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는 일본 아스카 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일본서기
577년 11월 백제 위덕왕이 飛鳥寺를 짓기 위해 기술자들을 일본에 파견했다
588년 백제에서 사원 건축 기술자들을 모셔 왔다
성예초 (聖譽 호류사 고문서
호류사에는 백제 기술자들이 만든 백제관음상 구세관음상이 있는데 호류사 고문서 성예초에는
백제 위덕왕이 아버지 聖王을 연모하여 만든 것이 구세관음상이다 백제가 倭 왕실에 보냈으며
593년 法興寺 금당에 안치시켰다 라고 기록하였다
부상략기 (扶桑略記)
593년 부처님의 사리가 담긴 사리함을 탑의 기둥 초석안에 넣는 행사가 벌어졌을때
100명의 倭國 대신이 모두 백제 옷을 입고 기뻐하였다
수산리 고구려 벽화 5세기 후반
다카마쓰 고분 벽화 7~~8세기
주름치마와 허리띠 머리를 뒤쪽으로 묶은 것이 고구려 벽화의 여인과 비슷합니다
일본서기
610년 고구려 승려 담징이 국사로 일본에 건너고 채색화 종이와 먹 멧돌 연자방아를 처음으로
일본에 보급해 주었다
호류사 건물중에 금당과 5층탑은 670년 화재로 재건되었다 또는 재건된 것이 아니다 라고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1905년 도쿄대학 건축학과 세키노 다다스 교수가 호류사의 금당과 5층탑은 고구려尺을 사용하여
지었다는 사실을 고구려 尺을 가지고 호류사 건물을 직접 실측함으로서 입증하였다
정릉사 (定陵寺)
북한 평양 고구려 시대 건축
고구려 벽화 단청 그림 등 참고하여 제대로 복원하였다
호류사 금당과 5층탑
호류사 건립은 고구려 백제 기술자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건축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서기 340년경 기록
백제의 왕이 옷을 짓는 女工 진모진 (眞毛津)을 일본에 보냈다
593년 부처님의 사리를 사리함에 넣는 행사에 100명의 倭國 대신이 백제의 옷을 입고 기뻐하였다
벽화나 기록으로 보면 고대 일본의 복식은 한반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허리띠 주름치마 긴 소매 등 고구려 벽화의 여인과 다카마쓰 고분 벽화의 여인의 복식이 비슷한데
전체적으로 보면 다카마쓰 벽화의 여인들의 복식은 고구려 벽화의 여인들의 복식에서 조금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 일본의 고온 다습한 기후에 적응하기 위해 변형된 것은 아닌가 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백제에서 倭 왕실에 보냈다는 백제 관음상과 救世 관음상이 호류사에 있고 백제에서 기술자를
일본에 파견했다는 기록이 있어
호류사와 호류사 건축 양식은 고구려 백제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韓国の三国時代高句麗百済新羅は日本飛鳥文化に多い影響を与えた
日本書紀
577年 11月百済威徳王が 飛鳥寺を作りために技術者たちを日本に派遣した
588年百済で社員建築技術者たちを連れられた
声誉初 (聖誉 法隆寺古文書
法隆寺には百済技術者たちが作った百済観音像救世観音像があるのに法隆寺古文書声誉初には
百済威徳王がお父さん 聖王を恋慕して作ったのが救世観音像だ百済が 倭 王室に行かせたし
593年 法興寺 金堂に安置させただと記録した
ブサングリャックギ (扶桑略記)
593年仏様の私利が盛られた舍利箱を塔の柱礎石の中に入れる行事が起った時
100名医 倭国 大臣が皆百済服を着て喜んだ
水山里高句麗壁画 5世紀後半
高松古墳壁画 7‾‾8世紀
ギャザースカートと腰巻頭を後方へ縛ったことが高句麗壁画の女人と似ています
日本書紀
610年高句麗僧侶曇徴が国史で日本に渡って彩色画紙と墨ひきうす蓮子穀物をつく臼を初めで
日本に普及してくれた
法隆寺建物中に金堂と 5階塔は 670年火事に再建されたまたは再建されたのではないと
論難があったと言う
1905年東京大学建築学とセキノ−ダダス教授が法隆寺の金堂と 5階塔は高句麗尺を使って
作ったという事実を煮こむね 尺を持って法隆寺建物を直接実測することで立証こんにちはだった
ゾングルングサ (定陵寺)
北朝鮮平壌高句麗時代建築
高句麗壁画丹青絵など参考して まともに修復した
法隆寺金堂と 5階塔
法隆寺 建立は高句麗百済技術者たちの努力で成り立った建築だと思います
日本書紀 340年頃記録
百済の王が服を作る 女工 ジンモジン (真毛津)を日本に送った
593年仏様の私利を舍利箱に入れる行事に 100人の 倭国 代わりが百済の服を着て喜んだ
壁画や記録で見れば古代日本の複式は韓半島の影響を受けたことで見えます
腰巻ギャザースカート長い袖など 高句麗壁画の女人と高松古墳壁画の 女人の 複式が似ているのに
全体的に見れば高松壁画の女人たちの複式は 高句麗壁画の女人たちの複式で少し変化して
あります
それは多分日本の高温多湿な気候に適応するために変形されたことではないかと言う見解があります
百済で 倭 王室に行かせたという百済観音像と 救世 観音像が法隆寺にあって 百済で技術者を
日本に派遣したという記録があって
法隆寺と法隆寺建築様式は高句麗百済の影響を受けたことは明らかで見えま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