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4, 4대째동 혼간지 미카게당(1826년 완성, 1858년 소실)

 

 

그런데, 3대째 미카게당은, 1823년에 다시 또 소실해 버렸다.

출화원래는 제설 있지만, 11월 15일 오후 5 시경에 불길이 올라, 점차 불타 퍼져 미카게당에 가까워졌기 때문에, 신란의 미카게를 시작해 미카게당의 창호, 다다미, 도구류 등은 전부 옮겨 나왔다.

 

그리고, 11월 16일 오후 1 시경, 미카게당은 소실했다.

 

 

거듭되는 소실로 동 혼간지는 재정난에 빠져 있었지만, 우선은 1823년 12월, 카와치의 모리구치 고보 본당을 이축해 가짜의 미카게당으로 했다.

그리고 다음 해의 정월에 「동 혼간지 소실에 대해, 7 조목」이 전국의 문도에게 향해서 발포되었다.

 

 

그 「7 조목」은, 규칙이나 불법의 가르침에 따르는 일의 외, 국법에도 따라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예를 들면 카가번은 동 혼간지 소실의 문병을 위한 상경(쿄토에 가는 것)이나 기부를 금지하고 있었다.동 혼간지는, 민중의 과도의 기부를 우려하는 영주에게 배려했던 것이다.

또, 재건이 개시되고 나서 발포된 「6 조목」에서는, 무리한 상납금의 권유를 금지하고 있다.가람 재건에 의해서 신앙심을 획득하는 것이 목적인데, 그러면 본말 전도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들을 보면, 전회의 가람 재건의 반성도 밟고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7 조목이나 6 조목은, 동 혼간지의 승려나 학승에 의해서 전국에 넓힐 수 있었지만, 이것이 매우 호평을 얻고, 전국으로부터 지지를 받았다.그 결과, 가람 재건도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4대째 미카게당과 아미다도우의 평면도

 

평면도적으로는, 큰 변경은 없다.

 

 

 

4대째 미카게당의 측면도

 

 

4대째 미카게당은, 상층의 량행 치수가 매우 크다.

현재의 미카게당의 상층량행 치수는 110자(33.3 m)이지만, 4대째는 131자(39.7 m)도 있다.

이만큼 크면 상층 지붕의 중량감이 굉장했을 것이다.

 

또, 3대째의 상층 부분은 량행 6간에 표현되고 있었지만, 4대째는 8간이 되어 있다.

(표현되고 있다고 썼지만, 이것은 상층의 내부가 전부 오두막조이기 위해. 6간이겠지만 8간이겠지만, 이것은 외관에 지나지 않는다.)

 

역대 중(안)에서는, 이 4대째가 가장 보고 싶은 미카게당이다.

 

 

 

 

 

5, 5대째동 혼간지 미카게당(1861년 완성, 1864년 소실)

 

 

1858년 6월 4일 정오무렵, 시모교의 스와쵸로부터 화재가 발생했다.

이것이 점차 불타 퍼져, 안정의 대화재에 연결된다.

불길은 동 혼간지로 옮겨, 결국 4대째 미카게당은 다시 또 소실해 버렸다.

 

그리고, 재건의 준비는 소실한 다음날에 조속히 행해지고 있다.

6월 15일에는 「 양당재건의 서립」이 제국의 승려나 문도에게 나타나고 재건이 급해졌다.

서두른 이유는, 3년 후에 신란의 600 회기를 앞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서 만났다.

 

 

 

5대째 미카게당과 아미다도우의 평면도

 

 

5대째로 주목받는 것은 재건의 스피드이다.

신란 600 회기를 향해서 급해졌다고는 말할 수 있어 불과 1년반에 5대째 미카게당은 완성했다.

5대째는 장식이 간소하고, 역대의 미카게당 중(안)에서는 수수한 존재다.

하지만, 평면 규모는 4대째로 변함없다.

 

요컨데, 정면 60 m이상, 측면 50 m 가까운 건물이 1년반에 세워졌던 것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동 혼간지의 조직력이 굉장했으니까와 다름없다.

 

5대째 미카게당의 측면도

 

 

4대째 미카게당이 소실했을 때, 동 혼간지의 건축 공사 조직은 존속하고 있었다.

4대째의 가람 축조가 계속 되고 있었던 것이다.이것도 스피드 재건을 달성할 수 있던 한 요인이다.

 

6월 5일 소실의 다음날 , 조 방과 정역이라고 하는 직무가 설치되었다.

6월 25일에는 쇼핑분, 소품 담당자, 철물분등이 신설되어 건축 공사 조직이 강화되어 간다.

그리고 10월 10일, 동 혼간지의 최고 의결기관인 「상단간」에 공사 예정의 견적이 보고되었던 것이다.

또, 재건에는 전국에서 목수가 모였다.그들은 목수 머릿속정가로부터 증명서를 발행받아, 건축 공사에 종사했다.

 

5대째 미카게당의 재건은, 4대째 가람 재건을 기초로 하면서, 동 혼간지의 강력한 조직력을 배경으로, 불과 1년반이라고 하는 단기간으로 달성된 것에서 만났다.

