이 기획한 관광 상품이라고
한다 스테인리스 스틸 空器는 한국 전통 식기와 관련없고 서양의 스튜 그릇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되는데 1970년대에 婚需 도자기 세트 유행과 관련있어 보인다
당시 도자기 회사들이 독자적으로 본을 제작할 능력이 없어 외국의 도자기 본을 가져와 찍었다
그때 스튜 담는데 사용했을것 같은 그릇을 우리 밥 그릇으로 시장에 내놓았던 것이다
1960년대 중반에 가정용으로 판매된 스테인리스 空器는 크기나 종류가 다양했다
그런데 1970년대에 쌀 부족으로 국민에게 밥을 적게 먹자 라는 운동을 벌이면서 식당에
강제로 보급되었다
정부 규격은 직경 10.5cm 깊이 6cm이다
지금은 가정에서는 흔히 도자기 그릇을 사용하고 식당에서는 스테인리스 空器를 사용한다
한국에 오는 대부분의 관광객은 대중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대중 식당의 음식이 곧 한국 음식의
세계화의 통로이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대중 식당에서 이 스테인리스 空器에 밥을 담아낸다
식당에서 이 空器를 사용하는 이유는 딱 하나 편리하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밥을 담고 뚜껑을 덮고 보온 통에 넣어 두는데 반나절이 지나면 그릇 표면에 물기가 생기고
색이 변한다 언제까지 이런 밥을 먹어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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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5세기 굽다리 접시
나뭇잎 모양의 장식을 2개의 구멍을 통해 금실로 달았다
쇠를 다르는 기술이나 錦銀 세공술의 기술을 식기에도 활용하였다
신라 5세기 銀 盒
신라인의 높은 미의식이 느껴진다
고려시대 12세기
상감 국화 唐草文碗
고려시대로 추측되는 鍮器는 方字기법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중요 무형 문화재 李鳳周氏 오른쪽은 그의 전수자이며 아들 이형근氏
이형근氏의 작품 鍮器
空器는 한자어로 비어있는 그릇이라는 뜻으로 현대에 와서 만들어진 것이다
원래 밥그릇을 飯器라고 했고 밥상은 飯床器라고 하였다
스테인리스 空器는 1960년대 이전 한국 전통 식기와 관련없다
조선시대 鍮器 그릇은 왕실이나 양반 서민에 이르기 까지 널리 사용되었다
鍮器의 제작 기법은 크게 3가지로 분류하는데
1. 주물 기법 -불에 녹여 액체 상태의 쇳물을 일정한 틀에 부어 만든다
2.方字기법 -쇠를 불에 달구어 망치로 두드려 가며 형태를 잡아 만든다
3. 半方字기법 -주물 기법과 方字기법을 결합한 것이다
특히 方字기법은
구리와 주석을 78:22로 합금하고 도가니에 녹인 쇳물을 바둑알 처럼 둥근 모양의 덩어리를 만든다
이 덩어리를 바둑 또는 바데기라고 하는데 이것을 여러 사람이 1조로 서로 도와가며 불에 달구어
망치로 두드리기를 반복해 형태를 잡아 만든다
광택이 나고 품위가 있고 보온 보냉 효과가 있는데다가 음식에 독성이 있으면 검게 변하는
특성이 있어 생명의 그릇이라고 한다
方字 鍮器는 제작 기법이 까다롭고 질이 좋아 高價이기 때문에 주로 왕실이나 양반에서
사용하였다
청화 백자 모란 折枝 文盒 조선시대( 진주 국립 박물관 )
