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江戸時代農奴制下での米生産

에도시대 일본 전체 인구의 85%를 차지했던 농민은 부유하게 살았다고 흔히 일본인들은 말한다.
봉건 영주체제하에서 대다수의 농민들이 농노로서 고난의 시대를 살았는데 일본 역사를 미화하기에 혈안이 된 역사 학자들의
날조에 세뇌되어 번영의 시대로 망상을 그리는 것이다.
일본 농노에 대한 것은 여러번 투고하였지만 에도시대의 역사에 대해 일본의 대표적 역사학자 北島正元의 견해를 간단히 소개한다.
江戸時代日本全体人口の 85%を占めた農民は富裕に暮したとよく日本人たちは言う.
封建領主体制の下で大多数の農民たちが農奴として苦難の時代を暮したが日本歴史を美化するのに血眼になった歴史学者たちの捏造に洗脳されて繁栄の時どおり妄想を描くのだ.
日本農奴に対することは何回投稿したが江戸時代の歴史に対して日本の代表的歴史学者 北島正元の見解を簡単に紹介する.

『体系日本史叢書7 土地制度史Ⅱ』 北島正元
 太閤検地に代表される「検地」は、土地に対して石高を決め、それをもとに年貢を課す「石高制の幕藩体制」を築く根拠となる。 この制度は、厳密な兵農分離を基盤としている。 つまり、16世紀以降は中世に崩壊した在地領主制ではなく、封建的農奴制としての国家が成立したのであった。 その上で、貢租の直納と引き換えに小農に作職所持権を公認し、 それと同時に「郷村の百姓どもをばDEATHなぬ様に生きぬ様に合点いたして収納」(東照宮上意)するようにしたのであった。 こうした封建体制は新田開発によって促進され、また流地禁止令によって、さらに田畑永代売買禁止令によって領知権を確実に防衛できるということにしたことで、確固たるものになったのだと言える (流地禁止令は質地騒動という農民の暴動が各地で発生したために撤回される)。 こうして農民たちは年年歳歳の単純再生産を繰り返すようになり、 幕藩権力も商業高利貸資本としての豪農との共生関係を再編・強化し、直接生産者への寄生を補強する。 これら豪農は、マニュファクチュア経営や商業的農業を行うという点で企業家的性格を持っていた.
태합 검지로 대표되는 「측량」은, 토지에 대해서 수확량을 결정해 그것을 기초로 연공을 부과하는 「수확량제의 막번체제」를 쌓아 올리는 근거가 된다. 이 제도는, 엄밀한 병농분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즉, 16 세기 이후는 중세에 붕괴한 재지 영주제가 아니고, 봉건적 농노제로서의 국가가 성립한 것이다. 그 위에, 조공의 직접 납부와 교환에 소농에게 작직 소지권을 공인해, 그것과 동시에 「향촌의 백성들을 죽은 것도 아니고 살아 있는 것도 아닌 상태로 합점을 찾아 수납」 (東照宮上意) 하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봉건 체제는 신전개발에 의해서 촉진되어 또 流地禁止令에 의해서, 한층 더 田畑永代売買禁止令에 의해서 領知権을 확실히 방위할 수 있기로 한 것으로, 확고한 것이 되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流地禁止令은 質地騒動이라고 하는 농민의 폭동이 각지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철회된다).이렇게 해 농민들은 연년세세의 단순 재생산을 반복하게 되어,막번권력도 상업 고리대 자본으로서의 호농과의 공생 관계를 재편・강화해, 직접 생산자에게의 기생을 보강한다.이러한 호농은, 매뉴팩처 경영이나 상업적 농업을 실시한다고 하는 점으로 기업가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에도시대 막부는 농업생산성 향상에 힘썼다고 주장한다.
그 실태를 알아 보자.
물론 과거 역사를 미화하는데 혈안이 된 학자들이 너무나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도 고려해 놓자.
江戸時代幕府は農業生産性向上に力をつくしたと主張する.
その実態を調べよう.
もちろん過去歴史を美化するのに血眼になった学者たちがあまりにも大きいエラーを犯しているということも考慮しておこう.

