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 북한 거주 일본인들의 호구지책

 

목욕탕에서 허드렛일을 하게된 학교교장

 

도코 요시마사는 원래 평안북도 정주에서  소학교 교장으로 일하면서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었지만

 

그는 이제 먹고살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야만 했다.

그래서 겨우 찾게된 것이 하나밖에 없는 공중목욕탕의 일이었다.

 

아침 일찍 욕조에 물을 받고  장작을 때워 물을 데우는 일이라

일 자체는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국인과 대면하면서 

그가 받는 스트레스는 이만저만한게 아니었다.

한국인들은 일부러 여기저기서 더운물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그럴 때마다 그는 

 

”네!”

 라고 답하며 물을 대령해야 했다.

때로는 꼬마들까지 놀렸다.

 

하지만 먹고살려면 

어차피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오히려 더 기분 나쁜 것은 일본인들의 처지를 이해하는 척 하면서

은근히 염장을 지르는 이들이었다.

 

와! 패전 덕분에 목욕탕에서 시중드는 

일본인 나리를 다 뵙게 되네”

-정주 소학교 교장 도코 요시마사

 

 

 

로스케 마담이 된 일본 여자들

 1945년 가을 함경북도 성진. 

이곳의 주택가를 스치고 지날 때마다 나날이 일본인들은 야위어만 갔다.

먹을 것도, 돈도, 입을 것도 점점 궁해 보인다.

그런 한편, 암시장은 성황을 이뤘다.

모두 일본인의 물건이었다

시장 한편으로는 사과, 감, 털게, 조선 엿, 육류 등이 쌓여 있지만

일본인들을 물물교환할 옷가지마저 없어 

그저 침을 삼키며 바라만 볼 뿐이었다.

예쁘게 옷을 장식을 한 소련 장교 부인, 몸을 화려하게 꾸민 한국인 부인 사이로

 그야말로 상거지나 다름없는 몸빼바지 차림의 일본 부인이

콩을 바꾸어 가는 모습이 애처롭기 짝이 없다.

 

한국인 냉면 가게나 주막에서 일하는 일본 여성도 늘어났다.

 

이들은 새하얀 분과 붉은 입술을 한

일명 “로스케 마담”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녀들의 주요 고객은 러시아의 군인들이었다.

-고니시 아키오 세화회 섭외부장

 

 

 

 

가르치던 학생 집에 식모로 들어온 교사

 

생활난에 허덕이던 일본인들은  한국인이 경영하는 이발소, 여관, 목욕탕 등에서 

잡일을 하기 시작했다.

특히 부녀자들은 부유한 한국인 집이나 소련군 관사 등에 들어가 가정부로 일하기도 했고

농사 한번 안지어본 사람이 중국인 밭에 약초를 캐러 다니기도 했다

이러한 가운데 점령 당국이 1946년 1월부터 

일본인의 상업활동을 부분적으로 허가하여

일본인들 중에서 담배, 두부, 비누 행상에 나서는 자도 나타나게 됐다.

다만 이런 행상의 경우는 한국인 상권 보호를 위해, 일본인 마을에서만 허용되었다.

수입이 없어 생활이 어려워지자 과거 자신이 가르치던 학생 집에

식모로 들어간 여교사도 있었다그녀는 평안북도 정주에서 일하던

곽산소학교 교장의 딸, 도코 도시에였다.

그녀는 한때

학교의 여교사로 있었지만 패전이 되자 한 부유한 한국인 집에 들어가 

가정부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원래 자신이 가르치던 

아이의 집이었으니 한국인 고용주는 그녀를 매우 딱하게 여겼다. 

하지만 한국인 고용주가 신경을 써줄수록 그녀의 마음은 더 괴로웠다고 한다.

 

캄차카의 고기잡이 선원 모집

1946년 초 남한에서 일본인의 송환이 

마무리 되고 있을 무렵 소련 당국은 흥남 공업지역 일대에서

사할린과 캄참카 방면의 고기잡이배에 탈 

노동자를 북한에서 모집하려고 했다

 

 

 

 

 

 

소식을 들은 일본인들은, 소련군이 일본인들을 만주와 시베리아로 끌고 간 것도 모자라 

남아 있는 일본인마저 ”모집”이라는 허울로 

다른 곳으로 보내려는 것이 아니냐며 불안해 했다.