청화 백자 모란 文鉢 조선시대 (경기도 박물관)
아래에서 부터 벌어지는 형태의 碗으로 남자의 밥 그릇으로 사용하였다 조선시대
청화 백자 寶相華 文大盒 조선시대 1857년 제작
김홍도 그림 주막에서 보이는 하얀 그릇의 磁器
북한 출토 문화재 白磁鉢
서민들이 사용했을 것 같은 그릇
조선시대 식기의 主流는 도자기 이지만 鍮器도 함께 사용했습니다
신라의 왕관 錦製 銀製의 盒이나 錦製의 굽다리 접시가 말하듯 우리 선조는 쇠를 다루는 기술이나
금은 細工術이 뛰어났습니다
고려시대 鍮器는 동체가 얇고 질긴 특징이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와서 鍮器를 전담하여 생산하는 鍮器匠은 국가 공무원이었고 지방 관아의
공방에도 鍮器工들이 소속되어 있다는 기록이 慶國大典에 있다
조선 중기가 되면 민간인 鍮器匠들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놋전 이라고 불리는 鍮器 판매점이 생겼고 식기류와 각종 생활용품도 판매하였다
신라시대에는 鐵鍮典이라는 상설기구를 설치하여 전문적으로 鍮器를 생산했다고 한다
조선을 대표하는 식기라면 역시 白磁일 것이다
조선을 대표하는 백자는 이미 고려시대 부터 제작되고 있었다
조선 건국 1년전 1391년 李成桂가 왕이 되는 소원을 담아 제작한 백자가 있다
조선은 백자의 원료가 되는 질 좋은 백토와 유약의 원료가 풍부하게 매장된 곳이 많았기 때문에
백자 생산도 활발했다
조선 초기 서민층에서는 분청사기의 식기가 널리 사용되었는데 중기 이후가 되면
백자의 식기 사용이 서민층까지 일반화 되었다
조선의 음식 문화는 밥이 중심이기 때문에 밥을 담는 그릇을 소중히 여겼다 유교의 영향도 있는데
남자는 운두가 높은 鉢을 밥 그릇으로 사용했고 여자는 운두가 낮은 盒을 밥 그릇으로 사용했다
밥 그릇은 飯器라고 했고 밥상은 飯床器라고 하였다
지금은 남녀노소 구별없이 空器를 밥 그릇으로 사용한다
비어있는 그릇이라는 뜻으로 한자어로 空器라고 하는데 空器는 현대에 와서
만들어진 것이다
先に朝鮮日報ファングギョイック氏のコラムを紹介します
要約すれば
昔の礼法には男はウンドが高い 鉢をご飯器で使って女はウンドが低い 盒をご飯器で
使った
ウンドは器のまわりやまわりの高さを言う
上はステンレススチール 空器で
下の左側から 空器 鉢 盒だ
ソウル仁寺洞へ行けば上にステンレススチール 空器が 観光商品で売れて あるのに
包装紙に大韓民国 koreaと書いていて韓国のご飯器だとはっきりと見せてくれる
韓国の食堂でご飯を食べる外国人たちが不思議に思うということが分かって商人たちが企てた観光商品だと
言うステンレス スチール 空器は韓国伝統食器と関係なくて西洋のシチュー器から始まったことで
見当がつくのに 1970年代に 婚需 陶磁器セット流行と関連あったように見える
当時陶磁器会社らが独自的に本を製作する能力がなくて外国の陶磁器本を持って来て取った
あの時シチュー盛るのにサヨングヘッウルゴッみたいな器をうちのご飯器で市場に出したことだ
1960年代中盤に家庭用に販売されたステンレス 空器は大きさや種類が多様だった
ところで 1970年代に包む不足で国民にご飯を少なく食べようという運動をしながら食堂に
強制に普及された
政府規格は直径10.5cm 深く 6cmだ
今は家庭ではよく陶磁器器を使って食堂ではステンレス 空器を使う
韓国へ来る大部分の観光客は大衆食堂でご飯を食べるのに大衆食堂の食べ物がすなわち韓国食べ物の
世界化の通路だと言うのに恥ずかしくも大衆食堂でこのステンレス 空器にご飯を盛り出す
食堂でこの 空器を使う理由はいたわしいが便利だという理由のためであるでしょう
