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래인 축제가 열리고 있는 일본 마츠모토 [松本] 아사마 온천 근처입니다
온천 근처 고분에서 금관이 출토되었는데 한반도 가야 금관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밝혀져
지역 주민들 중심으로 가야와 마츠모토 교류 역사에 대해 공부하는 모임이 만들어졌고
가야인들을 기념하는 축제를 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축제에는 한국인과 관심있는 일본인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가야와 백제의 동맹
일본에 수도[水稻]농업으로 농경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야요이 초기 문화를 열었던
도래인은 현재 경상남도 지역의 가야인들이 일찍 부터 일본 北큐슈에 근거지를 만들어
세력권을 형성해 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 사람들은 고대 이즈모 현재 시마네 지방으로 건너고 있었고
가야 사람들은 北큐슈에서 세력을 키우고 세토카이나이 라는 內海와 연안 지방을
경유해 나라 [奈良] 교토 지방으로 진출해 여기에 야마토 정권을 세운다
야마토 정권은 천황家를 이루고 한반도의 가야 잔존 세력과 유지를 위해 백제계와 동맹을 맺는다
백제의 지식인들은 일본으로 건너고
가야계 천황들과 관료집단을 형성해 수준 높은 기술과 불교 문자 등 문화를 전해 주었다
신라와 백제의 동맹
427년 고구려가 수도[首都]를 평양으로 천도하자 위협을 느낀 신라와 백제는 동맹을 맺는다
475년 고구려는 백제를 공격해 수도[首都]한성을 함락시켰다
538년 백제는 수도 [首都]를 사비[泗批]로 천도하고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551년 동앵국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한다
백제는 한강 하류지역으로 진격해 6군을 회복하고
신라는 한강 상류지역으로 진출하여 죽령 [竹嶺]이북 고현 이남의 고구려 영토 10군을
점령하였다
신라와 백제 동맹국에서 적국으로
533년 신라는 백제를 공격해 백제가 회복했던 한강 하류지역을 점령한다
이 전쟁으로 신라와 백제의 동맹은 깨진 것이다 백제의 신라에 대한 배신감은 대단했고
신라는 백제의 공격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강성해진 신라
한강유역을 차지한 신라는 중국과 직접교류할 수 있는 문호를 얻었다
신흥 돌궐의 남하로 압력을 받고 있던 고구려와 화해한 신라는
554년 백제 가야 倭의 연합군의 공격을 막는다
국내 사정이 혼란한 고구려의 묵인 아래 백제는
554년 일본으로 부터 군사 1000명 말[馬]100필 배 40척을 파견할 것이라는 회답을 받아
倭 가야 백제의 연합군은 신라를 공격하였다
이것이 관산성 [管山城]전투이다
이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聖王이 전사하고 신라가 승리하였다
고구려의 남하 신라의 세력확장으로 일본으로 건넌 가야 백제인들은 야마토 정권과 연합하며
신라를 자주 공격했다 倭 가야 백제의 연합이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신라는 고구려의 도움으로 이 3연합을 막아내고 강성해져
554년에는 신라의 힘으로 백제 가야 倭의 연합군을 섬멸하고 삼국통일을 이룬다
일본의 反신라 정서 형성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에 일본에서는 신라를 미워하는 反신라 정서가 형성되는데
이것은 그 당시 일본內에 가야 백제 계통의 사람들이 신라에 대한 증오심이 작용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일본서기를 편찬한 것으로 추정되는 후지와라 후히토 [藤原不比等 ]라는 인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후지와라 후히토[藤原不比等]는 백제 왕족 출신으로 일본서기를 편찬하는데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나카노 오오에[中大兄 황자 ]를 도와 쿠테타를 일으킨
나카토미노 카타마리 [中臣鎌足]의 아들이다
그는 친 신라 정권이던 天武천황 시절에 숙청을 면하는데 급급했을 정도로 핍박을 받았으나
文武천황 옹립에 성공하여 정계의 실력자가 되었다
그가 주도한 일본서기는 신라는 일본이 공격하면 곧 바로 항복해 충성을 맹세한다 등 신라를
매도하고 백제는 불교 문자 등 문화를 전해 주었던 고마운 나라 라고 편향적으로
쓰고 있는 것이다
일본서기 720년 발간은 半이상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의 기사 라고 한다
서기 562년
신라가 대가야[大伽倻]를 점령해 가야가 최종적으로 멸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일본의 欽明천황은