 

하지만 호구지책이 궁했던 일본인들은 

굶어 죽느니 먹고살 수 있는 길을 택하게 되고

그렇게 2천 여명이 캄차카의 고기잡이 일에 지원하게 된다.

 

 

 

귀환 후의 일본인들

민폐 집단이라는 차가운 시선

1947년 1월 어느 겨울날. 

오사카에 사는 22세의 한 젊은 여성이 집에서 약을 마신 채 자살했다.

 

 

다키카와 나쓰요라는 이 여성은 

1945년 11월 조선에서 돌아왔다.

 

그러나 마땅히 거처할 곳이 없어 잠시 지낼 곳을 수소문하던 끝에 알게된 친척 집에서 

온 가족이 신세를 지게 되었다.

원래 이 집에는 미쓰이 씨 가족 

5명이 살고 있었는데

다키카와 가족 8명이 들어오는 바람에 졸지에 13명이 생활하게 되었다.

그런데 비좁은 집에서 함께 살다보니 알게 모르게 두 집 사이에 다툼이 잦았다.

 

그도 그럴것이, 생전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들이  대뜸 친척이랍시고 들어와 함께 살고 있으니

미쓰이 가족 입장에서도 분통이 터졌던 것이다.

게다가 새로운 군식구들은 

변변한 일자리도 없이

마쓰이 가족에게 번번히 손을 벌리기 일쑤였다.

 결국 이러한 상황이 너무도 힘들었던

귀환자 가족 중 22세의 한 젊은 여성은 자살하고 만 것이다.

이는 당시 귀환자들을 대하는 본토인들의

일상적인 단편이었다.

임시 수용소의 삶

패전 후 2년여가 지난 1947년 겨울,

도쿄의 역 부근에 설치된 귀환자 임시 수용소는 본의 아니게 거의 반영구 시설이 되어버렸다.

당시 수용된 귀환자들은 일자리를 구해 빨리 밖으로 나가야만 

다음 사람을 받을 수 있는데, 수용소에 한번 들어오면 

그대로 눌러앉기 일쑤였다.

그도 그럴것이 취직은 어려운데 

물가는 살인적이었다.

나가더라도 높은 전세값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수용소는 시설이라고는 대충 지어진 가건물 속으로 바닥에 깔린 거적이 전부였다.

 

 

 

 

게다가 귀환 출신의  어린이가 수용소 울타리 밖으로 나서기라도  하면

본토의 아이들은 외지인이라 놀려댔다.

그때마다 아이는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자며 

울면서 돌아오는  턱에, 부모들의  억장은 무너졌다.

 

 

범죄자라는 오명

해외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도둑질을 일삼게 되었다.

1946년 7월 1일의 범죄 통계를 보면,

생활고와 취직난으로 저지른 절도죄가

총 범죄 건수의 2/3를 차지했는데

범죄자의 대부분은 갓 제대한 군인이거나 해외에서 돌아온 사람들이었다.

 

”세균 덩어리”라는 인식

 

해외 귀환자는 더러운 전염병을 옮기는 세균 덩어리로 인식되고 있었다.

1946년 봄에서 여름까지 중국대륙, 한반도의 일본인들은

대대적으로 일본으로 귀환하고 있었는데

이때 돌아오는 사람들로 인해 일본은 각종 풍토병과 전염병에 시달리게 된다.

때문에 흔히 외지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본토인들로부터 “세균 덩어리” 취급을 당해야만 했다

 

 

당시 일본의 언론들은 조선, 만주에서 돌고 있는 전염병으로

발진티푸스, 천연두, 콜레라, 페스트, 

유행성출혈열 등이 있다며

본토인들은 귀환자들에 대해 ”온정”을 베품과 동시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계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호의호식 했잖아!

민폐 집단이라는 사회적 낙인과 범죄자, 거지, 세균 덩어리라는 인식은

귀환자들에게 한동안 잊을 수 없는 상처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귀환자들이 

가장 듣기 싫어했던 말이 있었다.

당시 귀환자들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 귀환자들이 가장 힘들어 했던 말은 

바로 이것이라고 한다.