 

 

 

4대째와 5대째 미카게당의 측면도의 비교

 

5대째(앞)는, 4대째(안쪽)와 평면적은 거의 같지만, 무나다카는 4대째가 꽤 높다.

5대째는 하층의 공포가 주주목, 화려한 장식도 거의 없다고 하는 간소한 외관이었지만, 그것은 이 측면도로부터도 전해져 온다.

게다가 상층이 키가 있어 구조가 되어 있었던 것도 큰 특징이었던 것 같다.

대규모 키가 있어 구조의 불당은 본 적이 없기 때문에, 5대째나 흥미로운 존재이다.

 

 

계속된다

 

 

 

 

 


東本願寺御影堂の歴史、その3

 

 

4、4代目東本願寺御影堂(1826年完成、1858年焼失)

 

 

さて、3代目御影堂は、1823年にまたも焼失してしまった。

出火元は諸説あるが、11月15日午後5時頃に火の手が上がり、次第に燃え広がって御影堂に近付いてきたので、親鸞の御影をはじめ、御影堂の建具、畳、道具類などは全部運び出された。

 

そして、11月16日午後1時頃、御影堂は焼失した。

 

 

度重なる焼失で東本願寺は財政難に陥っていたが、まずは1823年12月、河内の守口御坊本堂を移築して仮の御影堂とした。

そして翌年の正月に「東本願寺焼失につき、7箇条」が全国の門徒に向けて発布された。

 

 

その「7箇条」は、掟や仏法の教えに従う事の他、国法にも従うべきだと強調している。

例えば加賀藩は東本願寺焼失の見舞いの為の上京(京都へ行くこと)や寄進を禁止していた。東本願寺は、民衆の過度の寄進を憂慮する領主に配慮したのである。

また、再建が開始されてから発布された「6箇条」では、強引な上納金の勧誘を禁止している。伽藍再建によって信仰心を獲得するのが狙いなのに、それでは本末転倒ということである。

これらを見ると、前回の伽藍再建の反省も踏まえているように思える。

 

7箇条や6箇条は、東本願寺の僧侶や学僧によって全国に広められたが、これが非常に好評を得て、全国から支持された。その結果、伽藍再建も順調に進めることが出来たのである。

 

 

 

4代目御影堂と阿弥陀堂の平面図

 

平面図的には、大きな変更はない。

 

 

 

4代目御影堂の側面図

 

 

4代目御影堂は、上層の梁行寸法が非常に大きい。

現在の御影堂の上層梁行寸法は110尺(33.3m)だが、4代目は131尺(39.7m)もある。

これだけ大きいと、上層屋根の重量感が凄かっただろう。

 

また、3代目の上層部分は梁行6間に表現されていたが、4代目は8間になっている。

(表現されていると書いたが、これは上層の内部が全部小屋組であるため。 6間だろうが8間だろうが、これは見せ掛けに過ぎない。)

 

歴代の中では、この4代目が最も見てみたい御影堂である。

 

 

 

 

 

5、5代目東本願寺御影堂(1861年完成、1864年焼失)

 

 

1858年6月4日正午頃、下京の諏訪町から火災が発生した。

これが次第に燃え広がり、安政の大火に繋がる。

火の手は東本願寺に移り、結局4代目御影堂はまたも焼失してしまった。

 

で、再建の準備は焼失した次の日に早速行われている。

6月15日には「両堂再建の御書立」が諸国の僧侶や門徒に示され、再建が急がれた。

急いだ理由は、3年後に親鸞の600回忌を控えていたからであった。

 

 

 

5代目御影堂と阿弥陀堂の平面図

 

 

5代目で注目されるのは再建のスピードである。

親鸞600回忌に向けて急がれたとは言え、わずか1年半で5代目御影堂は完成した。

5代目は装飾が簡素で、歴代の御影堂の中では地味な存在だ。

だが、平面規模は4代目と変わらない。

 

要するに、正面60m以上、側面50m近い建物が1年半で建ったのである。

それが可能だったのは、東本願寺の組織力が凄かったからに他ならない。

 

5代目御影堂の側面図

 

 

4代目御影堂が焼失した時、東本願寺の作事組織は存続していた。

4代目の伽藍造営が続いていたのである。これもスピード再建を達成できた一因である。

 

6月5日焼失の次の日、調方と定役という役職が設けられた。

6月25日には買物方、道具方、金物方などが新設され、作事組織が強化されていく。

そして10月10日、東本願寺の最高議決機関である「上壇間」に工事予定の見積もりが報告されたのである。

また、再建には全国から大工が集まった。彼らは大工頭の中井家から証明書を発行してもらい、作事に従事した。

 

5代目御影堂の再建は、4代目伽藍再建を基礎としながら、東本願寺の強力な組織力を背景に、わずか1年半という短期間で達成されたのであった。

 

 

 

4代目と5代目御影堂の側面図の比較

 

5代目(手前)は、4代目(奥)と平面積はほとんど同じだが、棟高は4代目の方がかなり高い。

5代目は下層の組物が舟肘木、派手な装飾もほとんど無いという簡素な外観だったが、それはこの側面図からも伝わってくる。

さらに、上層がせがい造りになっていたのも大きな特徴だったようだ。

大規模なせがい造りの仏堂は見たことがないので、5代目も興味深い存在である。

 

 

つづ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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