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군 평론쟁-


郡評論争-評制の隠蔽

郡評論争-대화개신(大化改新)
http://blog.naver.com/marich77/40199369620
에서 평제의 도입전의 사정에 대해서 알아 보았다.
で評制の導入前の事情に対して調べた.

오늘은 평제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알아 보자.
今日は評制に対してより詳らかに調べよう.

評(こおり、ひょう)とは、古代朝鮮および古代日本での行政区域の単位。『日本書紀』は「大化の改新」の時に「郡」が成立したと記すが、「郡」と言う用語が用いられるのは、大宝律令制定以降であり、それ以前は「評」を使っていた文書(木簡類)が見つかっている。
평 (코오리)이란, 고대 조선 및 고대 일본에서의 행정구역의 단위.「일본 서기」는 「大化 개신」때에 「군」이 성립했다고 적지만, 「군」이라고 하는 용어가 이용되는 것은, 大宝律令 제정 이후이며, 그 이전은 「평」을 사용하고 있던 문서(목간류)가 발견되고 있다.

平安時代に書かれた『皇太神宮儀式帳』に「難波朝天下立評」という文言があり、大化の改新直後の孝徳天皇の時代に「評」という制度が導入されたと記されており、発掘された金石文にも「評」を使っているものがあることから、こうした事実は古くから知られてはいた。
헤 이안 시대에 쓰여진 「皇太神宮儀式帳」에 「難波朝天下立評」이라고 하는 문언이 있어, 大化 개신 직후의 효덕천황의 시대에 「평」이라고 하는 제도가 도입되었다고 기록되고 있어 발굴된 금석문에도 「평」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있는 것부터, 이러한 사실은 옛부터 알려지고는 있었다.

ところが、『日本書紀』には一貫して「郡」と表記されていた。これについて昭和26年(1951年)に井上光貞が大化改新で導入されたのは「評」だったという説を唱え、これに対して坂本太郎が日本書紀の記す「郡」こそが正式な名称で「評」は異字体に過ぎないとしてこれを否定した。この両者による論争は改新の詔の記事の信憑性や『日本書紀』編纂時の修飾説(原典史料の表現を編纂当時の表現に書き改めた部分があるという見解)などと絡んで長い間議論されてきた。
그런데 , 「일본 서기」에는 일관해서 「군」이라고 표기되고 있었다.이것에 대해 昭和 26년(1951년)에 井上光貞이 大化改新으로 도입된 것은 「평」이었다고 하는 설을 주창해 이것에 대해서 坂本太郎가 일본 서기가 기록하는 「군」이야말로 정식적 명칭으로 「평」은 異字体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 이것을 부정했다.이 양자에 의한 논쟁은 개신의 조의 기사의 신빙성이나 「일본 서기」편찬시의 수식설(원전 사료의 표현을 편찬 당시의 표현에 고쳐 쓴 부분이 있다고 하는 견해)등과 관련되어 오랫동안 논의되어 왔다.

しかし、藤原宮などの発掘によって大宝律令制定以前に書かれた木簡の表現は全て「評」と記されており、逆に「郡」表記のものが存在しないことが明らかとなった。このため、今日では大宝律令制定以前は「評」と表現される地方行政組織が存在したと考えられている。
그 러나, 藤原宮 등의 발굴에 의해서 大宝律令 제정 이전에 쓰여진 목간의 표현은 모두 「평」이라고 기록되고 있어 반대로 「군」표기의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분명해졌다.이 때문에, 오늘로는 大宝律令 제정 이전에는 「평」이라고 표현되는 지방 행정 조직이 존재했다고 생각되고 있다.

その後、大宝律令の制定によって「評」は「郡」に改められることになるが、単に名前が変わっただけではなく、その際に統合・分割などの再編成が行われていたとも考えられている。
그 후, 大宝律令의 제정에 의해서 「평」은 「군」으로 고칠 수 있게 되지만, 단지 이름이 바뀐 것 만이 아니고, 그 때에 통합・분할등의 재편성을 하고 있었다고도 생각되고 있다.