”너희들은 외지에서 온갖 호사를 누리고 살았으니, 지금은 천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말이 가장 듣기 괴로웠다고 한다

출처-레알뻘짓 블로그

 

 


朝鮮を去って : 解放以後朝鮮地に残った日本人たちの生 7

● 北朝鮮居住日本人たちの糊口之策

 

風呂場で 下動きをするようになった学校校長

 

度してヨシマサは 元々 平安北道井州で  小学校 校長で働きながら 

家族たちと 一緒に暮していたが

 

彼はもう暮らす ためなら 何の事でもすればこそ した.

それでやっと捜すようになった のが 一つしかない公衆浴場の 仕事だった.

 

朝早く浴槽に問う 受けて  薪をつぶして水を暖める 仕事だから

である 自体はあまり難しくはなかった.

しかし朝鮮人と 対面しながら 

彼のいただくストレスは並大抵なことが なかった.

朝鮮人たちはわざわざ あちこちで お湯を 持って来なさいと させた.

 

そうする度に彼は 

 

だね!

 と返事しながら水を大領すると した.

時には小僧たちまで冷やかした.

 

しかし暮らそうとすれば 

どうせ甘受しなければ割 仕事だった.

 

むしろもっと気持ち悪い のは 日本人たちの境遇を理解する振りをしながら しながら

密かに塩蔵を上げる これらだった.

 

わ! 敗戦おかげさまで風呂場で付き添う 

日本人ゆりをすべてお目にかかるように なるのね

-井州小学校 校長 度して ヨシマサ

 

 

 

ロスするように マダムになった日本女達

 1945年秋咸境道 性真. 

こちらの住宅街をかすめて経つ 度に 日々に日本人たちは痩せて 行った.

食べ物も, お金も, 口を のも ますます不如意に見える.

そんな一方, 暗市場は盛況を 成した.

皆日本人の品物だった

市場一方では 謝り, 感, 毛がに, 朝鮮飴, 肉類 などが積もっているが

日本人たちを物交する服類さえ なくて 

ただ唾をのみながら眺めるだけする だけだった.

きれいに服を飾りを一ソ連将校 奥さん, 身を派手に構えた朝鮮人奥さん 間で

 まさに相距誌や 違いない モムペバだ調えることの日本 奥さんが

豆を変えて行く姿が傷傷しい相棒が ない.

 

朝鮮人冷麺 店や 居酒屋で働く日本女性も 増えた.

 

これらは真白な方と赤い唇を たいてい

一名 ¥"ロスするようにマダム¥"と呼ばれて あった.

彼女たちの主要 顧客は ロシアの 軍人たちだった.

-小西 アキオ細画回渉外部長

 

 

 

 

教えた 学生家に家政婦に入って来た教師

 

生活難に喘いだ 日本人たちは  朝鮮人が 経営する 床屋, 旅館, 風呂場などで 

雑事を し始めた.

特に婦女子たちは富裕な朝鮮人 家や ソ連軍冠詞などに入って行ってお手伝いさんで 働いたりしたし

農業一度 作らなく見た 人が 中国人畑に薬草を掘りに通ったりした

このような中占領 政府が 1946年 1月から 

日本人の 商業活動を 部分的に 許可して

日本人たち 中で タバコ, 豆腐, せっけん行商に出る者も現われるようになった.

ただこんな行商の 場合は 朝鮮人商圏保護のために, 日本人 村でばかり 許容された.

収入がなくて生活が 難しくなろう 過去自分が教えた学生 家に

家政婦に入って行った女教師も あった彼女は平安北道井州で 働いた

グァックサンソハックギョ 校長の娘, 度して ドシエだった.

彼女はひととき

学校の女教師で あったが 敗戦になると一富裕な朝鮮人家に 入って行って 

お手伝いさんで仕事をするようになった のだ.

ところで元々自分が 教えた 

子供の家だったので 朝鮮人雇用与える彼女を非常にいたわしく 思った. 

しかし朝鮮人雇い主が神経を 書いてくれるほど 彼女の心はもっとつらかったと する.

 

カムチァカの 漁夫船員募集

1946年初南韓で日本人の 送還が 

仕上げになっている 頃 ソ連政府は興南工業地域 一帯で

サハリンとカムチァムカ方面の漁船に 仮面 

労動者を北朝鮮で募集しようと した

 

 

 

 

 

 

消息を聞いた 日本人たちは, ソ連軍が 日本人たちを 満洲とシベリアに連れて行った のも 足りなくて 

男児 ある日本人さえ ¥"募集¥"という 見かけで 

違う 所に送ろうとするのではアニニャであり不安に思った.