 弥生水田の生産量は?
 『奈良時代民政経済の数的研究』にある反収が妥当なものかを確かめるため、静岡大学農学部の佐藤洋一郎助教授らは、登呂遺跡の復元水田で古代農法による稲栽培実験を行い、二千年前の米の反収を推定しました。実験は、橿原考古学研究所の寺沢薫氏のグループも行ない、反収百十三キログラムの数値を出しました。佐藤グループの数値は二百六十キログラムで、双方の数値から推定反収を百九十キログラムとしました。実験で得られた推定反収の百九十キログラムは、時代の変遷のなかで、どう変化したのでしょうか。佐藤氏によると、弥生時代中期から二千年後の一八八七年(明治二十年)の平均米反収は約百八十キログラムです。
 「二千年間の米生産量はほぼ横ばいで、平均二百キログラムくらいです。・・・」
야요이시대 논의 생산량은?
 「나라시대 민정 경제의 수적 연구」에 있는 단위면적당 평균수확량이 타당한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시즈오카 대학 농학부의 佐藤洋一郎 조교수외는, 登呂遺跡의 복원 논에서 고대 농법에 따르는 벼재배 실험을 실시해, 2천 년전의 쌀의 단위면적당 평균수확량을 추정했습니다.실험은, 카시하라 고고학 연구소의 寺沢薫씨의 그룹도 행해, 밭 하나당 평균수확량 백십3킬로그램의 수치를 냈습니다.사토 그룹의 수치는 2백6십 킬로그램으로, 쌍방의 수치로부터 추정 밭 하나당 평균수확량을 백구십 킬로그램으로 했습니다.실험으로 얻을 수 있던 추정 단위 면적당 평균수확량의 백구십 킬로그램은, 시대의 변천 속에서, 어떻게 변화했는지요.사토씨에 의하면, 야요이 시대 중기부터 2천년 후의 1887년(메이지 20년)의 단위면적당 평균수확량은 약 백팔십 킬로그램입니다.
2천 년간의 쌀생산량은 거의 옆걸음으로, 평균 2백 킬로그램 정도입니다.・・・」 

 

고대 한국의 도래인이 일본에 농사를 전래한 이후 2000년 동안 농업생산력 향상은 없었다. 라는 주장이다.

조선시대 농업 기술은 극히 후진적이며 당연히 농업 생산성은 낙후되어 있었다. 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무엇을 근거로 말했을까?

古代韓国で渡った到来人が日本に農業を伝来した以後 2000年の間農業生産力向上はなかった. という主張だ.

朝鮮時代農業技術は極めて後進的で当然農業生産性は立ち後れされていた. と主張する学者たちは何を根拠で言っただろうか?


1600年頃の水田面積は、歴史書を紐解かなければいけない、統計書ではおさえられないんですね。1600年と言えば「関が原の戦い」の年なんですが、その時の農地面積が205万ヘクタール。ですから当然のことながら水田はそれよりも小さいということになるわけです。 それから100年ごとに見て行きますと、1700年(元禄13年)282万ヘクタール。残念ながらすべて農地面積なのですけれども、100年後の 1800年もほとんど変わらずで282万ヘクタールです。そして1872年(明治5年)に321万ヘクタールとなっています。 ですから、水田ということになると、どうもやはり明治初期に現在の239万ヘクタールというものがあったのではないかと思います。ただ、生産調整を やってきましたので、定着分という果樹が植わって、あるいは改廃で元は田んぼだったんだけど、そういう状態にあるものがその他に30万ヘクタールあります から、270万ヘクタールであるとも言えます。 それから「単位当たり収量」ですね。これも調べていて大変興味深かったのですが、「100キロ増やすのに何年掛かっているのか」という見方をします と、1886年(明治19年)から1935年(昭和10年)の50年間で、200キロから300キロに100キロ増える。
1600년경의 논면적은, 역사서를 끈 풀지 않으면 안 되는, 통계서에서는 억누를 수 없네요.1600년이라고 말하면 「세끼가하라의 싸움」의 해입니다만, 그 때의 농지 면적이 205만 헥타르.그러니까 당연한 일이면서 논은 그것보다 작다고 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100년마다 보고 가면, 1700년(元禄 13년) 282만 헥타르.유감스럽지만 모두 농지 면적입니다 그러나, 100년 후의 1800년도 거의 변함없이 282만 헥타르입니다.그리고 1872년(메이지 5년)에 321만 헥타르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논이라는 것이 되면, 아무래도 역시 메이지 초기에 현재의 239만 헥타르라는 것이 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단지, 생산조정을 왔으므로, 정착분이라고 하는 과수가 심어지고, 혹은 개폐로 원래는 논이었지만, 그러한 상태에 있는 것이 그 외에 30만 헥타르 있기 때문에, 270만 헥타르이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단위 당 수량」이군요.이것도 조사하고 있어 몹시 흥미로왔습니다만, 「100킬로 늘리는데 몇 년 걸려 있는 것인가」라고 하는 견해를 하면, 1886년(메이지 19년)부터 1935년(쇼와 10년)의 50년간으로, 200킬로에서 300킬로에 100킬로 증가한다.