ただし、史料が少なく、その実態については諸説が分かれている。まず「立評」(評の設置)時期については『常陸国風土記』の説により大化5年(649年)あるいは白雉4年(653年)と考えられているが、全国一斉の行われたものなのか、地域差があったのかについて意見が分かれている。因幡国の豪族伊福部氏に伝わる『伊福部系図』には、大化2年(646年)に初めて水依評が設置されたという記述が存在する。
다만, 사료가 적고, 그실태에 대해서는 제설이 나뉘고 있다.우선 「立評」(평의 설치) 시기에 대해서는 「常陸国風土記」의 설에 의해 大化 5년(649년) 혹은 白雉4년(653년)으로 생각되고 있지만, 전국 일제히 행해진 것인가, 지역차이가 있었는지에 임해서 의견이 나뉘고 있다.因幡国의 호족 伊福部씨에게 전해지는 「伊福部 계도」에는, 大化2년(646년)에 처음으로 水依評이 설치되었다고 하는 기술이 존재한다.

また、従来の国造が廃止あるいはそのまま評に移行されたのか、それとも国造などの支配に属していない朝廷支配地を対象として導入されたのかについても意見が分かれている。
또, 종래의 国造가 폐지 혹은 그대로 평으로 이행 되었는지, 그렇지 않으면 国造 등의 지배에 속하지 않은 조정 지배지를 대상으로 해 도입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나뉘고 있다.

さらに、木簡や金石文などから評の長官を評督(ひょうとく、こおりのかみ)・次官を助督(じょとく、こおりのすけ)を置き、その下に評史(ひょうし、こおりのふひと)などの実務官がいたという考えが有力だが、これとは別に『常陸国風土記』などには評造(ひょうぞう、こおりのみやつこ)という呼称も登場する。これを評督・助督と関連づける説(前身説や総称説、助督の置かれない小規模評の長官職説など)や既存の国造と関連づける説(後身説や評督を出す国造以外の有力豪族説など)があり、統一した見解が出されていない。
게다가 목간이나 금석문등에서 평의 장관을 평독・차관을 조독을 두고, 그 아래에 평사등의 실무관이 있었다고 하는 생각이 유력하지만, 이것과는 별도로 「常陸国風土記」등에는 평조라고 하는 호칭도 등장한다.이것을 평독・조독과 관련 짓는 설(前身説이나 総称説, 조독이 놓여지지 않는 소규모 평의 長官職説등)이나 기존의 国造와 관련 짓는 설(후신설이나 평독을 내는 国造 이외의 유력 호족설등)이 있어, 통일한 견해가 나오지 않았다.

なお、中国正史には、高句麗に「内評・外評」(『北史』・『隋書』)、新羅に「琢評」(『梁書』)という地方行政組織があったことが記されており、『日本書紀』継体天皇24年(530年)条にも任那に「背評(せこおり)」という地名が登場することから、本居宣長や白鳥庫吉は、「評」という字や「こほり(こおり)」という呼び方は古代朝鮮語に由来するという説を唱えていた。これに対して金沢庄三郎は「大きな村」という意味の古代日本語という説を唱えている。
덧붙 여 중국 정사에서는, 고구려에 「 내평・외평」( 「북사」・「수서」), 신라에 「탁평」( 「량서」)이라고 하는 지방 행정 조직이 있었던 것이 기록되고 있어 「일본 서기」継体天皇24년(530년) 조에도 임라에 「배평」이라고 하는 지명이 등장하는 것부터, 本居宣長나 白鳥庫吉는, 「평」이라고 하는 글자나 「코호리」라고 하는 부르는 법은 고대 조선어에 유래한다고 하는 설을 주창하고 있었다.이것에 대해서 가나자와 쇼자부로는 「큰 마을」이라고 하는 의미의 고대 일본어라고 하는 설을 주창하고 있다.

発掘結果から「評」と表現される地方行政組織が存在したとは確実であるが、『日本書紀』や『万葉集』では一貫して「郡」となっており「評」については一切記されていない。『日本書紀』や『万葉集』では故意に「評」を「郡」に置き換えてあることが明らかになったがその目的や理由については判っていない。
발굴 결과로부터 「평」이라고 표현되는 지방 행정 조직이 존재했다고는 확실하지만, 「일본 서기」나 「만엽집」에서는 일관해서 「군」이 되고 있어 「평」에 대해서는 일절 기록되지 않았다.「일본 서기」나 「만엽집」에서는 고의로 「평」을 「군」으로 옮겨 놓고 있는 것이 밝혀졌지만 그 목적이나 이유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일본서기나 만엽집에서 평을 군으로 바꿔 놓은 이유에 대해서 알 수 없다 라고 말하지만 숨은 내막에는 무엇이 있을까?
우선 일본 삼대고비의 하나로 알려진 那須国造碑에 대해서 알아 보자.