신라는 서쪽의 더러운 나라이다 우리 백성이 신라에게 무슨 원한이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긴 槍과 강한 활 [弓]로 가야를 공격해 백성을 죽이고 우리 친척을 죽이고 상하게 하며 肝과 다리를 자르고
뼈를 들에 널고 시신을 불태우는 짓을 망설이지 않는다
그들은 가야의 우리 백성을 칼 도마에 올려 놓고 난도질을 마음대로 저지른다 이 간악한 무리에게
천벌을 내리게 하여 천지에 맺힌 원한을 풀고 임금과 조상의 원수를 갚지 못한다면 신하와 자손의
길을 다 하지 못한 후회를 뒷날에 남기게 될 것이다
라고 한탄했다고 일본서기에서 전한다
가야 세력의 사람들을 일본 천황은 친척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고대 일본을 세운 세력이
가야와 연관되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인 중에는 일본의 선조가 한반도에서 왔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到来である祭りが開かれている日本松本 [松本] アサマ温泉近くです
温泉近く古墳で金冠が出土されたが韓半島伽揶金冠と連関があることで明かされて
地域住民たち中心に伽揶と松本交流歴史に対して勉強する集まりが作られたし
伽揶人たちを記念する祭りを開くようになったと言います
が祭りには韓国人と関心ある日本人たちが参加しています
伽揶と百済の同盟
日本に首都[水稲]農業で農耕生活が本格的に始まる彌生初期文化を開いた
到来人は現在慶尚南道地域の伽揶人たちが早くから日本 北九州に足だまりを作って
繩張を形成して行っていた ことと見える
新羅人々は古代出雲現在シマの地方で渡っていたし
伽揶人々は 北九州で勢力を育ててセトカイナイという 内海と沿岸地方を
経由して奈良 [奈良] 京都地方で進出してここに大和政権を立てる
大和政権は天皇家を成して韓半島の伽揶残存勢力と維持のために百済係と同盟を結ぶ
百済の知識人たちは日本で渡って
伽揶係天皇たちと官僚集団を形成して水準の高い技術と仏教文字など文化を伝えた
新羅と百済の同盟
427年高句麗が首都[首都]を平壌に遷都すると脅威を感じた新羅と百済は同盟を結ぶ
475年高句麗は百済を攻撃して 首都[首都]漢城を陷落させた
538年百済は首都 [首都]を私費[泗批]に遷都して高句麗に奪われた漢江流域を回復しようと
した
551年ドングエンググック新羅とともに高句麗を攻撃する
百済は漢江下流地域で進撃して 6軍を回復して
新羅は漢江上流地域で進出して竹嶺 [竹嶺]以北 古賢以南の高句麗領土 10郡を
占領下だった
新羅と百済同盟国で敵国に
533年新羅は百済を攻撃して百済が回復した漢江下流地域を占領する
が戦争に新羅と百済の同盟は割れたことだ百済の新羅に対する背信感はすごかったし
新羅は百済の攻撃を避けることができなくなった
剛性された新羅
漢江流域を占めた新羅は中国と直接交流することができる門戸を得た
新興突厥の南下で圧力を受けていた高句麗と仲直りした新羅は
554年百済伽揶 倭の連合軍の攻撃を阻む
国内事情が混乱する高句麗の黙認の下百済は
554年 日本から軍事 1000人言葉[馬]100畢杯 40尺を派遣するはずだという回答を受けて
倭 伽揶百済の連合軍は新羅を攻撃した
これが管山城 [管山城]戦闘だ
が管山城戦闘で百済 聖王が戦死して新羅が勝利した
高句麗の南下新羅の勢力拡張で日本で 渡った伽揶百済人たちは大和政権と連合して
新羅をよく攻撃した 倭 伽揶百済の連合が自然に 形成されたことだ
新羅は高句麗の助けにこの 3連合を受け止めて 剛性されて
554年には新羅の力で百済伽揶 倭の連合軍を殲滅して三国統一を成す
日本の 反新羅情緒形成
新羅の三国統一以後に日本では新羅を憎む 反新羅情緒が形成されるのに
これはその頃日本内に行くと百済系統の人々が新羅に対する憎悪心が 作用されたと思う
見解がある
日本書紀を編纂したことに推定されるFujiwaraフヒト [藤原不比等 ]という人物に注目する
必要がある
Fujiwaraフヒト[藤原不比等]は百済王族出身で日本書紀を編纂するのに大きい影響を及ぼした
人物で中野オオに[中大兄 皇子 ]を手伝ってクーデタを起こした
ナカトミノ−カタマリ [中臣鎌足]の息子だ
彼は 打った新羅政権だった 天武天皇時代に首切りを兔れるのに汲汲していた位に逼迫を 受けたが
文武天皇擁立に成功して政界の実力者になった
彼の主導した日本書紀は新羅は日本が攻撃すればすぐところで降伏して忠誠を誓うなど新羅を
売り渡して百済は仏教文字など文化を伝えたありがたい国だと偏向的に
使っているのだ
日本書紀 720年発刊は 半以上高句麗新羅百済伽揶の記事と言う
西紀 562年
新羅が大伽揶[大伽〓]を占領して伽揶が最終的に滅亡したという消息を聞いた日本の 欽明天皇は
新羅は西の方の汚い国だうちの民が新羅に何の恨みがあるか? それにもかかわらず
新羅は長い 槍と強い弓 [弓]で伽揶を攻撃して民を殺して うちの親戚を殺して いたむようにして 肝と足を切って
骨を野に干して死体を燃やす仕業のためらわない
彼らは伽揶の私たちの民を 刀まな板に乗せて乱切りをわがままやらかすこの奸悪な無理に
天罰を下げるようにして天地にくすぶった恨みを晴らして王様と先祖の仕返し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ら臣下と子孫の
道を終え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後悔を又の日に残すようになるでしょう
と嘆いたと日本書紀で伝える
伽揶勢力の人々を日本天皇は親戚だと呼んでいてこれは古代日本を建てた勢力が
伽揶と連関されていることを言っているのだ
日本人の中には 日本の先祖が韓半島から来たということを認める人々も多いというのを
分かりました