 

日本の農地
 930年(平安末期)…『和名類聚抄』‥85万ヘクタール。
 鎌倉時代から室町時代にかけて二毛作が普及して、食糧不足が緩和されて餓death が減少した。
 1450年(室町中期)…『捨芥抄』‥94万ヘクタール。
 1600年(江戸初期)…162万ヘクタール。
 1720年(江戸中期)…294万ヘクタール。
 1874年(明治7年)…水田面積、265万ヘクタール。畑面積、190万ヘクタール。合計、455万ヘクタール。
 1912年(大正元年)…558万ヘクタール。
 1926年(昭和元年)…580万ヘクタール。

日本の人口

社会工学研究所(1974年)
1600年     12,273,000
1700年     28,287,200
1750年     31,005,900
1850年     30,714,000
明治13 1880年 36,649,000
明治43 1910年 49,184,000  

 

1874년 이전의 경지면적은 논과 밭이 합산되어 있습니다.

대체로 일본의 논과 밭의 비율은 6:4 정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1874년 이전의 일본의 농지와 인구에 대해서는 연구기관과 학자들 마다 편차가 커서 논란이 많습니다만 1700년을 기준으로 살펴 봅시다.

1700년의 농지 면적은 282만 헥타아르 60%가 논이라고 한다면 논의 면적은 169.2만ha 인구는 28,287,200명, 인구 1인당 경지면적은 0.598反, 에도시대 단위 면적당 쌀생산량 190kg/反을 고려하면 0.758石/反

1700년 0.758石/反의 쌀수확량 이후 일본에서 어떤 일이 발생할까요? 다음 그래프를 봅시다.

1874年以前の農地面積は水田と畑が合算されています.
概して日本の水田と畑の割合は 6:4 位を維持しています. 1874年以前の日本の農地と人口に対しては研究機関と学者たちごとに偏差が大きくて論難が多いですが 1700年を基準でよく見ましょう.
1700年の農地面積は 282万ha 60%が田だと言ったら水田の面積は 169.2万ha 人口は 28,287,200人, 人口 1人当り農地面積は 0.598反, 江戸時代単位面積当たり米生産量 190kg/反を考慮すれば 0.758石/反
1700年 0.758石/反の米上がり高以後日本でどんな仕事が発生しましょうか? 次のグラフを見ましょう.

 

 

일본 역사에 있어서 비참한 기근이 1720년 부터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일본 학자들은 기상조건이 좋지 않았다. 라고 일본 우민의 마음을 달래지만 

향촌의 백성들을 죽은 것도 아니고 살아 있는 것도 아닌 상태로 합점을 찾아 수납」(東照宮上意)의 결과 단위 면적당 쌀생산량이 0.758石/反(세금을 공제하면 0.38石/反 ) 이하로 줄어 들자 1840년 까지 기근이 연속적으로 발생하게 된다. 

1880년 480만 톤 明治13 1880年 인구 36,649,000 명  131 kg/1人 0.873石/1人

日本歴史にいて惨めな飢饉が 1720年から発生し始めます.
日本学者たちは気象條件が良くなかった. と日本愚民の心をなぐさめるが
郷村の百姓どもをばDEATHなぬ様に生きぬ様に合点いたして収納」(東照宮上意)の結果,単位面積当たり米生産量が 0.758石/反(税金を控除すれば 0.38石/反 ) 以下に減ると 1840年まで飢饉が連続的に発生するようになる.
1880年 480万トン 明治13 1880年 人口 36,649,000 人 131 kg/1人 0.873石/1人 


참고: 근대의 농지면적 변화(参照: 近代の農地面積変化)
 http://www.maff.go.jp/primaff/koho/seika/nosoken/nogyosogokenkyu/pdf/nriae1968-22-4-5.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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