日本書紀や万葉集でで置き変えた理由に対してわからないと言うが隠れた内幕には何があるか? 

まず日本三大古碑の一つで知られた 那須□造碑に対して調べよう. 



那須国造碑
 永昌元年己丑の四月に、飛鳥浄御原の大宮から、那須国造の追大壹でありました那須の直葦提(あたい、いで)は、”評督”との官職を授かりました。そして庚子の歳の正月二日壬子の日の辰の節に、長逝しました。そこで遺嗣子の意志麻呂を首とします私共は、碑銘を立て遺徳を頒し、故人を偲び祀りました。
 うやうやしく仰ぎ奉りかえりますと、長逝しました公は、広氏の尊い後胤で、那須国の柱、朝廷の重鎮とも言うべき方でありました。その一生は、浄御原の大宮より追大壱にあげられ、さらに評督職を下賜されて、二度にわたっての光栄にあづかり、光輝のある命脈を高めました。                                                        
「永昌」は中国の年号で元年は689年。当時朝鮮半島にあった新羅という国では中国の年号をつかっていた。⇒那須地方に新羅と関係の深い人がいた。
国造(くにのみやつこ)は、国を治める豪族。⇒むかしは「那須」とうう国があった。
那須の長官葦提さんが郡の役人、評督(こおりのかみ)に任命された。⇒国が地方の役人を決める制度だった。
葦提さんのむすこ「意斯麻呂」が父の為に那須国造碑を建てました。
 永昌元年(689年) 기축의 4월에, 飛鳥浄御原의 大宮으로부터, 那須国造의 追大壹이었던 那須의 直葦提는, ”평독”의 관직을 내려 주셨습니다.그리고 庚子의 나이의 정월 이일 壬子의 날의 辰의 節에, 長逝 했습니다.거기서 遺嗣子인 意志麻呂를 우두머리로 하는 우리들은, 비명을 세워 遺徳을 기려, 고인을 그리워해 모셨습니다.
  공손하게 바라오며 돌이키면 장서 했던 공은, 広氏의 고귀한 後胤(자손)으로, 那須国의 기둥, 조정의 중진이라고도 말해야 할 분이었습니다.그 일생은, 浄御原의 大宮으로 부터 追大壱을 줄 수 있어 한층 더 평독직이 하사 되고, 두 번에 걸쳐서의 영광을 받아 光輝가 있는 명맥을 높였습니다.
                                                        
「영창」은 중국의 연호로 원년은 689년.당시 한반도에 있던 신라라고 하는 나라에서는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고 있었다.⇒나那須 지방(栃木県)에 신라와 관계가 깊은 사람이 있었다.
国造(지방관)는, 나라를 통치하는 호족.⇒옛날은 「那須」라고 하는 나라가 있었다.
那須의 長官 葦提씨가 군의 공무원, 평독에 임명되었다.⇒나라가 지방의 공무원을 결정하는 제도였다.
葦提씨의 아들 「意斯麻呂」가 아버지를 위해 那須国造碑를 세웠습니다.

那須国造碑概要: 那須国造碑那須国造碑は西暦700年に当時の那須国造であった那須直葦堤の業績を称える為息子の意志麻呂らによって建立されたも ので多賀城碑(多賀城市)、多胡碑と並ぶ日本三大古碑の一つに数えられています。石碑は花崗岩を加工したもので高さは148㎝、19字×8行の152字の 碑文が刻み込まれ、書体は中国の六朝時代の書風と類似している点があることから朝鮮半島の新羅から渡米してきた人々の影響によるものだと推察されていま す。
那須国造碑 개요: 那須国造碑那須国造碑는 서기 700년에 당시의 那須国造 였던 那須直葦堤의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 아들인 意志麻呂등에 의해서 건립된 것으로 多賀城碑(타가죠시), 多胡碑와 같이 일본3 대고비의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비석은 화강암을 가공한 것으로 높이는 148㎝, 19자×8행의 152자의 비문이 새겨져 서체는 중국의 육조 시대의 서풍 과 유사하는 점이 있는 것으로 부터 한반도의 신라로부터 도래해 온 사람들의 영향에 의하는 것이라고 추측되고 있습니다.