ご飯を盛ってふたを 覆って保温筒に入れて置くのに半日が経てば器表面に水気が 生じて
色が変わるいつまでこんなご飯を食べなければならない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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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 5世紀焼くお皿
木の葉模様の飾りを 2個の穴を通じて金糸でつけた
鉄をダルは技術や 錦銀 セゴングスルの技術を冷えるにも活用した
新羅 5世紀 銀 盒
新羅人の高い美意識が感じられる
高麗時代 12世紀
象眼菊 唐草文碗
高麗の時どおり推測される 鍮器は 方字技法が使われたように見える
重要無形文化財 李鳳周氏 右側は彼の伝授者で息子イヒョンググン氏
イヒョンググン氏の作品 鍮器
空器は 漢字語で 空いている器という意味で現代に来て作られたことだ
元々食器を 飯器と言ったし食膳は 飯床器と言った
ステンレス 空器は 1960年代以前韓国伝統食器と関係ない
朝鮮時代 鍮器 器は王室や両班庶民に至るまで広く使われた
鍮器の製作技法は大きく 3種で分類するのに
1. 鋳物技法 -火にとかして液体状態の熔解鉄を決まったフレームに注いで作る
2.方字技法 -鉄を火に焼いてつちでたたいて行って形態を取って作る
3. 半方字技法 -鋳物技法と 方字技法を結合したことだ
特に 方字技法は
あかがねと柱石を 78:22に合金してるつぼにとかした熔解鉄を碁石のように丸い模様の固まりを作る
が固まりを囲碁またはバデギと言うのにこれを多くの人が 1兆でお互いに助けて火に焼いて
つちでたたくのを繰り返して形態を 取って作る
光沢が出て品位があって保温保冷效果があるうえ食べ物に毒性があれば黒く変わる
特性があって生命の器だと言う
方字 鍮器は製作技法が気難しくて質のよくて 高価利己のため主に王室や両班で
使った
青化白磁牡丹 折枝 文盒 朝鮮時代( 真珠国立博物館 )
青化白磁牡丹 文鉢 朝鮮時代 (京畿道博物館)
下でから起る形態の 碗で男のご飯器で使った朝鮮時代
青華白瓷 宝相華 文大盒 朝鮮時代 1857年製作
キム・ホンド絵居酒屋で見える白い器の 磁器
北朝鮮出土文化財 白磁鉢
庶民たちが使ったような器
朝鮮時代食器の 主流は陶磁器であるが 鍮器も一緒に使いました
新羅の王冠 錦製 銀製の 盒や 錦製の 焼くお皿が言うようにうちの先祖は鉄を扱う技術や
金銀 細工術がすぐれました
高麗時代 鍮器は動体が薄くて強い特徴があると言う
朝鮮時代に来て 鍮器を専担して生産する 鍮器匠は国家公務員だったし地方官煬の
攻防にも 鍮器工らが属しているという記録が 慶国大典にある
朝鮮中期になれば民間人 鍮器匠らの活動が活発になった
ノッゾンでありなさいと殖やす 鍮器 販売店が生じたし食器類と各種生活用品も販売した
新羅時代には 鉄鍮典という常設器具を設置して専門的に 鍮器を生産したと言う
朝鮮を代表する冷えならやっぱり 白磁であるのだ
朝鮮を代表する白磁はもう高麗時代から製作されていた
朝鮮建国 1年前 1391年 李成桂が王になる願いを盛って製作した白磁がある
朝鮮は白磁の原料になる質のよい白土と上薬の原料が豊かに売場された所が多かったから
白磁生産も活発だった
朝鮮初期庶民層では粉青沙器の食器が広く使われたが中期以後になれば
白磁の食器使用が庶民層まで一般化になった
朝鮮の食べ物文化はご飯が中心だからご飯を盛る器を大事にした儒教の影響もあるのに
男はウンドが高い 鉢をご飯器で使ったし女はウンドが低い 盒をご飯器で使った
ご飯器は 飯器と言ったし食膳は 飯床器と言った
今は 老若男女区別なしに 空器をご飯器で使う
空いている器という意味で 漢字語で 空器と言うのに 空器は現代に来て
作られたこと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