 

しかし糊口之策が不如意だった 日本人たちは 

飢えて 死ぬより暮らすことができる道を選ぶようになって

そのように 2千 黎明が カムチァカの 漁夫仕事に支援するようになる.

 

 

 

帰還 後の日本人たち

民弊 集団という冷たい視線

1947年 1月どの 冬の日. 

大阪に住む 22歳の一若い 女性が 家で薬を飲んだ まま 自殺した.

 

 

ダキカとナスヨというこれ 女性は 

1945年 11月朝鮮で 帰って来た.

 

しかし当然に住む所が なくて しばらく過ごす所をうわさをたよりに捜した終りに 分かるようになった 親戚 家で 

全家族が世話になるように なった.

元々この家には三井さん 家族 

5人が住んで あったが

ダキカと家族 8人が入る 望むに 急に 13人が生活するように なった.

ところで窮屈な家で一緒に 暮して見ると 分かるように分からなくも家 間に 争いが ひんぱんだった.

 

彼も グロルゴッが, いつまでも顔 一度見た事がない 人々が  ただちに チンチォックイラブシで 入って来て 一緒に 暮して あるから

三井家族 立場(入場)でも 憤痛が裂けたのだ.

それに新しい 郡家族たちは 

碌な働き口も なく

松井家族にいつも手を開ける 常だった.

 結局 このような 状況があまりにも大変だった

引揚者 家族の中で 22歳の一若い女性は自殺してしまったのだ.

これは当時引揚者たちを対する 本土人たちの

日常的な 甘い方だった.

臨時 収容所の生

敗戦後 2年になって行って去る 1947年 冬,

東京の駅近所に 設置された 引揚者 臨時収容所は 不本意ながらほとんど半永久 施設が なってしまった.

当時収容された 引揚者たちは 働き口を 求めて 早く 外に出ればこそ 

次 人を 受けることができるのに, 収容所に 一度入って来れば 

そのまま位置付け 常だった.

それもそのはずなのが就職は 難しいのに 

物価は 殺人的だった.

出ても高い 借用権価格を 手におえ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のだ.

当時収容所は 施設とは 大まかに建てられた仮建物 中に 底に敷かれた収が 全部だった.

 

 

 

 

それに帰還出身の子供が 収容所垣根の外に出るとかすれば

本土の子供達は 外地人だからノルリョデッダ.

その時ごとに子供は元々住んだ所に帰ろうといいながら 

泣きながら帰って来るあごに, 親たちのオックザングは崩れた.

 

 

犯罪者という 汚名

海外で 帰って来た人々は  貧しい だから自然に盗みを事とするようになった.

1946年 7月 1日の犯罪統計を 見れば,

生活苦と就職難でやらかした 窃盗罪が

すべて犯罪件数の 2/3を 占めたが

犯罪者の大部分は只今除隊した 軍人や 海外から帰って来た 人々だった.

 

¥"細菌 固まり¥"という認識

 

海外引揚者は汚い伝染病を 移す 細菌固まりに認識されて あった.

1946年春で 夏まで 中国大陸, 韓半島の 日本人たちは

大大的に日本で帰還して あったが

この時帰って来る人々で 人海 日本は各種風土病と伝染病に苦しむように なる.

のためよく 外地で 帰って来た人々は 本土人たちから ¥"細菌固まり¥" 取り扱いを あわ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当時日本の言論たちは朝鮮, 満洲で回っている伝染病で

発疹チフス, 天然痘, コレラ, ペスト, 

梅田熱 などがあると

本土人たちは 引揚者たちに対して ¥"温情¥"を 施すことと同時に 

¥"注意¥"を 気鬱だと係図していたのだ.

 

 

その間 好衣好食したんじゃないの!

民弊集団という社会的 烙印と 犯罪者, 乞食, 細菌固まりという 認識は

引揚者たちに 一年の間 忘れることができない 傷で落ち着いた.

しかし引揚者たちが 

一番聞きたがらなかった言葉が あった.

当時 引揚者たちを相手にしたアンケート調査で 引揚者たちが 一番苦しがった言葉は 

ところで これだと言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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