こ の銘文の彫られた花崗岩は硬くて彫りにくい材質だそうで、その硬い花崗岩に銘文を彫る技術が当時の日本人には知られていなかった。そのような状況下で、こ のような彫り物の遺物がこの地方で出土するということは、おそらく、「白村江」以降・・、新羅から身分の高い貴族とともに伴って流入してきた技術者集団の 手によるものでははないかと考えられている・・・・・と、宮司さんは話していました。しかも、それらしき記事が『日本書記』の670年頃の出来事として 載っていたようです。
이 명문이 조각해진 화강암은 딱딱해서 조각하기 어려운 재질이어서, 그 딱딱한 화강암에 명문을 조각하는 기술이 당시의 일본인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었다.그러한 상황하로, 이러한 조각 유물이 이 지방에서 출토하는 것은, 아마, 「백촌강」이후・・, 신라에서 신분이 높은 귀족과 함께 따라 유입해 온 기술자 집단의 손에 의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되고 있다・・・・・라고 宮司씨는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게다가, 그것 같은 기사가 「일본 서기」의 670년경의 사건으로서 실려 있던 것 같습니다.

일본의 탄생 - 반란(日本の誕生 - 反乱)
http://blog.naver.com/marich77/40187192197

을 참고하자

を参考しよう.

 

多賀城と大宰府は、奈良時代の律令制度のもと朝廷の出先機関として、西海道(九州)と陸奥・出羽(東北)地域を治める役所としてほぼ同じ時期に機能していました。また、軍事の統括や、朝廷と緊張関係にあった蝦夷や新羅との外交の舞台として機能していたことが知られています。
多賀城과 大宰府는, 나라시대의 율령제도의 아래 조정의 파견 기관으로서 서해도(큐슈)와 陸奥・出羽(東北) 지역을 통치하는 관공서로서 거의 같은 시기에 기능하고 있었습니다.또, 군사의 통괄이나, 조정과 긴장 관계에 있던 蝦夷나 신라와의 외교의 무대로서 기능하고 있었던 것이 알려져 있습니다.

〈薄氷を踏む古代史学〉
 古代史の研究は、文字史料の極めて少ない時代を対象にするので、ややもすると論理が先行する場合が多い。しかも、研究の基本史料である『 日本書紀 』は、当時の支配者が自分たちの支配を正当化するために 編纂(へんさん)した書物であるから、史料そのものが、書き改められている場合も多いのである。したがって、史料を使う場合にも慎重な配慮をしながら、研究が進められているのであるが、さらに 木簡(もっかん) や 墨書土器(ぼくしょどき) など、古代の文字 文章が確認されるようになってからは、これによってそれまでの定説に疑問がおこったり、新しい問題がうまれたり、従来とは別の視点で考えなければならない事態が生まれるようになった。古代史の研究者は、木簡や墨書土器によって、いつ自分の説を改めなければならなくなるかわからない、薄氷の上を歩いているような状態におかれているのである。評も、木簡によって、歴史の闇の彼方から呼び返されて、その設置が確認された制度であり、その実態について、研究が進められているテーマなのである。
 고대사의 연구는, 문자 사료의 지극히 적은 시대를 대상으로 하므로, 약간도 하면 논리가 선행하는 경우가 많다.게다가, 연구의 기본 사료인 「일본 서기」는, 당시의 지배자가 스스로의 지배를 정당화 하기 위해서 편찬한 서적이기 때문에, 사료 그 자체가, 고쳐 쓸 수 있고 있는 경우도 많은 것이다.따라서, 사료를 사용하는 경우에도 신중한 배려를 하면서,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지만, 한층 더 목간이나 묵서 토기등, 고대의 문자 문장이 확인되게 되고 나서는, 이것에 의해서 지금까지의 정설에 의문이 일어나거나 새로운 문제가 출생 충분해 종래와는 다른 시점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태가 태어나게 되었다.고대사의 연구자는, 목간이나 묵서토기에 의해서, 언제 자신의 설을 고치지 않으면 안 되게 될지 모르는, 박빙 위를 걷고 있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評도, 목간에 의해서, 역사의 어둠의 저 쪽에서 상기해지고, 그 설치가 확인된 제도이며, 그실태에 대해서,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테마인 것이다.

〈歴史から 抹kill(まっさつ)された評制〉
  645年6月、 蘇我入鹿(そがのいるか)が 中大兄皇子(なかのおおえのおうじ)と 中臣鎌足(なかとみのかまたり)に、宮廷で暗killされた事件は、小学校の教科書にものせられるほど有名である。そして教科書などの説明によれば、中大兄皇子たちは、その年都を 難波(なにわ)に 遷(うつ)し、新国家建設の方針(改新の詔)をだしたというのである。この一連の事件を大化の改新といい、これによって日本最初の国家が誕生したとされている。ところで、この詔の第二条には、国の下の行政単位として郡をさだめ、その役人として郡司をおくことが規定されている。そして『日本書紀』は、これ以後、国の下の行政単位はすべて郡と記し、あたかもこのとき全国に郡がおかれたようにしているのである。ところが、この時期の石や金属にきざまれた文字 文章( 金石文(きんせきぶん) という)や、古代の氏族の系図には、国の下の行政単位を評と書いている例が多いのである。そこで評と記す史料の信頼性、郡と評の関係、その設置の年代などについて様々な意見が、1950~60年代に発表されたのである。これを郡評論争というが、1967年に藤原宮跡から「己亥年十月上挟国阿波評松里」(己亥年は699年)という木簡が出土したことによって、大宝律令が施行されるまで、国の下の行政単位は評であったことが確認され、論争に決着がついたのである。
〈역사로부터 말살된 평제〉
  645년 6월, 소가노 이루카(蘇我入鹿)가 텐지 천황과 나카토미노 가마타리(中大兄皇子)와 中臣鎌足에게, 궁정에서 암살된 사건은, 초등학교의 교과서에도 태울 수 있을 만큼 유명하다.그리고 교과서등의 설명에 의하면, 中大兄皇子들은, 그 년 도를 難波(나니와)에 천도해, 新国家建設의 방침(改新の詔)을 냈다는 것이다.이 일련의 사건을 다이카 개신 이라고 하여, 이것에 의해서 일본 최초의 국가가 탄생했다고 여겨지고 있다.그런데, 이 조의 제2조에는, 나라아래의 행정 단위로서 군을 규정, 그 공무원으로서 군지를 두는 것이 규정되고 있다.그리고 「일본 서기」는, 이것 이후, 나라아래의 행정 단위는 모두 군이라고 적어, 마치 이 때 전국에 군이 두어진 것처럼 하고 있는 것이다.그런데 , 이 시기의 돌이나 금속에 새겨진 문자 문장(금석문이라고 한다)이나, 고대의 씨족의 계도에는, 나라 아래의 행정 단위를 평이라고 쓰고 있는 예가 많은 것이다.거기서 평이라고 적는 사료의 신뢰성, 군과 평의 관계, 그 설치의 연대등에 대해서 여러가지 의견이, 1950~60년대에 발표되었던 것이다.이것을 군평론쟁이라고 하지만, 1967년에 후지와라궁적으로부터 「己亥年十月上挟国阿波評松里」(己亥年은 699년)이라고 하는 목간이 출토한 것에 의해서, 다이호 율령이 시행될 때까지, 나라아래의 행정 단위는 평이었던 것이 확인되어 논쟁에 결착이 붙었던 것이다.

〈九州における評制実施の証拠〉
  1971年春、大宰府史跡から「久須評大伴マ」(表)「太丹□■■□□」という木簡が出土し、のちの豊後国 球珠(くす)郡 にあたる地域を久須評としていることから、九州でも評制が実施されていたことが確認された。これ以外に、金石文などから阿蘇評(のちの肥後国阿蘇郡)、 衣(え)評(のちの薩摩国 頴娃(えの)郡)、 糟屋(かすや)評(のちの筑前国糟屋郡)などで、評がおかれ(立評という)、その役人として評造、評督 助督が任命されていたことが知られている。立評は、それまで各地方の国造が支配してきたクニや民衆を分割 統合したり、部民制を解体して実施された。たとえば 比多(ひた) 国前(くにさき) 大分の三国造しかいなかった豊後に、日田 球珠 直入 大野 海部 大分 速見 国埼の8郡がおかれているのは、立評の過程でクニの分割が行われたためと考えられる。また評督などには、各地の新興の実力者が任命されることもあったといわれている。立評の時期については、全国的には大化から 白雉(はくち)年間(645~654)とされているが、九州の場合は、663年の白村江での敗戦後であり、そのためもあって、飛鳥の朝廷の実力者が筑紫惣領となって下向したと考えられている。
〈큐슈에 있어서의 평제 실시의 증거〉
  1971년 봄, 大宰府史跡으로부터 「久須評大伴マ」(표)「태단□■■□□」이라고 하는 목간이 출토해, 후의 豊後国 球珠군에 해당하는 지역을 구수평으로 하고 있는 것부터, 큐슈에서도 평제가 실시되고 있었던 것이 확인되었다.이외에, 금석문등에서 阿蘇評(후의 肥後国阿蘇郡), 衣評(후의 薩摩国 頴娃郡), 糟屋評(후의 筑前国糟屋郡)등에서, 評이 놓인다(立評이라고 한다), 그 공무원으로서 評造、評督 助督이 임명되고 있었던 것이 알려져 있다.立評은, 그때 까지 각지방의 国造가 지배해 온 나라나 민중을 분할 통합하거나 부민제를 해체해 실시되었다.예를 들어 比多 国前 大分의三国造에 상당하는 삼국조 밖에 없었던 豊後에, 日田 球珠 直入 大野 海部 大分 速見 国埼의 8군이 두어지고 있는 것은, 立評의 과정에서 나라의 분할을 했기 때문에라고 생각할 수 있다.또 평독등에는, 각지의 신흥의 실력자가 임명되기도 했다고 한다.立評의 시기에 대해서는, 전국적으로는 大化로부터 白雉 연간(645~654)으로 되어 있지만, 큐슈의 경우는, 663년의 백촌강으로의 패전 다음에 있어, 그 때문도 있고, 아스카의 조정의 실력자가 筑紫惣領가 되어 하향 했다고 생각되고 있다.

〈なぜ評制は注目されるのか〉
 国の下の行政単位が郡であったか評であったか、それはただ表記の違いだけで、さほど重大な問題ではないと考えられるかもしれない。しかし、大宝律令の実施まで郡が設置されていないのに、改新の詔で郡の設置が書かれていることは、改新の詔があとから書き換えられたものであるということになる。それは、改新の詔さらには大化の改新自体が、本当に実施されたかどうかの疑いを生じさせているのである。つまりは、日本最初の国家がどのようにして成立したのかという問題となるのである。また評は、 新羅(しらぎ)などの朝鮮諸国で実施されていた、軍事的要素の強い制度である。評造などには国造時代以来の民衆を徴兵し、この軍隊を指揮する権限があったが、郡司にはこのような権限はなく、各国の軍団は都から派遣されてくる国司が指揮することになっていた。評から郡への変更は、地方の豪族に軍事力を持たせなくするための変更であり、さらに敵国視し差別している新羅と、同じ名称を使いたくないという排外意識の表明でもあった。
〈왜 평제는 주목받는 것인가〉
  나라 아래의 행정 단위가 군으로 있었는지 평이었는지, 그것은 단지 표기의 차이만으로, 그다지 중대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그러나, 大宝律令의 실시까지 군이 설치되어 있지 않은데, 改新의詔로 군의 설치가 쓰여져 있는 것은, 改新의詔가 나중에 고쳐 쓸 수 있던 것이 된다.그것은, 改新의詔 또 大化의改新 자체가, 정말로 실시되었는지의 혐의를 일으키게 하고 있는 것이다.결국은, 일본 최초의 국가가 어떻게 해 성립했는지라고 하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또 평은, 신라등의 조선 제국에서 실시되고 있던, 군사적 요소가 강한 제도이다.評造 등에는 国造時代 이래의 민중을 징병해, 이 군대를 지휘하는 권한이 있었지만, 郡司에게는 이러한 권한은 없고, 각국의 군단은 都로부터 파견되어 오는 国司가 지휘하게 되어 있었다.평으로부터 군에의 변경은, 지방의 호족에게 군사력을 갖게하지 않기 위한 변경이며, 한층 더 敵国視해 차별하고 있는 신라와 같은 명칭을 사용하고 싶지 않다고 하는 배외 의식의 표명이기도 했다.
http://www.e-obs.com/top/heo/heodata/n583.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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